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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 (창 2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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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려받은 위대한 유산 (창 26:1-11)

  
창세기 26:1-11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3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6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위대한 유산

가나안 땅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도 그러더니 아들 이삭 때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가나안 땅은 물이 부족하며 비옥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그런 척박한 땅에서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게 되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삭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풍요로운 애굽으로 내려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애굽은 풍요하기는 하지만 약속의 땅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운 곳입니다. 물질의 편안함에 취해 하나님을 잊습니다. 사람들에 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는 곳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어떻습니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을 선택합니까? 아니면 좀 가난해도 영적으로 풍요로운 곳을 선택합니까?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라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풍요로운 곳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축복의 약속을 다시 주십니다. 세 가지 약속입니다. 첫째는 땅의 약속입니다. 3절입니다.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둘째는 큰 민족의 약속입니다. 4절입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셋째는 축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입니다. 4절 후반절입니다.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 약속은 이후 28장에서 야곱이 처음 하나님을 만날 때도 주어집니다. 모세오경으로부터 다윗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이 세 가지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역사는 이 축복을 잃고 다시 회복하기를 소망하는 역사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것은 땅 덩어리가 아니라 가문의 비전이었고, 삶의 태도였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비전을 받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물려받았습니다. 명문 가문을 만드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정신입니다. 그 가문에 살아 있는 정신이 있느냐 이것이 그 가문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최효찬이란 분이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이란 책을 썼는데 명문가의 공통점은 그 가문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이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훈으로 나타났는데 몇몇 명문가의 가훈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애 류성룡가 - “충효만큼 더 중요한 사업은 없다”
석주 이상룡가 - “당당한 자긍심”
운악 이함가 - “지고 밑져라 그러면 세상을 얻는다”
소치 허련가 - “학문이 얕으면 결코 붓을 들지 말라”
퇴계 이황가 - “학문이란 깊은 산골 난초와 같아서 알리지 않아도 종일 향내가 난다”
고산 윤선도가 - “적선과 근검”, “자만하면 손해가 있고 겸손하면 이익이 있다”
다산 정약용가 - “근(부지런)하고 검(검소)하라”, “오직 독서, 한 가지가 있을 뿐이다”
명제 윤증가 - 문중 학교인 종학당을 통한 엄한 자녀 교육과 타인에 대한 배려 정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가장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가문이 달려가야 할 비전을 주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세 가지 약속의 의미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저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에게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졌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은 그 인생을 180도 전환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선지자들도 그렇습니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목자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고 이스라엘에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보좌에 높이 계신 만군의 여호와를 만났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그발 강가에서 불이 번쩍번쩍하는 영광가운데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레미야 또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면서 예언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있으며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인생의 전환를 이루고 목적의식이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이런 체험은 성경에만 국한된 사건인가? 아닙니다. 그 이후 수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고 그들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전환은 하나님을 만나며 시작됩니다. 어거스틴은 “집어 들고 읽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성경을 펼치자 로마서 13장의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말씀에 그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대 사상가요 과학자였던『팡세』의 파스칼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파스칼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령을 받으면서 그 마음 가운데 평화와 기쁨이 임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체험하던 순간을 『팡세』의 마지막 편 「메모리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54년(31살) 11월 23일 밤 10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불’ 이었다. 
철학자와 식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운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미국의 부흥사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인은 하나님을 만나던 체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난 밤은 내 일생에서 내가 경험한 어떤 밤보다도 달콤했다. 나는 이전에는 결코 그렇게 오랫동안 내 영혼 속에서 천국의 빛과 휴식과 달콤함을 누려보지 못했다. 지난 밤 내내 나는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랑과 그리스도가 내 가까이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나 자신의 경배가 자아내는 천국의 달콤함에 대한 끊임없는 느낌과 분명하고도 생생한 느낌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 체험은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서도 이루어집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동료 수사가 사도신경 중 ‘나는 죄사함 받았음을 믿는다’라는 구절을 반복해서 외우고 있을 때 그때 나는 완전히 새로운 빛 속에서 성서를 보았으며 곧바로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활짝 열린 천국문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빌리 브레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체험한 후 술과 담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술고래였을 뿐만 아니라 흡연가였다. 나는 파이프 없이 탄광을 내려가느니 차라리 식사를 하지 않고 가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파이프를 집어들었을 때 ‘그것은 우상이며 욕망이다. 깨끗한 입술로 주를 경배하라’는 말이 들렸다.” 그가 담배가 생각날 때마다 “깨끗한 입술로 주를 경배하라”는 말씀이 들려 그 힘으로 담배의 유혹을 끊게 됩니다.

