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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함하고 부인하고 (막 14:5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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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함하고 부인하고 (막 14:53-72)


유태인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작은 유태인' 시리즈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몸집이 아주 작은 유태인이 알래스카의 벌목장에 투입됐습니다.
작업반장은 매사에 자신만만한 작은 유태인을 혼내주려고 큰 도끼를 주며 아름드리 소나무를 벌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유태인은 능숙한 솜씨로 거목들을 쓰러뜨렸습니다.
기골이 장대한 일꾼들보다 훨씬 일을 잘하는 그에게 작업반장이 물었습니다. 

“벌목솜씨가 매우 훌륭하군.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웠는가?”
“사하라 정글에서 배웠습니다.” 작업반장이 반문했습니다. 
“사하라는 정글이 아니라 사막이지 않은가?” “원래는 정글이었는데 내가 나무를 몽땅 잘라내는 바람에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유태인의 정신입니다.
유태인들은 `용감한 실패'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작은 소나무 앞에서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어떤 일에 실패하는 것은 네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일은 적게 하면서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봉사의 곡식을 뿌리지 않고 대가의 추수만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유는 타인들의 결점을 지적하면서도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위기는 정지표시가 아니라 변장한 하나님의 은총임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위기의 인생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모함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도덕형 거짓말 : 예를 들면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에게 치료받으면 건강이 회복될 수 있다고 하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둘째, 사기형 거짓말 : 남을 속여 자기의 유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입니다. 
셋째, 악질형 거짓말 : 남을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거짓말로 이 같은 거짓말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넷째, 농담형 거짓말 : 자기의 유익이나 남에게 손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난삼아 하는 거짓말입니다. 

다섯째, 아부형 거짓말 : 남을 기쁘게 해줌으로 자신의 이득을 노리는 거짓말로 윗사람이나 권세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마음에 없는 아부가 여기에 속합니다. 
여섯째, 위장형 거짓말 :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하는 거짓말입니다. 
일곱째, 교육형 거짓말 : 교육을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어떤 우화를 예를 들어 설명할 때 하는 거짓말입니다. 
여덟째, 회피형 거짓말 : 자신의 책임이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입니다.
이 중에 오늘 우리는 악질형 거짓말쟁이를 먼저 보게 됩니다. 예수를 모함하여 죽이고자 하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바로 그들입니다.

겟세마네 정원에서 예수를 붙잡은 무리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을 하는데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였지만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그들이 예수를 잡아서 끌고 올 때는 예수를 잡기만 하면 쉽게 예수를 죽일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예수가 그들이 보기에 눈의 가시 같은 일들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러니까 아무 거라도 하나 걸기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막상 죽여야 할 명분 죽여야 할 공감되는 증거로서는 부족하였다는 겁니다. 대제사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사람들이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기를 하는데 그 말들조차 서로 일치하지 않으니 그걸 어떻게 백성들 앞에 내어 놓고 이래서 예수는 죽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이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나서 예수에게 묻습니다. 

속으로는 아마 “병신 같은 것들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해, 아이고 내가 정말 못 살아” 했을 것입니다. 이왕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 공모를 했기는 해도 그래도 대제사장의 체면이 있지 밑의 사람들이 알아서 모든 것을 척척 해야지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혀를 끌끌 차다가 자기가 직접 나섭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묻습니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지만 예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아주 작정을 아고 다시 묻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비로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아마 그 순간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소름이 쫙 끼쳤을 것입니다. 묻기는 물었지만 예수가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대답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생각에는 예수는 가짜입니다. 아주 처음부터 그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시작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도 당당하게 자기가 메시야라고 시인을 합니다. 거기다가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까지 하니 기가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 순간적으로 속에서 불길이 확 올라옵니다. 그래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입니다. 그건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다 작정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대제사장의 입에서 신성 모독이라고 하는 말까지 나왔으면 여기엔 더 이상 아무런 다른 증거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예수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며 빈정거리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칩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결론을 내려놓고 시작한 이 일입니다. 예수는 죽어 마땅한 놈 아니 죽여야 할 놈 그러니 어찌 하든 반드시 죽일 증거를 찾아내라고 하여 거짓말을 하도록 요구하는 대제사장과 이에 부응해서 거짓말을 하는 무리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예수 사형수 만들기 놀이 한 마당이 이렇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네 말에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하지만 예수에게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내가 메시야라고 했다고 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라고 했으니 이건 사형수 중에서도 최고의 죄목인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고 하니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엊그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젊은 어머니가 두 딸과 함께 옆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큰 딸은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하는데 작은 딸이 이제 겨우 4개월 됐습니다. 유모차에 아이를 앉혀놓고 있는데 아이가 낯가림도 안하고 가만히 마주보는데 얼마나 아이가 예쁘던지 그래 아이를 가만히 마주 보면서 마음으로 축복을 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채소 할 때 채 자 민 자 해서 채민이라고 큰 아이가 설명을 해 줍니다. 

