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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용이 부족할 때 (눅 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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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이 부족할 때 (눅 14:25-35)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주님의 메시아 사역의 핵심은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서 부르실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우선,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큰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고 손님들을 초청했는데, 사람들은 그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소를 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거절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주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시에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 <와서 듣고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빈정대면서 천국 복음을 비웃었습니다. 

주님 당시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오늘날도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모두 자기 일에 바쁩니다. 친구도 만나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연애도 해야 하고, 노닥거릴 시간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오지 못할 나름대로의 많은 이유들을 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대가는 무엇일까요? 본문 앞에 나오는 <큰 잔치의 비유>에서는 오지 않는 사람은 잔치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거절의 대가가 음식을 못 먹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같은 비유가 마태복음 22장 1절 이하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훨씬 엄격하게 말씀합니다. 거기서는 잔치를 베풀고 초대하는 분이 임금이고, 임금은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군대를 보내어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 잔치 음식을 먹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천국을 맛볼 수 없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들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본문 앞에 나오는 말씀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라면, 오늘의 본문은 이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25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많은 무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무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일단 그들은 주님께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고,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즐거워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내서 주님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이 핑계, 저 핑계하면서 응답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환대의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내게 와 주었으니, 참 좋은 사람들이다. 어서 오너라. 나와 함께 가자>,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매우 부담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문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시간을 좀 내고, 함께 걸으면서, 말씀하실 때마다 <예, 예> 하는 정도면 충분히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쉽게 여기는 것, 그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너무 쉽게 여기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는 삶을 너무 가볍게, 취미 생활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취미 생활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지만, 신앙생활은 필수입니다. 신앙생활은 학교 교육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학교 교육은 끝날 때가 있지만, 신앙생활은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계속됩니다. 

신앙생활은 부부 관계보다도 더 원초적입니다. 부부 관계는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죽으면 끝나지만, 주님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은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세상의 여러 일들은 이 세상의 삶과 관련될 뿐이지만, 신앙은 영원한 생명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장난처럼 여기면 곤란합니다. 얼마든지 <한 때의 일>로 돌릴 수 있는 정도로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한 때 나도 예수를 믿었었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려면 가볍기는커녕, 매우  고가의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비용과 관련해서 주님은 본문에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하나는 <망대를 세우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28-30절을 읽어봅시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은 과연 완공할 수 있는 비용이 준비되어 있는지 계산해 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주님의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비용이 준비되어 있는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전쟁을 준비하는 왕의 비유>입니다. 왕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일만 명의 군대로 상대방 이만 명을 물리칠 수 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적과 화친해야 합니다. 

이 비유들을 통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턱대고 나를 따르지 말아라. 나를 따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나를 따르기 전에 필요한 비용이 준비되었는지 따져 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람, 주님의 제자가 되는 데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주님은 그 비용에 대해 26-2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 뿐이 아닙니다. 33절에서도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되는 비용이 보통 비싼 게 아닙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할 각오,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모든 소유를 버려야 제자가 된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고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과연 이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이미 끝났습니까? 이 때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 앞에서 우물쭈물합니다. 그러다가 투덜대면서 포기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라고 말하면서 포기합니다. 

두 번째 반응은 <주님. 저는 완벽하게 비용을 준비했습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제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제 모든 소유도 버리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십자가도 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하실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본문의 긴장감은 절정에 달합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완벽하게 비용이 준비되었다>고 대답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비용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가족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소유에 미련이 많습니다. 우리 어깨는 십자가를 지기에는 너무도 연약합니다. 아직 비용을 지불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나요? <주님께서 비용을 조달할 수 없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느냐? 그러니 나는 포기해야지>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딜레마가 있습니다.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용이 완전히 준비되지도 못한 현실, 이게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정말 주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비용이 부족한 사람은 가라. 너희처럼 비용도 못 낼 사람은 필요 없어>라고 하시면서 쫓아내시는 것일까요? 주님이 그렇게 매정한 분입니까? 