윌리엄 제임스라는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사상가가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적 경험이 빚어내는 효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종교적 경험이란 반드시 궁극적이고 성스러운 실제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둘째 종교적 경험의 의미는 그 경험을 갖기 이전의 상태와는 달리 완전한 삶의 변화를 보여준다. 좀 더 겸손해지고 엄격해지고 부드러운 태도를 갖는다. 

그 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행복, 감사, 기쁨, 순종, 희생의 마음을 갖게 된다. 셋째, 종교적 경험의 특징은 훨씬 고차원의 통합성과 사랑의 감정을 가져다준다. 하찮은 풀 한 포기나 나뭇잎을 통해서라도 우주의 신비스러움과 조화를 느끼고, 어떤 원수도 용서하고 품을 수 있도록 한다. 넷째, 종교적 경험의 특징은 전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을 돌이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만든다.  

우리의 삶이 변화가 없는 것은 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풍요로움과 탐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우리 귀를 가리고 있습니다. 물론 체험신앙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함께 동반되어야 합니다. 지식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교리적이 됩니다. 극단적으로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이나 매우 호전적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현실을 벗어나기도 하고 잘못하여 이단의 길로도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이 체험입니다. 요한 웨슬리를 위대한 부흥사로 만들었던 것은 올더스게이트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을 때 그 가슴을 뜨겁게 했던 확신의 체험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분석하면서 심리적으로 최고의 단계를 ‘절정 경험’이라 불렀습니다. “'인간의 최상의 순간들,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 황홀, 환희, 행복, 큰 기쁨 등의 경험들.” 저는 이 절정의 경험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 인생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런 절정의 경험이 신앙인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인생을 바꾼 사건이나 장면, 한 마디의 교훈들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체험의 일종입니다. 상담목회로 유명한 정태기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자기 인생을 바꾸었던 한 장면을 목사님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떤 농부가 말 수레에 인분을 가득 싣고 목포 중심가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상점 앞에서 바퀴가 빠지면서 인분 통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고 인분이 온 도로에 쏟아졌다. 사람들이 코를 막고 피하며 그 농부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당황한 농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인분을 손으로 훔치고 있었다. 그 불쌍한 장면을 오랜 동안 지켜보다 나는 비로소 이기적 삶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저 농부와 같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프타임>이라는 책을 썼으며 미국에서 큰 케이블 TV 사를 운영했던 밥 버포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젊은 시절 학교 수업 중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문득 자신은 백배의 결실을 맺는 인생을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문득 다가온 이 생각과 결심이 그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지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하거나 순종하였으니, 아니면 내가 이만큼 고생하고 상처받았으니 마땅히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부요하기 때문에 또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만 빈 그릇을 들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길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9, 13)

