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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의 비밀 (눅 8: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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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비밀 (눅 8:4-15)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이 봤는데 석가모니는 좋은데 절은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모하멧은 좋은데 모스크는 싫다고 말하는 사람도 별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그만큼 예수님의 지명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십 년 전에 비틀즈가 비틀즈는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인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틀즈가 모하멧보다 인기가 많다고 말하지 않고 석가모니보다 인기가 많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인기의 대상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생각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적어도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절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제일 사람의 이해를 가로막은 오류를 범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사람이 천당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게 된 것은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왜곡시킨 것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천당이라는 개념은 고전적인 내세의 개념인데 예수님께서 내세에 대해서 가르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라든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내세를 가르치기 위하여 그걸 말하신 것은 아닙니다. 내세가 포함돼 있지만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는 것은 내세뿐만이 아니고 금세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자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왜 그것이 비밀이냐. 왜 이것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었느냐. 이걸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인데 오늘 이 비유를 읽어보면 네 종류의 사람이 나와요. 말씀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반응한 네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이 중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사실이에요. 이 세상에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일부러, 알고 거부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들이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에요. 그러나 의도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못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에 속하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얼마나 많은 부분이 사람에게 좌우되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human factor-인간적인 요소가 상당히 크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받아들여도 인간적인 요소에 의하여 반응하는 방법이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비밀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비밀입니다. 

스탈린은 젊었을 때 신학생이었어요. 그의 어머니는 아주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난폭한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아들을 신학교에 보냈어요. 스탈린은 신학교를 다니다가 퇴학당했어요.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에 가입하고 자기의 이름을 강철의 사나이라는 뜻으로 스탈린으로 짓고 자기 나라 백성 수천만 명을 죽였어요. 그러니까 한때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웠던 사람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성인잡지 펜트하우스의 창시자인 밥 구치오네라는 인물은 원래 영국 사람이었는데 젊었을 때 신부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갔어요. 그러다가 그게 자기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중단하고 그리고 이후에 만든 성인잡지가 바로 펜트하우스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때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다가 반대방향으로 갔는데 완전히 반대방향,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간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의 어머니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김반석입니다. 어머니가 교회 장로였습니다. 그 가족은 크리스천이었어요. 그러나 김일성은 공산주의자가 되고 자기를 우상화시켰어요. 

여기 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상당히 가까이 있을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멀리 떠나갔다, 한때는 가까웠었는데 멀리 떠나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이외에도 그와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니체 같은 사람은 아버지가 루터교 목사님이었지요. 우리는 누가 신앙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자꾸만 외적인 이유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잘못했다느니 성도들이 본을 보이지 못했다느니 목사가 설교를 못했다느니 여러 가지 외적인 데에서 사람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마는 만일 외적인 이유 때문에 실족할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틴 루터가 0순위였을 것입니다. 

교회의 부패에 의해서 시험에 들 만한 이유가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마틴 루터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돌려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겠다고 법률가의 길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 사람이에요. 그가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면 내 인생 돌려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는 그렇게 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찾기 위하여 성경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말씀에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뿐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백배의 열매를 맺는 옥토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신앙을 얻지 못하는 이유 내가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를 자꾸만 외적인 데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신통치 않다든가 설교를 못 알아듣겠다든가 주변의 기독교인들이 다 그렇다든가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자꾸만 남에게서 찾으려고 하는데 그러나 주님은 그 이유는 전적으로 개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땅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씨앗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만약 씨앗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백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그 사람에게, 그 땅에 심은 씨앗은 특별한 씨앗입니까. 똑같은 씨앗인데 길가에 떨어졌더니 새가 먹어버리고 바위에 떨어졌더니 말라버리고 가시 엉겅퀴 사이에 떨어졌더니 기운을 빼앗기는데 그 이유는 그 땅에 있는 것이지 씨앗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이 좋은 땅에만 뿌리지 않았어요. 주님은 잘 믿을 것 같은 사람에게만 은혜를 주시는 건 아닙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널리 씨를 뿌렸습니다. 길 가에도 떨어지고 가시 엉겅퀴 사이에도 떨어지고 이것은 주님의 절대적인 공평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잘 믿을만한 사람만 부르시는 게 아니에요. 왜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 중에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정말로 착하고 잘 섬길만한 사람을 선택하신다면 이 세상에 예수님 믿을 사람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잘 믿을 것 같아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주님은 믿을 수 있는 기회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교회 오기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여러분 놀라실 것입니다- 과거에 주일학교에 다니고 교회 집사도 해보고 성가대도 해보고 한때 신학교를 다녀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밝히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지 그들이 교회 문턱에도 가볼 기회가 없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놀라실 것입니다. 군대 다닐 때 군대에서 세례 받은 사람들 많고 또 친구 따라서 교회 다니고 방언 받아 본 사람도 있고 별의 별 사람들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인색하셔서 그들이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그 이유는 결국은 자신에게 있어요. 그 이유를 다른데서 찾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만약 이유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외적인 데에 있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심판할 근거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책임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책임이 없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건 불공정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다는 얘기는 궁극적인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는 것도 맺지 못하는 것도 말라버리는 것도 그리고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도 결국은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마귀는 그렇게 하는 자에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 책임이 본인에게 있습니다. 

