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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리고 성을 정복하라(3) (수 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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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성을 정복하라(3) (수 6:20-21)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山)라는 분은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가 무엇인가? 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말한 바가 있었다. 

①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②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③은혜를 받았으나 감사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난공불락의 성이요, 천연요새지인 견고한 성읍 여리고는 인간의 능력으로 무너지게 할 수 없는 성이었다. 

따라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나팔을 불라.(20)

일곱 제사장들은 언약궤 앞에서 행진하면서 각각 양의 뿔로 된 나팔을 가지고 그것을 불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마지막 일곱 번째를 다 돌고나서 제사장들은 또 나팔을 길게 불어야 했다.(5) 

이 나팔수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지휘 아래 나팔을 불었다. 
양각나팔은 양의 뿔에 구멍을 내어 만든 것으로 흔한 재료이며, 특별히 아름다운 모양도 아니었고, 소리도 매우 둔탁한 것이었다. 은 나팔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나팔이다.  

나팔소리는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민10:1-8)
특별히 전쟁의 날에 부는 나팔소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진두지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의 호령소리였다.(민10:9) 

①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승리를 확신시켜 주시는 기쁨과 자유의 소리였다. 

②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패배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두려움과 공포의 소리였다. 

나팔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표 하는 것이다. 나팔과 나팔소리가 특별한 것이 아니듯 복음은 특별하지도 않고, 지혜로워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양각나팔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여리고와 같은 견고한 성을 무너지게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사단의 왕국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양의 뿔을 얻기 위해서는 양의 희생, 즉 양의 죽음이 필요하다.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요1:29=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36=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사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때는 별 볼일 없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목수였고, 가난한 동네 갈릴리의 나사렛 출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마치 어린 양처럼 대속의 제물이 되신 분이다.

죄는 사람이 짓고, 죽기는 예수님이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우리를 향하여서는 선한 목자이시다. 

기독교는 의인의 종교가 아니라, 죄인의 종교이다. 다만 예수 믿고, 용서받아 새롭게 태어나 “용서받은 죄인들의 종교”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주님이시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역사적인 사건이다. 

양이 죽어야 뿔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2.크게 외치라.(5, 16)

여리고 성을 하나님이 “돌라”고 하신 13 번까지 다 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다 돌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 돈 다음 마지막으로 크게 외칠 때, 비로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크게 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이 무너질 것을 믿으며 끝까지 돌았고, 함성을 질렀다. 따라서 그 함성은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의 소리요, 외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순종의 소리였다.

분명한 것은 그 함성은 모두가 하나 된 단합과 일치의 소리였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처럼 세상을 향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소식에는 비보가 있고, 낭보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비보가 더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낭보이다. 그러므로 외쳐야 한다. 외칠 때 성이 무너졌다.

오늘 날 날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살면서도 왜 사는지, 이다음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모르고 막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성도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힘 있게 외쳐야 한다. 
“여기에 살 길이 있다.”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 승리가 있다”고 외쳐야 한다. 
“예수님이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해답이시다” 라고 외쳐야 한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고 했지만, 적어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아니다. 외쳐야 한다.
파수군은 적을 보고 크게 외쳐야 한다. 경고를 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크게 외쳐라. 외치면 여리고는 무너진다.


결론.

여리고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다 믿고 있었다. 다만 믿음의 대상이 달랐을 뿐이다. 여리고 사람들은 견고한 성읍, 난공불락의 성읍을 믿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돌아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자신들의 용맹이나 무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리적인 힘으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에만 의존하였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양의 희생 없이 양각나팔을 얻을 수 없다. 양각나팔을 얻기 위해서는 양의 죽음이 필요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다. 구원의 길, 즉 사는 길이 열렸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사실을 크게 외쳐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거대한 여리고, 난공불락의 여리고 같은 사단의 왕국이 무너지고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무너지는 축복이 임할 것이다. 이러한 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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