아브라함의 복과 약점을 함께 받은 이삭

이삭이 복을 받게 된 것은 자기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은혜였습니다. 5절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아브라함이 오래 세월 동안 믿음을 지키며 순종했던 복을 이삭이 받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쌓은 덕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그러므로 부모된  자는 덕을 쌓기에 열심하여야 합니다. 덕을 쌓으면 자기 대에 복을 받지 않더라도 자녀 대에는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대에 복을 받지 못하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내가 받지 못한 것 우리 자녀들이 받게 될 것을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신앙의 3대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신앙의 3대 가정은 대부분 신앙도 든든하고 세상적으로도 복을 받아 잘삽니다. 덕이 쌓여서 그렇습니다. 창세기의 꽃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 까지 오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번성과 한국교회의 부흥은 일제시대와 민족이 어려웠던 시대에 눈물 뿌린 헌신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쌓은 덕은 우리 자녀나, 자녀의 자녀 대에 빛을 볼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어둡고 곤고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다 우리가 맺은 잘못된 열매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것은 복만 물려받는 것이 아닙니다. 약점도 함께 물려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잘 지켰지만 아브라함의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생긴 불안의식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을 가든지 사라를 자기 누이라 속였습니다. 그 결과 애굽에서는 바로에게, 그랄 지역에서는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를 빼앗겼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려받기는 하였지만 믿음의 사람으로서는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삭이 똑같은 실수를 범합니다. 7절입니다. “그 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도 아버지처럼 자기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법적으로 따지면 리브가가 외사촌 동생이니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아내는 어떻게 되든 자기만 살겠다는 태도이고, 또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런 못된 습관을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도 물려줍니다. 예레미야 31장 29절에서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는 이스라엘의 속담을 듭니다. 신 포도는 아버지가 먹었는데 그 때문에 이가 시려 고생하는 것은 아들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이 그 죄의 값을 치른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우리의 습관이나 상처들을 자식들에게 물려줍니다. 저는 누워서 이렇게 기대고 책을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 둘째 딸이 똑같이 누워서 책을 보고 있더라고요. ‘태도를 바르게 하고 책을 읽어야지’ 하고 말했지만 제가 그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통 가정에서 아버지가 알콜 중독이면 그 자식들도 동일한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안 좋은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전적 요인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암을 비롯한 많은 질병들이 잘못된 생활태도일 수도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전적 요인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의 아들이 ‘틱’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틱 장애는 눈을 계속 깜박이거나, 연속해서 킁킁대는 소리를 내거나, 몸을 반복해서 움츠리는 장애입니다. 이것이 심해 정신과에 갔는데, 의사가 그 아들을 치료하기보다는 그 엄마를 먼저 정신 상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엄마가 정신 상담을 받으면서 마음이 편해지자 아들의 틱 장애는 고칠 것도 없이 나았습니다. 이 엄마는 그 아버지로부터 정신적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엄격하고 자녀들에게 완벽한 수준을 요구했습니다.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이 딸은 그 마음에 항상 불안함과 부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 또한 완벽성을 요구하면서도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갔습니다. 그 영향이 자기 아들에게 미쳤고 그 스트레스때문에 ‘틱’ 장애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원인 제공자인 엄마의 상처가 치유되자 아들의 상처도 치유된 것입니다.

가족이란 것은 이처럼 서로 긴밀하게 엮이기 때문에 축복도 주고받지만 상처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이 상처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라는 선물에 비하며 아주 작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상처는 고귀한 선물에 생긴 작은 흠집에 불과합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그보다 더 소중한 생명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받지 않았습니까?

또 중요한 것은 문제를 알았다는 것이고 파악된 문제는 고쳐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삭 대에는 아브라함 대보다 많이 발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 실수 했지만 이삭은 한 번으로 그칩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 다 아내를 빼앗겼지만 이삭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8절에서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고 말씀합니다. 이 아비멜렉은 아브라함대의 아비멜렉이 아니라 그 자손일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아비멜렉이 이삭과 그 가정을 보호하는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도우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유목민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의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패요 상급이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가졌던 이런 불안함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오랜 동안 쌓였기 때문에 한 번에 고칠 수가 없습니다.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더러운 물이 항아리 안에 가득하다고 항아리를 깰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끊임없이 신선한 물을 그 위에 붓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씩 깨끗해져 갈 것이고 시간이 흐른 연후에는 더 이상 흔적도 없게 될 것입니다. 야곱 대에는 더 이상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일은 없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탁류가 그리스도라는 깨끗한 물과 만났습니다. 서로 어우러지면서 물이 점점 더 맑아집니다. 그리스도와 더 많이 섞이면 섞일수록 우리는 더 깨끗해집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탁류가 하나님의 강물에 합류한 결과 일어난 일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대부분의 우리 가족과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의 온갖 악한 습관과 상처와 가치관과 저주들로 가득합니다. 술과 도박과 거짓말과 음란함과 무정함과 분열과 자신감 결여와 부정적 태도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거룩한 보혈로 우리 가문의 더러운 것들을 희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더럽지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더 많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인생을 지배할수록 우리는 깨끗하고 축복된 가정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넘치는 저와 여러분의 가정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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