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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말씀 때문에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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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 때문에 (막 10:17-22)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 만남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와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니 감회가 새롭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동참했던 분들이나 그렇지 못한 이들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동일한 기쁨을 허락하시기를 빕니다. 맹자는 군자의 세 가지 기쁨을 말했습니다. 매우 주관적이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부모 형제 모두 무탈한 것(父母俱存 兄弟無故)이고, 둘째는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仰不愧於天 附不怍於人)이고, 셋째는 천하의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得天下英才而敎育之)입니다(孟子, 盡心長句). 스승의 즐거움이 좋은 인재를 만나는 것이라면, 제자의 경우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스승이 없는 인생처럼 적막한 것이 없습니다. 

1930년에 나온 감리교회 교리적 선언은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여기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스승’과 ‘모범’이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속자이며 구세주이시지만, 우리에게 참 삶을 가리켜 보이는 ‘스승’이요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1997년에 나온 감리회 신앙고백에서 이 대목이 빠진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1930년의 선언도 여전히 우리 신앙의 고백으로 유효합니다. 

어느 날 주님이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와는 달리 그는 단순합니다. 젊은이답습니다. 그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옷차림이나 거동을 보면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청년임이 분명합니다. 안락한 삶으로는 미처 채울 수 없는 삶의 공허감을 느꼈던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일까요? 파키스탄에서는 홍수로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러시아의 산불은 울창한 산림을 재로 바꾸고 있습니다. 해운대에서 이안류(離岸流, riptide, rip current; 해안으로 밀려오던 파도가 스러지지 않고 갑자기 먼 바다 쪽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에 휩쓸렸던 이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아마 인생무상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이토록 예측불가능입니다. 

이 젊은이를 예수께로 이끈 것은 어떤 절박함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구한 것은 질병의 치유나 물질적 복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저는 이 젊은이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은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 계명을 지키라

주님은 그 젊은이를 진지하게 대하십니다. 죽비를 들어 치듯 그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지 않으시고 차근차근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18)

지나친 겸양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말은 참입니다. 선함을 지향할 수는 있지만 세상의 어떤 사람도 ‘선함’ 그 자체일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원하지만 번번이 악을 행하는 자신에게 깊이 절망했던 바울을 생각해보면 될 일입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영적 여정에서 아주 낯선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말은 영적 지도자에게 붙이는 의례적인 수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관습적인 호칭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에게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계명을 가리켜 보이십니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19)

누구나 알고 있기에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계명들입니다. 왜 주님은 일반 상식에 속하는 계명을 새삼스럽게 가리키시는 것일까요? 저는 여기에 심오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삶의 길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비근한 일상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 진력하는 것이 참을 찾는 순례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십계명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계명들을 가리키신 까닭은 그 계명들과 영원한 생명이 무관하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참답게 살기 위해서는 나름의 원칙들을 세워야 합니다. 원칙을 세운다 해도 마음의 경계를 게을리 하면 넘어지기 쉬운 게 사람입니다. 

자기 삶에 투철한 사람들을 보면 참 감동스럽습니다. 지난 번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이영표 선수를 더 눈여겨보았습니다. 글을 통해 그의 성장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영표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부터 개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데, 즐기기 위해서는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새벽 운동과 저녁 운동을 10년 동안 지속했습니다. 훈련이나 시합으로 너무 힘든 날은 오늘은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자기를 이겨내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자기가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선배들을 깨울까싶어, 알람이 울리려고 ‘틱!’ 하는 순간 꺼 버린 다음 전날 준비해 두었던 옷을 입고 산을 뛰었다고 합니다. 그는 줄넘기 2단 뛰기를 쉬지 않고 1천 번 이상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노력의 결과보다 노력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고 말합니다(이영표․이승국,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 홍성사, 49쪽 이하 참조)

삶의 원칙을 꾸준히 지켜나갈 때 자기도 모르게 내면에 어떤 힘이 고이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그 젊은이는 그런 점에서 합격점을 받을 만합니다. 그는 계명을 자각하며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주님의 따스한 눈길을 생각하면 제 마음조차 따스해지는 것 같습니다.

• 한 가지 부족한 것

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기가 크게 깨지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더 깊은 세계로 나갈 수 없습니다. 자기 초월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젊은이를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23b)

주님이 젊은이에게 요구한 것은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자선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그는 기꺼이 그 요구에 응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젊은이에게 재산이 아닌 그의 존재 전체를 요구했습니다. 재산이 주는 안전감에 기대어 살아온 젊은이가 진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익숙하고 편리한 세계와의 결별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은 이처럼 엄정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인 루미는 한 요리사가 국자로 콩을 누르며 하는 말을 들려줍니다.

“뛰쳐나오려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괴롭히는 줄 알겠지만 사실은
지금 너에게 맛을 들이고 있는 중이다.
바야흐로 너는 양념에 버무려져 쌀밥과 함께
인간의 고귀한 생명으로 되는 것이다.
네가 밭에서 빗물을 받아 마실 때
이렇게 되기 위해서였음을 기억하여라.”
(루미, <<루미 詩抄>>에 나오는 <냄비 속의 병아리콩> 부분, 이현주 옮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인류와의 연대이고, 그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자신의 아픔으로 경험하는 것이고, 그들과 친밀하게 접촉하면서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런 접촉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재산일 수도 있고, 가문에 대한 헛된 자랑일 수도 있고, 사회적 편견일 수도 있고, 지위나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영생의 길에 접어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일제시대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잠든 영혼을 깨웠던 김교신 선생은 신앙을 택하려거든 극상품의 신앙을 택하라고 말합니다. 기왕 믿으려면 참을 향해 비약 돌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특실을 버리고 삼등열차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주일마다 달마다 정해진 액수의 연보를 바치고, 술․담배 끊고 이서방과 비겨도 못한 것이 없고 최서방과 겨누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족하는 신앙은 보통실의 신앙, 즉 삼등 열차적 믿음이다.”(<<조와弔蛙>>, 동문선현대신서84, 78쪽)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웨슬리의 말대로 하자면 우리는 ‘엇비슷한 기독교인’(almost christian)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비약 돌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 쓸쓸한 뒷모습

우리는 이 이야기의 씁쓸한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자 젊은이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마가는 사태의 결말을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

제게는 ‘이 말씀 때문에~~떠나갔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아프게 다가옵니다.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말씀에 걸려 넘어져 주님 곁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요6:67) 하고 물으셨습니다. 참말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주는 충격은 다른 데 있습니다. 참말은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느 때부터인가 참말을 듣기 부드러운 말로 포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자들도 불편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이들도 불편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복음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사회 변혁의 누룩이 되지도 못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도 못하는 것은 말씀의 예각을 둔각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 젊은이는 영혼에 날개가 돋아나려는 순간 서둘러 과거의 고치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번민의 시간을 보낸 후 돌아와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자괴감에 빠진 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결말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이 열려 있기에 우리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정의와 불의가 짝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고후6:15). 자유의 새 땅을 얻기 위해서 히브리인들은 압제의 땅 애굽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가슴에 품게 되자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말씀 때문에’ 실족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성경이 굳이 실패한 신앙인의 예를 적시하고 있는 것은 그 사건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말씀 때문에’ 삶의 방향을 전환한 이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은 사람들의 삶은 하늘의 빛을 받아 환하게 됩니다. 그들이 있어 세상도 환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할 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큼성큼 걷는 주님의 보폭을 따르진 못한다 해도, 주님께서 앞서 걸으신 그 길로 꾸준히 걷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생의 문턱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이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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