그래 큰 아이에게 “내가 목사님이거든 그래 채민이를 위해서 목사님이 지금 축복했어” 라고 했더니 아이 엄마가 깜짝 놀라면서 “그러세요 저도 교회 다녀요” 하면서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정말 귀한 딸입니다. 하나님이 아주 귀한 선물을 보내 주셨으니 은혜로 잘 키우세요 정말 큰 인물이 될 겁니다” 하니 얼굴이 활짝 웃음으로 가득해지며 아주 행복해 합니다. 사실 내가 목사라고 말을 할 때만 해도 상당히 조심스러웠거든요. 

목사라고 하면 아주 눈이 뱀 꼬리처럼 올라가는 사람도 있는 세상이 아닙니까? “아니 목사면 목사지 남의 아이에게 뭐하는 거냐”고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보인다면 이것처럼 난감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면 “암만 봐도 목사처럼 생겨 먹지도 않았는데 정말 목사는 맞는 거냐?”고 하기라도 한다면 이거야 뭐라고 하겠습니까? 거기에 더해 “죽일 놈 살릴 놈”하고 대든다고 하면 이건 영락없이 봉변을 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런 봉변을 예수님이 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너무도 당당합니다. 자기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도에 지나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처음에는 거짓말로 시작을 했는데 나중에는 그게 진짜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지나게 되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까지 생겨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게 진짜로 둔갑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그렇게 믿어요. 이건 진짜다. 거기에 대고 누가 아냐 그건 가짜야 라고 한다면 이때부터 이건 전쟁입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하는 명분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갖다 붙입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진짜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자 봐! 진짜잖아” 그럽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 그리고 가짜가 오히려 진짜를 몰아내는 세상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예수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짜 예수쟁이입니까 아니면 가짜 예수쟁이입니까?

둘째로 생각할 것은 부인하는 제자 베드로입니다.
사실 베드로만큼 당당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할 때 그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자기를 직접 불러주시던 그 순간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래 밤새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하나도 없던 그 날 아침 한 무리가 바닷가로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고 조금 물에서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한 번 보았기에 저는 서슴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따랐는데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집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 날 이후 제자들 가운데 선임으로서 베드로는 예수를 삼년 반 동안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몬의 이름을 바꿔 베드로라는 새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거기다가 변화산상의 그 놀라운 광경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확신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어떻게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아마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궁금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살금살금 뒤따라갑니다. 자기도 붙잡힐지 모르니 멀찍이 따라갑니다. 그래 제사장의 뜰까지 들어가기는 했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단이 난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합니다. 자세히 그 얼굴을 살피더니 하는 말이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가 부인합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그리고는 그 자리를 피하여 앞뜰로 나갑니다. 

그런데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고 합니다. 그래 또 부인합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런데 그때 문뜩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닭이 두 번째 우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를 멀찍이 따랐던 베드로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는 아주 치명적인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나는 아니라 죽으면 죽었지 예수님을 부인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고 아주 다짐 다짐을 했는데 그 다짐도 무색하게 너무도 쉽게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들이 이런 베드로를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라고 해도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멀찍이 돌아서는 그 순간이 바로 조그만 여종 하나가 나는 콕 찌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이냐고요? 사탄이 얼마나 약아빠졌는데 얼마나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그걸 놓치겠습니까? 그리고 사탄이 처음부터 총칼 들이대고 덤벼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아주 보잘 것 없는 것 별 것 아닌 것처럼 하면서 우리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의도적으로 예수를 부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그 순간만 모면하려고 했던 것이 이렇게까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 천하에 죽일 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다가 그랬니? 어쩌다가 그랬어? 왜 그랬는데? 도대체 왜 그런 거야” 하고 따지고 든다면 거기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래 더욱 생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는 흔히 문제가 생기고 나야 기도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우리가 많이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항상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약하고 우리의 생각이 믿음이 부족한 것이죠. 빌립처럼 너무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치밀하게 계산적인 사람 그래서 내 몸은 내가 잘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야 사람이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사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든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그걸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자신에게는 적용을 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 형편이, 하지만 내 몸 상태가, 하지만 하지만…….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내 형편이 그렇고 내 몸 상태가 그렇지만 하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니.”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시니.”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무리 장담을 해도 순식간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실패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그러기에 더욱 품에 안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진정 통곡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사실 베드로보다 더 통곡해야 할 사람들은 많습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 몬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몸보신만을 위해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돈까지 주면서 로마 군사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해서 백성들이 믿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을 핍박합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산 증거가 자기들 앞에 펼쳐져도 결코 그것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 국민 중 30%는 천안함 사건이 북쪽의 소행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오히려 우리의 자작극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생각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닭이 두 번째 우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되었습니다. 그래 통곡합니다. 자기가 그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결코 버리지도 부인하지도 않겠다고 했던 것은 그저 입술만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얼떨결에 자기도 모르게 그냥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결과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래 통곡합니다. 문제는 통곡한다고 해서 궁극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가룟 유다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주셔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예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넘어지고 쓰러질망정 그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님 곁에 “저도 항상 주님 곁에 있겠습니다.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져도 결코 주님 곁에서 멀어지지도 떠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금 고백하며 주님을 따르는 귀한 성도들 되심으로 험한 세상을 이기고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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