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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시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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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6). 

시편 23편의 1절이 하나님께서 시인의 목자가 되시는 것에 대한 총론적 선언이라면, 2절부터 5절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목자이신지 이유를 밝히고 있고, 마지막 6절은 그렇게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모신 시인이 미래에 대해서 갖는 확신과 결단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두 가지 때문에 미래의 어떠한 불안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선하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토브’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함께 거의 모든 날 동안 빠짐없이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의 ‘좋았더라’와 같습니다. 

즉 이 말은 선함이 변하기 쉬운 인간 심리에 기인한 판단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드러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하나님께는 세계를 이렇게 만드시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가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모두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계획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완전히 합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것이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쁘다든지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준다든지 하는 인간 편에서의 판단이 아닌 것입니다. 그 판단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완전한 조화와 질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영적인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보이는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서 펼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한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지 창조의 목적이고,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당신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은 바로 이 온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에 이바지 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보람, 기쁨은 하나님이 온 세계를 창조하신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이 그 목적과 부합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선한 사람, 선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볼 때 사실, 신앙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갈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중심으로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면서 이런 저런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 악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의 행복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고 자기를 섬겨야지만 좋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모든 세계에서, 그 사람들의 선과 악을 모두 사용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여기에 나오는 ‘합력하다’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순 에르고’라는 단어인데 ‘순’이라는 단어는 ‘함께’라는 뜻이고 ‘에르고’라는 단어는 일하다는 뜻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선’ 역시 이런 관점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복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긴 여름 장마가 계속 되면, 온 집안에 곰팡이가 피고, 아침에 눈을 뜨면 날이 밝았는지 아직 어두웠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침침한 날들이 계속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장마가 끝나고 아침에 맑게 갠 하늘에 찬란한 햇빛이 얼굴을 내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에게 안질이 있다면 햇살이 비칠 때 다른 사람은 좋은 아침이라고 감탄해도 그의 눈은 따갑고 고통스러워서 눈에 안대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하고,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고, 고집대로 살 때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모가 자녀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자녀들이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을 때 그 아이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고, 아이를 꾸중하거나 매를 들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그 아이를 향해 선하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자식을 사랑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부모라면 어찌하든지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바로 이‘내버려 두심’입니다. 하나님의 큰 진노의 표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처방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고통을 받을 때 ‘회개’를 통해서 영혼과 마음의 궁극인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 우리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받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결국 시인이 말하는 선은, 더 더욱 미래에 대한 자기만족이나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증하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의 본질은 말씀을 통해 깨뜨려져 자기를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인생의 자라에서 도망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눈에 보기에 좋은 것들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눈에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나를 둘러싼 환경을 깨뜨리기 전에 나를 깨뜨려 주시옵소서. 나의 아집과 교만과 사랑의 집착을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나를 당신의 진리로 정결케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며 살겠습니다…….’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잘 모르지만 그분은 아시며, 나는 또 안다고 할지라도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있다는 믿음으로 살면서 자기를 주님께 복종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식으면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왠지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가장 선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져 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몸부림이자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뿌리입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자기를 의지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책망을 받았던 주요한 제목이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우상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우상을 통해서 자기를 섬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 우상숭배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값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졸렬한 방식으로 복음을 재해석하면서 자신의 엉터리 신앙생활을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의 무지는 이기적인 자기 욕망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껍질로 덮은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이런 삶에 박수를 치는 사단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잘못 심겨진 것들이 무너지고 뽑혀지지 않으면 올바르게 좋은 것들이 심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참된 의미를 알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섭리는 감춰진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비록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많은 고난을 겪었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선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주신 그 위대한 꿈, 해와 달과 열한 별이 그에게 절하는 그 꿈을 하나님께서 이뤄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마치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위대한 계획 속에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자기를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용서를 빌었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대들은 나를 종으로 판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마로 인생을 향해 어떤 악을 행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께 불만족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할까요?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셨는지 자기 아들까지도 내어주셨는데,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선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또 다른 선을 찾아 그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선하시면 선할수록 그렇게 악을 품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항상 당신의 선한 빛을 우리 인간에게 환하게 비추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 때에 그 선한 하나님의 햇빛은 인간에게 고통으로 나타나 징계를 가져옵니다. 반대로 한 인간이 핍박 속에서도 진실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쓴다면 선하신 그 햇빛은 고난 속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기도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도록 신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비추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자신의 고백을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는 바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을 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때로는 결핍의 빈들을 지나기도 했고, 때로는 폭풍과 같은 바다를 건너기도 했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두려움 속에 걷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생의 역경을 헤치면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선하신 분이시고, 마치 양떼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처럼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악하고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요, 하나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 좋은 일들이 있었고 행복한 일들이 있었다면 우리의 악을 능가 하셔서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가면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박았던 수많은 못 자국들이 아직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한 번도 미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로 인하여 욕을 당하신 적이 없는 것처럼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그 한없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서 우리 같이 죄인 중의 괴수인 사람에게까지 미치고 그 손길은 우리를 치료하여 우리의 눈의 안질을 낫게 해 주셔서 진리의 찬란한 빛이 이제는 따갑지 않고 아름다운 빛이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의 입맛을 변하게 하여 이제 주님의 선하심이 쓰디쓰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의 속한 것들이 우리에게 쓰게 느껴지도록 변화시켜 줍니다. 

수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릇된 행복을 좇는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자기가 삶의 주인 된 삶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해 지려고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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