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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앞에서 (삼하 6: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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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앞에서 (삼하 6:9-23) 
 
 
지난주에 이어서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네 신앙에서 체험, 신비, 효율성, 편의성, 정성, 열정, 진심, 합리적 판단 등 무엇이라도 말씀보다 앞세우면 나름대로 행한 것과 같습니다. 진심과 성심을 담았을지라도 그 일이 말씀에 위배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처럼 크게 쓰임 받았던 인물도 예외가 되지 않았지요.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방식은 말씀을 지키는 일을 통해 나타납니다. 말씀을 제쳐놓고 나름대로 행함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위기 상황일지라도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을 행하거나 그런 일을 합리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여호와의 말씀에 복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끔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항상 말씀으로 통치 받는 상태가 되어야 하지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임금님의 어명이라는 ‘말씀의 권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인식은 단지 성경 말씀을 달달 암송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을 매주 외우지만 그 내용은 전혀 주의치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시간에만 잠시 말씀을 머리에 저장하는 정도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씀이 예배 후 삶의 현장에서도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실제로 지배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증시하며 사는 모습이 됩니다.

다윗은 베레스웃사의 사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배웠습니다.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치실 수 있음을 깨달았겠지요. 그 날에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습니다(10). 그 후 석 달 동안 여호와께서는 가드 사람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이 다윗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사무엘서에서 “하나님의 궤”는 양면성을 가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궤에 대한 자세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궤가 상징하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달라졌지요.

다윗은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갔습니다(11-12). ‘두려움으로’ 궤를 옮기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 보십시오. 불과 3달 전만해도 그는 여호와를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궤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쁨이 된 까닭이 무엇일까요? 13a절을 보면 “궤를 멘 사람들”이 언급되는데, 다윗이 더 이상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민 4:15). 재앙의 때에 말씀에 무지하면 그분을 가까이 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심판 받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지요. 하지만 말씀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되면 진리가 자유하게 합니다(요 8:32).

간혹 단순한 열정과 진심으로 신앙생활 하다가 남겼던 허물진 추억이 성도의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다시 잘못 행할 것이 두려워서 차마 새로운 일을 시도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지내지요. 이전의 열정조차 사라진 채 시간만 보내는 것이 답답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도 문제이지만, 두려움 때문에 열정을 상실해 버리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말씀을 바르게 배우는 일’에 진심과 열정을 쏟는 일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행하게 되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시 2:11) 수 있는 상태가 되지요.

하나님의 궤를 옮기면서 다윗은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춥니다(13b-14). 다윗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었습니다(15). 무겁고 칙칙하고 따분한 모습이 아니라 흥겨운 축제 분위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배웠으나 이전보다 더 즐겁고 유쾌하고 열정적인 모습이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즐거움도 없이 엄숙하고 근엄하게만 살아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항상 딱딱하고 심각한 스타일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혼돈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해갈수록 바른 동기와 바른 목적뿐만 아니라 바른 수단과 바른 열정까지 추가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겠지요.

다윗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빈약했을 때 모든 백성이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했습니다. 반면에 다윗 한 사람이 말씀을 정확히 순종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이 일은 지도자가 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얼마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성심을 다해 연구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고 했는데, 지도하는 위치에 있을수록 행사를 주관하는 일보다 주야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분별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법을 깨뜨리는 데서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지각없는 자에게 우둔함이 말하는 내용입니다(잠 9:16-17). 하지만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고 했습니다. 법을 깨뜨리며 나름대로 살기보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 1:1-2)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 일과 관련된 시편에서 다윗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 24:7-8)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영광의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 췄는데, 이를 보고 미갈이 심중에 저를 업신여겼습니다(16). 그녀는 ‘다윗의 아내’가 아닌 “사울의 딸”로 3번(16, 20, 23) 소개됩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그 날에 그녀만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녀의 냉소는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영적인 의미나 역사적 의미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미갈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인 것만 보고, 여호와께서 영광의 왕 되심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영화”롭게 되는 것만 고려했지, 하나님의 영화롭게 되심은 고려하지 못했지요(20). 다윗이 왕복을 벗고 세마포를 입은 일도 여호와 앞의 겸비한 행동이 아니라 “계집종의 눈앞에서” “방탕한 자”의 짓으로 해석합니다. 미갈의 눈에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모든 열정은 단지 “염치없이” 행한 부도덕한 일로 취급되었습니다(20). 미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의식하며 살았던 다윗의 동반자로 살지 못했습니다. 도무지 영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생각지 못했던 사울의 딸로서 살았지요. 사울이 다윗을 대적했던 것처럼 그녀도 다윗을 대적하고 맙니다.

다윗은 미갈에게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또 여호와께서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셨음을 말합니다(21). 이는 미갈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과 같은 소리지만, 사울과 같은 신앙이라면 미갈도 버림받을 수밖에 없음을 매섭게 지적한 것이지요. 사무엘서에서 하나님의 궤에 대한 태도는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23)는 말은 일차적으로 더 이상 다윗이 미갈과 동침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입니다만, 궁극적으로는 미갈이 당시 근동에서 저주받은 여인으로 인식했던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음을 보여줍니다.

미갈이 자신과의 혼인 관계의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발디엘과 결혼한 문제에 대해 적어도 사무엘서에서는 다윗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3:15).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신앙의 문제는 심각하게 집고 넘어갑니다. 미갈은 사람들 앞에서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22) 여호와 앞에서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소요리문답 1답에서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지요. 이점에서 다윗과 미갈은 함께 하기엔 가치관이 너무 달랐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단정하고 품위 있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성경은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라고 했습니다(딤전 2:9). 얌전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단장하라는 말입니다. 예배에 참여하면서 대충 옷을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참여한다면 그 마음 자세를 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 외적인 품위와 체면 유지를 위해 영적인 무관심이 야기되는 일은 경계를 해야 마땅합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과 체계적으로 잘 구성된 행정체계를 통해 세련된 서비스를 제공받는 기쁨만 알뿐 하나님을 기뻐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버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무엘서 6장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5, 14, 16, 21) 행했음을 5번 반복합니다. 언제나 세상의 풍조는 ‘사람 앞에서’ 살아가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 오늘날도 승용차나 주거 환경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 앞에서의 격조와 품위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다윗의 집안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지요. 그래서 여호와 앞에서 행하려했던 다윗의 신앙이 더욱 귀하게 여겨집니다. 다윗은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 왕이라는 신분보다 여호와의 앞에서 그분의 종이라는 신분을 더 귀히 여겼던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듯이 의식하며 그분의 종으로 살기를 기뻐했지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 줄 알았던 신앙인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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