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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부해서 남 주자! (막 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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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서 남 주자! (막 9:2-13)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미식축구입니다. 미식축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릅니다. 경기장은 물론이고 미식축구가 열리는 날이면 마을마다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미식축구를 보며 열광합니다. 미식축구 결승전 티켓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미식축구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미식축구 결승전이 열리는 날에 어렵게 입장권 한 장을 구했습니다. 그는 먼 길을 차를 몰고 경기장에 도착했습니다. 경기장 안에는 십만 명이 넘는 많은 관중들이 모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좌석을 찾아 갔습니다. 싼 입장권을 샀더니 좌석이 맨 뒤에 있었습니다. 

선수가 구분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물가물했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좌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구경을 하다 보니 앞좌석에 한 자리가 비어있었습니다. 그는 슬그머니 그 자리로 내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저 여기 앉아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 앉으세요’라고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이 자리가 비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제 아내를 위해서 샀던 자리입니다.’ ‘아니, 그런데 왜 같이 못 오셨습니까?’ ‘죽었습니다.’ ‘아, 그러세요. 슬픔이 크셨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녀나 친척 중에 한 사람을 데리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이 자리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이들과 모든 친지들은 지금 장례식장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빠져 나와 미식축구장에 온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다보면 그 어느 곳 보다도 여기가 좋다고 만족스러워 하는 상태, 장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상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여기가 좋으니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삽시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르시면서 12 제자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는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셔서 기도하실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옷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곳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가 너무나 황홀해서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예수님,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 선지자가 거하시고 우리 세 사람이 세 분을 모시며 이곳에 살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는 산 위에서의 상태가 얼마나 좋았던지 아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산 아래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술을 먹으면서 건배를 할 때 ‘이대로’를 외친다는데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이대로’를 외친 것입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를 외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좋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문에 나오는 변화 산을 중심으로 산 위와 산 아래를 비교하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중에 산 위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몸에서 광채가 나며 영광스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모세와 엘리야가 그곳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늘로부터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보기에 그 곳이 바로 천국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그 곳 보다 더 평안하고 행복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표현은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산 위는 평화스러웠고, 안정과 행복함이 충만했습니다. 

반면에 산 아래에는 산 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낫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은 기도를 했지만 낫지를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실망과 탄식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낫게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의 당황함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의 웅성거림과 비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혼란스러웠고, 슬픔과 고통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산 위에서 ‘여기가 좋사오니’를 외쳤다면 산 아래에서는 ‘빨리 이곳을 떠나자’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머물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여기가 좋사오니’를 연발 외치는 산 위입니까? 아니면 고통과 절망의 탄식이 터져 나오는 산 아래입니까? 산 위에 머물고 싶을 것입니다. 저도 산 위에 머물고 싶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평안함을 얻고, 영적인 깊은 세계를 경험하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져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이대로가 좋사오니’라고 외치는 자리에 서고 싶습니다. 산 위에서 일어난 일들은 우리들의 신앙의 표현대로 한다면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외치며 그곳에 머물기 원하는 제자들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말씀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죽음의 고통이 있는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처럼 산 위의 평화를 뒤로 하고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귀신들린 아들의 병을 낫게 하시고, 아버지의 연약한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의에 젖어 있는 제자들을 다시 권면하셔서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혼란을 질서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실의와 좌절감을 기대감과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에게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신앙의 목적이 산 위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잘 해결되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산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산 위에서 경험한 은혜를 가지고 산 아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신앙의 목적을 산 위의 상태에 두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가 좋사오니’를 외치는 제자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산 아래를 향하시면서 신앙의 목적이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산 위의 상태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산 위의 상태를 사모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신령한 영적인 경험들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건강, 명예, 세상적인 지위, 재물 등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표현한 것처럼 축복된 자리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산 위에서의 은혜를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가 고통과 슬픔, 절망과 혼란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그들을 위로하고, 세우는 것입니다. 산 위에 머물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진정한 신앙인의 본이 되는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앙 안에서 경함한 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공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귀가 따갑도록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지’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라’는 것입니다. 공부해 사회에서 성공을 하여 너만을 위해 살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지’ 라는 가르침은 산 위에 올라 ‘여기가 좋사오니’를 외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삶이고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공부해서 남 주라’는 가르침은 산 위에 올라 그곳에서 한 경험과 복을 가지고 산 아래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타적인 삶과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돈을 많이 벌어라.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라. 세상에서 능력을 인정받아라.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라. 건강해라. 영적인 깊은 은혜를 경험해라’ 고 말씀하십니다. 산 위에 올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산 위에 오른 사람들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 섬김과 베푸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고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복은 산 아래로 향하는 데에 있습니다. 산 위로만 향하는 신앙은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축복의 개념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자기 건강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자식이 잘 되기만을 원합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복의 개념은 받은 복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누며 섬기는 복입니다. 건강과 재물, 명예와 지식,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누며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산 위에서 복을 받았을 때 기쁨보다 그 복을 산 아래에서 나눌 때 갖게 되는 기쁨이 훨씬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에는 기독교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귀족들은 거기에 걸 맞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사회를 향해 헌신과 봉사가 없으면 그 권력과 부와 명예의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복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되어야 합니다. 산 위의 복을 누리면 그것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와 고통과 슬픔 속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세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축복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이 됩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 안에서 산 위의 축복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제자들처럼 ‘여기가 좋사오니’를 외치며 산 위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산 위의 은혜와 축복을 가지고 산 아래를 향해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가 아니라 ‘공부해서 남 주자!’는 생각의 전환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산 위의 축복을 가지고 산 아래로 향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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