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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확실히 아는 것은 (요 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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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아는 것은 (요 9:1-25)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사역의 현장에는 신비로운 표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이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이적이 있은 후 유대인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평소 예수님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이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는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하였습니다. 눈을 뜬 맹인은 그들 앞에서 자기가 아는 확실한 것 한 가지를 말했습니다(25절). 이 사람은 매우 단순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가지라도 확실한 것을 붙잡으면 됩니다(눅 10:41-42).

1. 본래는 맹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맹인을 두고 저마다 입방아에 올렸습니다. 제자들은 그의 불행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궁금했습니다(2절). 다른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경위와 그 내용에 문제를 제기하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런 것은 본론과 상관없는 지엽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1)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것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래적(生來的)인 불행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불행은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숙명적으로 안고 나오는 원죄의 불행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5:12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두고 제자들은 그의 불행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논란을 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3절).

2) 길에 앉아 구걸하였습니다.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굶고 있을 수는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 위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먼지 나는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손을 벌리며 구걸하는 것은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자존심도 많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의 생존을 영위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여 그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 처지의 사람으로서는 그 일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같은 일도 계속하게 되면 전문가가 되는 법입니다. 맹인으로서 구걸하는 삶을 본업으로 삼고 거기에 인생을 거는 맹인전문가가 되었습니다.

3) 맹인의 불행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6:22-23). 성경에는 마음의 눈이 어두워 영적 분별력을 잃은 사람을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발람 선지는 영적으로 맹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달려가면서 그 앞에 칼을 빼 들고 서있는 천사를 보지 못했습니다(민 22:31). 눈이 어두운 사람이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인 눈이 어두워 영혼의 감각을 잃게 된 사람도 자기에게 닥치는 불행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맹인의 불행을 아는 사람은 거지소경 바디매오처럼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을 열어 보게 하여 달라고 소리 지르게 됩니다(막 10:46-52).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요 9:39).

2. 지금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뜨게 된 사람은 그가 본래는 맹인이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눈을 뜨고 본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에는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하던 맹인이었지만 지금은 밝은 눈을 가지고 스스로 활동하는 정상인입니다.

1) 은혜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눈뜬 맹인에게 예수가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는 것과 죄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눈 뜬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 예수를 부정하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여기 대하여 눈 뜬 맹인은 그들의 논리에 맞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눈을 뜨게 된 경위와 방법이 이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맹인은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실 때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묻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설명이 불가한 일입니다. ‘실로암’이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실로암으로 보내시는 명령에 순종하였을 뿐인데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요 1:16). 

2) 변화를 받았습니다.

눈을 뜬 맹인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눈이 어두운 시절에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 시간부터 사랑하는 부모와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아름다운 자연과 사물을 직접 보고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눈이 열린 이후에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알게 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눈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였습니다(마 5:8).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서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몰랐습니다. 육신의 밝은 눈으로 세상과 사물은 보았지만 예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됩니다.

3) 복음의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영혼의 눈을 뜨게 합니다. 신령한 눈을 뜨게 되면 부르심의 소망과 하늘 나라에 예비 된 기업의 영광과 날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능력의 원천을 발견하게 됩니다(엡 1:17-19). 눈이 열리기 전에는 자기가 안고 있는 질병이나 육신적인 불행에 시달리면서 거기 얽매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동물적인 생활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땅에 일만 생각하면서 소망 없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하고 나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합니다. 그것은 썩어져 가는 구습의 옛 사람이 심령이 변화되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이 되어 희망적인 삶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엡 4:22-24).

3. 사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존재 목적을 알고 그의 본분에 충실하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뜬 맹인은 자기의 입으로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거부하고 그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지만 증거자의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1)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자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이적을 행할 수 없다고 우겨댔습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주장에 대하여 맹인 되었던 이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겪고 체험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앞을 못 보던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이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창세 이후 맹인으로 난자가 눈을 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께로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30-32절).

2) 고난을 감수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거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사람은 유대인 사회에서 출교를 당하게 됩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맹인 되었던 사람의 입으로 예수가 눈을 뜨게 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를 하게 되자 그 부모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 부모는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20-21). 유대인들의 박해가 두려워서 부모들도 그를 외면하였지만 이 사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고 그들에게서 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34절).

3)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사람에게도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간 많은 선지자들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했으나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하였습니다(마 5:10-12). 예수를 알기 전에는 세상에서 육신의 소욕에 얽매여 살았고 소망 없는 일에 인생을 걸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은혜를 받은 이후로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4-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붙잡히고 발견되는 삶을 자기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빌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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