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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송하리로다 (엡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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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리로다 (엡 1:3-14)


여러분은 도대체 얼마짜리 인생입니까? 인간을 화학적으로 값을 매기면 천 원짜리 한 장도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뉴욕대학의 윌리암 바인디어 박사는 우리 인간의 가치는 1불 8센트의 가치밖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모든 것을 수치로 계산하는 계량화된 사회에서는 사람도 상품처럼 값을 정합니다. 소위 헤드 헌터(Head Hunter) 업체에서는 사람의 경력이나 능력에 따라서 값을 매기고, 회사에 소개를 합니다. 사람을 점점 상품화시키고 있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짧은 한 생을 살면서 우리의 행동 기준이 될 만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과 삶의 질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곧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내 신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과 삶의 질이 달라지게됩니다. 그것은 곧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내 신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아주 소중한 자야. 나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하고 그 말을 믿고 그대로 말하는 사람은 벌써 행동에서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납니다. 삶의 질에 있어서도 다릅니다. 그러나 "내가 별 볼일 있나?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하는 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행동도 그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생활도 질적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성공이나 명성, 권력의 소유 여부가 그 사람을 재는 잣대가 됩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판단하는 물질세계에 우리가 갇혀 있으므로, 자연히 남에게 드러나는 무언가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성공이나 권력, 명성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따라 평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가치가 결정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고, 나를 누구로 인정하시며, 얼마나 귀한 존재로 보시는 가에 따라 나의 존재가치가 달라진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온 세상이 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보시지 않으면 이미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미가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에배소서를 살려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당시 깊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그는 1장 3절의 이 편지의 서두를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그는 그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에게서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왜냐고요? 그가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지상의 고난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찬양을 강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과 우리에게 허락된 하늘에 속한 어마어마한 영적인 축복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축복들을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이유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이 에베소서 1장에 6절과 12절, 14절에서 반복됩니다. 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발견한 사람들이 세속에 빠져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망각한 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은혜, 이 사랑을 안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가 찬양합니까? 

1. 성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은 ‘선택’과 ‘양자 삼으심’이란 두 교리적인 단어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 전부터 그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정하셔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본래 그의 자녀가 아니었는데 은혜로 자녀가 되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4-5절의 말씀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그분 보시기에 더럽고 추한 존재인가를 아시고도 우리가 마침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그 앞에 설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의 자녀 삼기로 창세 이전부터 선택하시고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온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신 그 광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구원 받고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얼마 전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최신 과학기술을 동원해 허블우주망원경을 만들었습니다. 그 망원경은 150억 광년의 거리에 있는 천체까지도 관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의 일곱 바퀴 반을 도는 빛의 속도로 150억년이라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빛이 150억년 동안 달려가서 도달한 거리 밖까지 계속되는데, 그 우주는 허블우주망원경을 가지고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아직 빛이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도달하면 그때는 더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광대함을 가진 우주입니다. 그런데 이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광대하실까요? 그런데 그 크시고 위대하신 분이 티끌보다도 못한 나를 창세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면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사실인지 모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이 조건 없는 선택과 양자됨의 은혜를 상기시키시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살아야 할 이유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6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2.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유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축복은 다시 ‘구속과 계시’라는 두 교리적인 단어들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구속이란 말은 본래 ‘값을 치르고 다시 산다’와 ‘다시 사서 자유를 준다’는 이중적인 뜻을 지닙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노예시장에서 사용되던 단어이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절 노예를 거느리는 것은 신분의 상징이었고 당시 정복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고가로 거래되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한 노예를 두고 흥정을 벌려 비싼 값을 치르고 그를 산 다음 그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이제 당신은 자유인이요 부디 행복하게 사십시오’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실제로 로마의 주인들 가운데 자비로운 주인들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는 일이 드물지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속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실상 하나님 보시기에 죄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분은 친히 그가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시고 그는 우리에게 죄에서의 자유 곧 죄 사함을 선언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에게 그는 이제 하늘의 비밀을 알고 사는 자가 되게 하는 축복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8-9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여러분은 누구에게 비밀을 알리십니까? 정말 친한 자가 아니면 안 되지요? 제 비밀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제 아내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비밀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친한 친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요한15:1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배워 알고 하늘의 뜻을 깨달아 아는 자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 아닙니까? 아니 이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구원의 기쁨을 어찌 찬양 안 할 수 있겠습니까? 

헨리 나우웬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심리학자요, 신학자입니다. 오랫동안 노틀담 대학과 예일 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으며, 매년 무게 있는 책을 한 권씩 써 낼 정도로 부지런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1996년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10년을 캐나다에 있는 "데이 브레이크"라고 하는 정신 지체 장애인 수용 기관에서 봉사하면서 보냈습니다. 그가 끝까지 맡아서 돌보던 장애아는 아담이라는 스물 다섯 살 먹은 청년이었습니다. 아담은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있는 중증 장애인으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옷도 혼자 힘으로 입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심한 장애를 안고 있던 터라 자기를 돌봐 주는 사람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자기에게 그렇게 정성을 쏟는지도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우웬 박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를 닦아주고,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빗겨 주고, 옷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 시간에는 제 맘대로 움직이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만도 두 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어느 분이 나우웬 박사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박사님, 박사님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고 또 아직 써야 할 책도 많은데 왜 여기 와서 이런 일에 매여 있습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자 나우웬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여기 와서 젊은이를 돕는 것은 젊은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이 아담이라는 청년을 통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으며, 또 영적으로 심한 장애를 안고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수고하는 분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줘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다 영적으로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해요. 별로 감동도 받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지금 얼마나 큰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3.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인치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소유권을 뜻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인 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자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너는 내 것이라?(사43:1)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의 보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당신의 보배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여겨 주시고 그렇게 돌보아 주신다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엇을 염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우리의 기업에 성령으로 보증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에서 기업이란 성도들이 장차 올 세상과 이 땅에서 누리게 될 축복을 망라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이 장차 우리가 누릴 모든 축복의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계약하면 먼저 보증금을 지불합니다. 이 보증금은 앞으로도 확실히 내겠다는 보증이요 이미 내기 시작한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확증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 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을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을 성삼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까? 이 아침!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에베소서 1장을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유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긍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만 닿으면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천국의 거문고와 같습니다. 성도는 이미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고전 11: 23-27절, 그는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고, 사십에 하나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을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 가운데서 보냈으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 여러번 자지 못했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리고 고전 12: 8-9을 보면 몸의 가시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해서 고통 가운데 있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을 능욕하고 모함하고 시기하고 핍박을 받고 배신을 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선물이 너무나 크고 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로마의 시민권이나 사람들이 존경하는 학문과 비교할 때 세상의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구속하신 사랑과 또 구원의 영광이 너무나 크고 존귀하기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가능성 없던 자기를 찾아오셔서 오히려 자녀 삼으신 것을 생각할 때 너무나 귀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를 범하고 두려워하면서 회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시편 51편 12절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 잃어버려도 살 수 있지만 오늘 내가 나의 삶을 희망차게 사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구원의 소식이 얼마나 크고 귀한가를 알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구원이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영원한 약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울고, 웃고, 즐거워하고 슬퍼합니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아갑니까? 돈입니까? 지위와 명예입니까? 건강입니까? 자녀들입니까? 이것이 정말 여러분에게 귀합니까? 그러나 다 썩어질 유한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고후 4:8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능력의 보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다시 묻습니다. 비록 우리는 첩첩산중에서 빠져나갈 길을 모르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더 확실한 장밋빛 시대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고백의 찬양이 내 삶 전체가 되어야합니다. 이 찬양이 마르지 않는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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