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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시험 (창 22:1-2,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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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험 (창 22:1-2, 8-14)


지난주 더위, 폭염이었는데, 평안하셨는지요? 단기선교팀도 은혜 중, 잘 다녀왔습니다. 고등부 수련회 오늘 오후까지 진행 중인데, 교사들의 수고가 참 많다는 소식 전해드립니다. 폭염 무더위 보내느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제가 벌써 立秋였다고 합니다. 自然은, 한 더위 정점에서 우리보다 앞서서 가을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믿음은 本來, 환경을 너머서는 것이어야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환경과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온갖 試驗들 가만 보면, 대부분이 우리 삶의 환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후, (마태복음의 증언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주리셨다”합니다. 그때, 마귀가 예수님께 와서 시험하지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일 먼저 사용한 도구가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40일 밤낮, 금식하고 주리셨던 ‘예수님의 배고픔’이라는 환경입니다. 

‘우스’ 땅의 ‘욥’이라는 인물도 보십시오. 우스 땅은, 에돔 지역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살던 땅이지요. 이스라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에돔은 밀려난 땅이요, 버려진 땅입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자의 땅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버려진 땅에서 靈的인 巨木이 돋아났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욥이라는 인물입니다. 욥은, 버려진 땅에서 돋아난 靈的 巨木 같은 人物입니다. 

성경은, 그 욥을 가리켜 “穩全하고, 正直하여, 하나님을 敬畏하며, 惡에서 떠난 자더라”합니다(욥 1, 1). 욥은, “자식이 열이나 되었습니다, 아들 일곱이요 딸 셋이었습니다.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소유물이,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東邦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욥 1, 2-3). 여호와께서 그런 욥을, 사탄에게까지 자랑하시잖습니까?(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穩全하고, 正直하여 하나님을 敬畏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世上에 없느니라.”

그때, 즉각 사탄이 반론하지요.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욥 1, 10). 사탄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의의를 제기합니다. 욥이, 본래부터 절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자기 행복에 겨우니까, 하나님 경외하는 거지요. 主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所有物을 한 번 쳐 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할 것이라며, 욥을 혹독하게 시험했습니다. 

시험은, 우리 삶의 환경과 직결되어 나타납니다. 믿음의 조상(롬 4, 13) 아브라함도 그의 믿음이 頂點에 이르렀을 때, 엄청난 신앙적인 危機가 찾아왔습니다. 그 시험은, 그가 나이 100세가 넘도록 지켜왔던 자신의 모든 신앙을 단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도 남을 만한 ‘엄청난 신앙적 위기 사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의 頂點에서, 깊은 영적인 슬럼프에 빠졌던 겁니다. 진퇴양난이었습니다. 한 번은,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상황에 직면했던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처했던 이런 엄청난 신앙적 위기상황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試驗, nissah)하셨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작에 시험에 빠진 자는 누굽니까? 아브라함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성경의 증언은, ‘인간이 스스로 시험에 빠졌던 사건’을, 아주 수준 높은 신학적인 반성에서 표현한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에게는, 그가 100세에 얻은 獨子 이삭이 그렇게 사랑스럽게 성장했지만, 그에게는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는 아들에 대한 고통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아브라함을 고통스럽게 했던 시험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어떤 상황 속에서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믿고 살았습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사람들이 섬기던 ‘가나안의 토속종교신앙’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면서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가나안 종교? 바알 종교아닙니까? ‘그들의 宗敎的인 熱情’ 정말 대단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자기 신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열정적인 신앙’을 보면서 “하나님께 대한 내 신앙의 열정은, 제대로 된 것인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가나안 종교를 믿는 자들의 열정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께 대한 신앙열정에 비하면, 감히 비교도 안 될 만큼 그 열정이, 너무너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주전 15세기 전부터 주전 7세기(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가 패망하던 때까지)까지 가나안 땅을 중심한 고대근동지방의 종교는, 문자 그대로 그 종교적인 열정이!! 벌겋게 달아오른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가나안 땅에는, 바알종교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자기의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해하면서까지 바알에게 다가가기를 추구하던 종교입니다(왕상 18, 28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대결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가나안 주변국 암몬 족속은 ‘밀곰’, ‘몰렉’이라는 民族神을 섬겼는데, 그들은 자기 神에 대한 충정의 표시로 자기 자식을 불로 지나가게 하여, 불태워 제물로 바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왕상 11, 7b; 왕하 23, 10). 모압족속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그모스’라는 신을 섬겼는데, 그들도 역시 자식을 ‘그모스’ 神에게 제물로 바치는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왕상 11, 7a). 

우리나라 고전소설 심청전을 보아도, 處女 딸을 산채로 용왕님에게 제물로 바치면, 눈먼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한다는 민간신앙이 유포되고 있었던 것을 말해주잖습니까?

