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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모델이 된 예루살렘교회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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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모델이 된 예루살렘교회 (행 2:42-47)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우리가 요즘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소리엘이라는 남성 듀엣이 부른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라는 곡이 있습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 노래요 자주 부르는 곡인데 이런 노래지요. 가사를 생각하며 들어보세요.


진정한 예배가 숨 쉬는 교회,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
믿음의 기도가 쌓이는 교회,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 성도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섬김과 헌신이 기쁨이 되어 열매 맺는 아름다운 교회
주님의 마음 닮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 되신 주님 전하는 교회
사랑의 불꽃이 활짝 피어나 날마다 사랑에 빠지는 교회

그리고 이 찬양은 이렇게 마칩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우리는 늘 이렇게 마지막 후렴을 바꾸어 부르곤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이 가사에 나오는 교회, 정말 그런 교회가 되기 바란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소망과 염원을 담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주께서 사랑하는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다음 주일은 8.15 광복 65주년이며 또한 우리교회가 64주년을 맞는 교회창립 기념주일입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 16일, 연일면 대잠2동 544번지에 천막을 치고 9명의 교인으로 시작한 우리 교회가 벌써 창립 64주년을 맞은 것입니다. 천막교회로, 아니, ‘교회’라는 이름조차 못 붙여 ‘기도처’라는 이름으로 조촐하게 시작된 우리 교회가 64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어엿한 중견교회로 성장하고, 이제는 새 성전을 지으면서 새롭게 도약하고 성장하여 이 지역뿐 아니라 전 포항과 대한민국을 품는 위대한 교회를 꿈꾸는 단계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번 교회창립 64주년을 즈음하여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안디옥 교회, 로마 교회,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데살로니가교회에 이르기까지 신약에 등장하는 교회들을 통해 그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지, 어떤 점에서 모범이 되고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진단해 보면서 창립 64주년을 맞는 우리교회는 과연 앞으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지, 어떤 교회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고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려 합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무엇보다 이 땅에 처음 생긴 첫 번째 교회이기에 ‘초대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생긴 교회라고 무조건 좋은 교회고 모범이 되는 교회겠습니까?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정작 다른 교회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교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 땅에 처음 세워진 초대교회라는 것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되는 모델 교회였다는 점이 더 귀합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시작된 교회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교회란 반드시 성령을 통해 시작되고, 언제나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교회여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 어떤 일보다 예루살렘교회처럼 성령 충만한 교회, 성령의 감동과 능력이 가득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 예루살렘교회의 모범을 살펴보고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교회처럼 다른 모든 교회의 모델 교회가 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모든 교회의 모델이 된 교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어떤 점에서 세상 모든 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 닮아가야 하는 교회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찾아봅시다.

첫째, 예루살렘교회는 말씀과 교제가 조화를 이룬 교회였습니다. 42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초대교회는 사도, 즉 예수님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기를 힘썼습니다. 이 가르침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것이었기에 오늘날로 치면 성경말씀을 잘 듣고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말씀이 충만한 교회, 그야말로 ‘말씀 위에 든든히 선’ 말씀의 교회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말씀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코이노니아’라고 부르는 교제가 충만했습니다. 성도 간에 늘 귀한 사귐과 교제가 넘쳤던 것이지요. 

오늘날 말씀이 강하지만 교제가 없는 교회가 있습니다. 설교가 좋고 말씀도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데 성도들 간에 교제가 없어 성도들끼리 서로 모르고 사랑의 나눔도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말씀이 머릿속 이론으로만 남지 성도의 삶 속에서 사랑으로 실천되지 못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교제는 많은데 말씀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성도들끼리 만나면 신나게 잘 놀고 참 친하게 지내기는 하는데 의미 없는 교제와 친교만 있지 말씀으로 하나 되고 은혜 받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친교 중심 교회 말입니다. 

이래서는 교회 안에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기 힘듭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구역장 한 분이 이런 푸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희 구역은 정말 친하고 만나서 친교도 잘합니다. 그런데 말씀 나누자고 하면 지루해하고 힘들어 해서 속상해요.” 우리 구역은, 우리 선교회는 혹시 이런 모습이 아닌지요. 교회는 모름지기 말씀과 교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듣고 배운 후 성도들 간에 형제자매로 서로 사랑하고 섬겨주고 교제하는 가운데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진정한 교제는 무의미한 놀이나 그저 친하게 재미있게 잘 지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이런 점에서 말씀과 진정한 교제가 조화를 이룬 모델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말씀 충만, 신령한 교제 충만한 모델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예루살렘교회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교회였습니다. 다함께 43절을 읽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좀 이상한 말이 하나 나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사람들이 두려워했답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 성도가 아닌 불신자들, 교회 바깥사람들을 뜻합니다. 이 교회 주변의 불신자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두려워했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워한다’는 말이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공포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경심과 경외감입니다. “저 교회가 과연 다르구나, 저 교회 성도들 과연 다르구나” 하고 인정하고 존중해 준 것입니다. 그 까닭은 당연히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모범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왜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 무시당합니까? 