여기 네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첫째는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이라서 마귀가 깨닫지 못하도록 말씀을 빼앗아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박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정도의 이해심을 가져야 됩니다. 사람이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이 길가에 떨어진 사람이 생각이 부족해서, 깨닫는 능력이 없어서 깨닫지 못하는 게 아니고 결국은 무관심한 것입니다. 

신앙적인 것, 자기의 내면적인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입니다. 관심이 다른 데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 전에 마귀가 그 말씀을 훔쳐갑니다. 마귀는 말씀을 훔쳐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고 나니까 뱀이 하와에게 찾아가서 그 말씀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이게 마귀가 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귀가 와서 그것을 부인합니다. 빼앗아 갑니다. 그건 당사자 책임입니다.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두면 안돼요. 훔쳐가도록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기쁨이든 평강이든 여러분 마음에 있는 믿음이든 마귀가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둔다면 여러분 책임입니다. 누구는 잘 간직하고 있는데 왜 누구는 빼앗깁니까. 빼앗기는 게 잘못이지요.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잘못이지요. 그것도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귀중한 것을 왜 빼앗깁니까. 빼앗기는 사람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차피 빼앗아 가는 자에요. 

도적이 하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그걸 몰랐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지키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우리의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도둑이 있다는 것을 알면 문단속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영혼의 문단속은 하지 않습니까.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다른 데에 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데에 생각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말씀을 주어도 마귀가 그냥 먹어버립니다. 아무런 결과가 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인데 이 사람은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는데 뿌리가 없어서 해가 나니까 말라버렸다고 했습니다. 그건 핍박이 오니까, 고난이 오니까 그냥 말라버린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뿌리가 있어야 됩니다. 깊이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적응력 ․ 인내심을 말합니다.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학교에 새로 들어가면 학교에 적응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직장에 적응해야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대해서 적응해야 될 필요성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세상에는 서비스업이 있습니다. 백화점 ․ 레스토랑 ․ 호텔 다 서비스업이지요. 교회는 서비스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서비스를 받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에게 적응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뿌리가 없는 사람은 적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불편하고 조금만 핍박과 고난이 오면 그냥 말라버리는 사람입니다. 깊이가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군대에 갔을 때 규율과 여러 가지 훈련과 이런 것을 받는 이유는 거기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적응해야 뿌리를 내리지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군인이 되고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까. 직장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습니다. 야단맞는 것은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불편한 일을 감당하게 하시고 때로는 언짢은 경험도 하게 하시고 그걸 통해서 내가 신앙에 붙어있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떠나가고 싫다고 그만두고 이런 사람은 신앙뿐만이 아니고 직장이든 학교든 어느 곳에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실패자입니다. 

세 번째가 가시덩굴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마음속에 말씀과 경쟁하는 것이 많습니다. 세상 염려 ․ 재리 ․ 유혹 이런 것이 그 사람의 말씀과 경쟁해서 기운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제일 많습니다. 이건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음이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착한 사람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부분도 있고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과 경쟁하는 것이 많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마음을 비워야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절과 부인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뭔가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 주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 뭔가를 버렸어요. 마태, 예수님이 부르실 때 뭔가를 버렸어요. 바울, 예수님이 그를 부르실 때 뭔가를 버렸어요. 그것이 그들을 의롭게 만든 건 아니에요. 다만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그들을 도운 것입니다. 그것을 버렸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을 좇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우리에게 많이 있어요. 기독교 신앙은 작은 것을 버림으로써 큰 것을 얻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버림으로써. 여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지름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예수님도 이 원칙을 비켜갈 수 없었어요. 예수님도 뭔가를 버려야했어요.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비켜갈 수 없어요.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버려야 됩니다. 비켜갈 수 없습니다. 지름길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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