가나안 토속종교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신앙적인 열정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도 남았습니다. “저 가나안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을 위해서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잘라내기까지 하는데(왕상 18, 28), 나는 과연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저들만큼이나 높은 열정을 가지고 믿는 것인가?” 암몬족속, 모압족속은, 자기 신에게 자식을 불로 지나가게 하여 불로 태워서 드리기까지도 하는데, 나는 과연 그들만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이, 아브라함이 받았던 시험의 실체입니다.

가나안 땅과 주변 국가들 사람들이 섬기던 神에 대한 信仰熱情에 비한다면, 아브라함 자신의 신앙은 너무너무 초라하게 보였던 거지요.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인가? 어떤 신앙이,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바른 신앙인가? 이 물음을,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서 던지고 있었던 겁니다.

알라를 믿는 무슬림도 보십시오. 민간여객기를 하이재킹(hijacking)해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테러하지 않았습니까? 자살폭탄 테러를 지하드(jihad, 聖戰)라면서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들의 신앙 열정 못 따라 갑니다. 따라 해서도 안 되겠지만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야훼 하나님도 마치 가나안 종교의 신들, 바알이나 밀곰, 몰렉이나 그모스 神과 같이,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의 목을 칼로 쳐서, 피가 흐르는 채로 아들을 번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 드리는, 그런 종교행위를 감히 수준 높은 신앙이라고 칭찬하시면서, 그것을 강요하시는 그런 神이신지? 끊임없는 물음이 제기 되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은 死生決斷합니다. 독자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사라에게도 비밀로 했습니다. 몰래, 아침 일찍, 나귀 등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을 대동하고 독자 이삭과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서, 번제로 드릴 양도 없이, 불과 칼만 준비해서 결연하게 사흘 길, 모리아 산까지 갑니다. 사생결단한 아버지를 눈치 챘을까요? 이삭이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 7-8). 

모리아 산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습니다. 장작도 벌여놓습니다. 이삭을 결박합니다. 올려놓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金枝玉葉 같은 아들이삭을 잡으려고(shahat,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숨을 다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던 신앙의 진수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제기 된 시험이, 결판나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使者가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생결단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아서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때, 아브라함은 明確하고도 分明한 答을 얻습니다. “그렇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식(독자 이삭까지도)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는, 그런 종교적 헌신을 요구하는 󰡔이방우상 神(바알, 밀곰, 몰렉, 그모스)󰡕과는 다른 神이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은, 아들 이삭을 죽여서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말씀)에 죽음을 각오하고 복종하는 신앙󰡕 바로 그것이야! 바로 그것이야 …. 깨닫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야훼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아브라함이 번제로 드리고 싶었던 아들, 이삭 대신 “뿔이 수풀에 걸린 한 숫양”까지 준비해 놓으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셨습니다(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아브라함의 시험, 우리에겐 없습니까? 내가 가진 신앙열정이 或, 다메섹도상의 회심이전의 사울과 같은 열정은 아닌지요? 사울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과 흠 없음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지 않았습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런가 하면 우리는 또, 우리 시대 世俗文化의 盲目的 消費者로 살아가는 것을, 마치 하나님 잘 믿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목적을,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 富와 건강에 둡니다. 자녀교육도 이 시대 주류사회로부터 뒤처지지 않는 데 둡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인 양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시대의 세속문화의 큰 소비자가 되는 것을, 성공한 신앙인이 된 증표로 여기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가 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 줄 아니까요? 그렇게 못하는 것을 도리어 믿음 없음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우리시대 문화요 가치인 ‘자본주의에도 사영리’가 있습니다(CCC). 

(1) 급속한 성장을 통한 발전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장에 대한 강박증을 앓고 있습니다. 무제한적인 경제성장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과소비, 고성장, 고생산성이라는 發展의 神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빨리, 빨리, 빨리”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요, 노래입니다.

(2) 끝없는 소유와 소비를 통해서, 마음과 영혼의 평안을 추구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할 때, 행복하게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3)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救援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適者生存이라는 진화론적인 다윈의 생물학적 법칙은 부정하면서도, 적자생존이라는 경제․사회적인 다윈주의는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환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경쟁에 적합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가난해야 하고, 또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4) 책임 없는 기업을 통한 번영의 자유 법칙을 믿습니다. 얼마 전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재산의 절반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기부서약을 했는데,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기회, 다른 누군가는 이를 책임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國父 간디가 사회의 7가지 죄악을 언급하면서, 도덕성 없는 商業, 희생 없는 신앙을 말한 바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 깊숙한 곳에서부터 제기된 그가 받은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사람을 제물로 잡아 번제로 드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레위기 18장 21절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미가 선지자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아들, 자식)를 드릴까?”(미 6,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正義를 행하며, 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 시대의 문화와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하는 신앙, 바로 그 신앙, 하나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 아니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의 환경, 이 시대의 세속문화와 세속 가치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사울처럼 잘못된 신앙 열심 때문에, 주님을 핍박하기도 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진리의 말씀을 든든한 믿음의 반석으로 삼는 자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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