과거에는 예수 믿는 사람 숫자는 적었지만 마을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그래도 정직한 사람,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을까요? 정상적이라면 우리 교회가 이 동네에서 아주 존경 받아야지요. “저 교회 다니는 사람은 뭔가 다르다”고 인정받아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표적, sign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사랑의 역사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기적과 표적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야지요.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고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 우리하고 똑같네. 우리하고 똑같이 살고 똑같은 짓을 하고 똑같이 노네?” 하면 그 때부터 인정과 존경은커녕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정말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많이 일어나서 세상 사람들, 안 믿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의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도 안 믿는 사람들과 이 지역에서 존경과 인정을 받는 모델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예루살렘교회는 나눔과 만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44~46절을 함께 읽을까요?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는 놀랍게도 사유재산을 내놓고 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는 교회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모습을 공산주의와 비교하는데 공산주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무조건 재산을 내놓아야 하지만 초대교회는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스스로 내놓았으니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성령이 충만하니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다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내 재산 다 내놓고 나눠 써야 성경적인 것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내놓으라면 내놓으시겠습니까? 

어디 이단이나 이상한 사이비 집단이나 이렇게 하지 건전한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것은 바로 나눔의 정신을 뜻합니다. 교회 안에서 한 형제로 자매로 진정한 사랑을 나누다보면 자연스럽게 나눔의 정신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도 친형제 자매가 어려운 일 당하면 당연히 기도하지 않습니까? 또 물질적으로도 돕지 않습니까? 비록 나도 어렵지만 콩 한 쪽이라도 나눈다는 마음으로 나누지 않습니까? 그러니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어려운 일 생기면 기도해주고, 서로 관심 가져주고, 또 필요하다면 내 물질과 시간을 조금이라도 나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성도들 간에 아픈 분이나 힘든 분 계시면 정말 내가 아픈 것처럼, 내가 힘든 것처럼 함께 아파해주고, 간절히 기도해주고, 또 좋은 일 생기면 마치 내가 좋은 일 생긴 것처럼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례가 생기거나 결혼식이 있으면 천리 길 마다하지 않고 함께 참석해서 위로하거나 축하해 주는 일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당연한 일인 듯 그렇게 하거든요. 이게 진정한 사랑이요 나눔 아니겠습니까? 누가 그러더군요. “그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 분이 저희 장례식 때 와주고, 결혼식 때 와주었으니 나도 가야지요.” 우리가 무슨 품앗이를 합니까? give and take입니까? 정말 나한테 해준 대로 갚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꼼꼼히 기록했다가 나한테 와준 사람만 가줘야지요.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지요. 우린 그런 계산적인 사람들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니까, 형제요 자매니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그런 말 하지요? “이 가정에 장례가 났는데, 결혼식을 하는데 새 가족이라, 또 이름 없이 교회 다니던 분이라 잘 모르시지만 그럴수록 더 가주는 것이 교회”라고요. 그렇습니다. 

이런 계산적 사랑이 아니라, 계산적 인간관계가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전제 없이 사랑하니까 나누고 함께 해주는 것, 내 가진 작은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바로 예루살렘교회는 이런 진정한 나눔이 있는 교회였고 그래서 예배 때뿐 아니라 기쁜 일이 있어도 함께 만나고, 슬픈 일이 있어도 함께 만나고, 귀한 일 궂은 일 할 것 없이 늘 만남이 충만한 교회였고, 이렇게 형제와 자매로 자주 만나고 나누다보니 늘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진정한 나눔과 만남이 충만하고 그 안에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모델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예루살렘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47절을 읽읍시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루살렘교회는 늘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 아닙니까? 예루살렘교회는 입으로만 찬송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자체가, 행동과 태도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믿는 자에게든, 안 믿는 자에게든 칭송과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게 되고 그러다보니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지고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려면 이렇게 예루살렘교회처럼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설교가 좋으면 성도들이 찾아옵니다. 교회를 잘 지어서 시설이 좋아도 찾아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문이 잘 나야 합니다. “그 교회 괜찮은 교회다, 좋은 교회다, 그 교회 성도들은 참 행복하다더라” 하고 칭찬 받고 좋은 소문이 나야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바로 그런 점에서 모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 초대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우리의 입술로 찬양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우리의 모습이 찬양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말씀도 좋고 새로 성전도 짓는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교회 좋은 교회라고, 괜찮은 교회라고, 그 교회 가면 성도들이 너무 좋아서 행복하게 기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소문이 나고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여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날마다 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과 은총이 우리 교회에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29장을 꿈꾸며...

말씀을 맺습니다. 서울 온누리교회에 가보니 교회 강단 앞에 현수막 하나가 붙어있었습니다. 그 현수막에는 영어로 커다랗게 ‘ACTS 29’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 ‘Acts 29’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러분? 영어로 Acts는 사도행전을 뜻합니다. 그리고 29란, Chaper 29, 즉 29장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9장...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은 분명히 28장까지밖에 없는데 왜 사도행전 29장이라고 쓴 것일까요? 성경에 무지해서 잘못 쓴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 29장’을 써가는 교회가 되자”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1장 8절에 나온 것처럼 성령이 임하셔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이 사도행전의 역사, 성령의 역사는 28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바로 이 사도행전을 계속 써나가는, 29장을 써나가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참 멋진 말 아닙니까, 여러분?

저는 날마다 꿈을 꿉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말씀을 나눈 것처럼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본받아 땅 끝까지 증인 되고, 땅 끝까지 복음 전하고, 땅 끝까지 성령의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는 그런 모델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저 하나만의 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담임목사 혼자만 꾸는 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함께 꾸며 함께 이루어가는 구체적인 꿈, 실현가능한 비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함께 사도행전 29장을 써나가는 위대한 일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새 시대, 새 역사를 써나가는 이 시점에, 바로 이 놀라운 역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저와 함께 우리교회의 위대한 역사를 써나가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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