바로 여기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결코 그렇게 매정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비용이 모자라 울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건지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비용을 완전히 낼 수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비용이 모자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주님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한 실례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장 좋은 예는 주님의 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제자가 되기에 합당할 정도로 완벽한 비용을 준비했습니까? 언뜻 그렇게 보입니다. 그는 주님이 부르셨을 때, 배와 그물을 버리고 따라갔으니, 정말 대단합니다. 그는 비용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지불한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비용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실 때, 그는 자기 목숨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비용으로 낼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도 비용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면 그는 제자의 자리에서 탈락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끝까지 명예로운 제자로 살아갔습니다.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비용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모두 욕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서로 자신이 더 훌륭하다고 다투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로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비용이 부족한 데도 어떻게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었나요? 그것은 모자라는 비용을 주님께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모자라는 헌신, 모자라는 열정, 모자라는 용기, 다 주님께서 채우셨습니다. 

<비용이 모자란 사람들도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을 읽고 <비용이 모자라는 나는 포기해야겠다>라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비용이 모자라도 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게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요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용이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 저는 반드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전 아직 비용 준비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전 주님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비용을 조달할 테니, 우선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제 눈물의 기도를 받아 주옵소서.> 그 때 주님의 놀라운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 따라 오너라. 너의 모자라는 비용은 내가 채워 주겠노라> 할렐루야! 

주님의 의도를 잘 읽으십시오. 주님은 <완전한 비용>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결단과 의지>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팔아서라도 비용을 댈 각오만 있다면, 그 의지만 있으면 모자라는 비용은 주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이게 바로 <주님을 향한 간절함>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문제는 <간절함의 부족>에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데도 우리는 간절함이 모자랄 때가 많습니다. <토니 테미>는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간절하게 굶주려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로 삶을 가득 채우고 굶주림을 충족시킨다. 우리는 매주, 매달, 매년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하나님으로 우리 빈곳을 채우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 임재의 빵 부스러기를 조금만 얻어먹어도 만족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코 빵 부스러기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덩어리 은혜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간절함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도 이런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향해 간절함을 가지길 원합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 지금은 비록 비용은 부족하지만, 전 여기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는 후에 배신자가 될 정도로 아직 비용이 모자랐지만, 의지 하나는 대단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을 보면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을 먹은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비록 비용은 부족하지만, 그의 가슴은 반드시 주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로 가득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본문 34-35절은 <맛을 잃은 소금 이야기>입니다. 본래 <맛을 잃은 소금 이야기>는 산상수훈 중에 마태복음 5장 13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용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소금 이야기를 말씀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언뜻 보면 앞 부분과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배열이 다른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마태복음과는 다른 배열로 말씀하시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34-3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맛을 잃은 소금은 버려진다>는 말씀은 정말 좌절을 느끼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죄인으로서 맛을 잃은 소금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로 그 누구도 <주님, 저는 맛이 좋은 소금입니다>라고 자신을 자랑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너희는 이미 끝장났다>는 최후통첩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최후통첩이나 하는 분이라면, 우리는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는 <주님은 맛을 잃은 소금일지라도 다시 맛이 나도록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이 놀라운 이야기가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맛을 잃은 소금을 다시 바닷물에 담그시고, 다시 햇빛을 받게 하셔서, 다시 불순물을 골라내서, 다시 맛을 내시는 분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은혜의 바닷물에 깊이 담겨지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뜨거운 빛 아래서 수분이 다 증발되고 바싹 마른, 맛좋은 소금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원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도 다시 만들어지듯이, 비용이 모자라는 사람도 간절히 매달리면 그 모자란 것을 주님께서 채우십니다. 문제는 주님을 향해 달려 나가는 간절한 믿음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알고 살았습니다. 간절히 매달리면 <모자라는 비용은 주님께서 채우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는 데 필요한 힘이 부족했지만, 하나님께서 채우실 줄 믿었습니다. 요나단은 블레셋을 이길 군인의 숫자가 부족함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 채우실 줄 믿었습니다. 

사무엘상 14장 6절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겨우 삼백 명밖에 없었지만, 모자라는 것은 주님이 채우실 줄 믿고 미디안 진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비용이 많이 부족합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달려갈 비용도 부족하고, 비전 센터를 완공하기까지 물질도 부족하고, 이 도시를 복음화 하는 데 필요한 능력도 부족합니다. 아직 우리는 모자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전부터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 도움을 구하십시오.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저를 써 주세요. 저를 받아 주세요. 그리고 모자란 비용은 채워 주옵소서>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대하여 주님께서 반드시 모자라는 비용을 채우시고, 우리를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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