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광복절] 누가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설 것인가? (겔 22:23-31)

  • 잡초 잡초
  • 669
  • 0

첨부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정결함을 얻지 못한 땅이요 진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이로다 하라 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 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그 가운데에 그 고관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포악하며 강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은 8.15 광복 65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어 마음껏 자유를 누리게 된 해방의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흑암 가운데 살던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주셔서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韓民族)과 구약 이스라엘 백성 간에는 유사점(類似點)이 많습니다. 세계의 강대국 사이에 끼여 고통을 당한 역사라든지,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일이라든지, 다른 나라의 속국(屬國)이 되었다가 자유를 되찾은 역사 같은 것이 공통점입니다.
우리 민족이 36년간 자유를 빼앗기고 일제의 종살이를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430년간 애굽의 노예로 살았었고, 그후 출애굽해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후일 그들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고 70년 간이나 포로생활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기념하여 유월절 절기를 지키듯이 우리도 8.15 해방을 기념하여 광복절(光復節)을 지킵니다. 이날이 기념할 만한 날인 이유는 일본인들의 끔찍한 만행을 종식시키고 자유를 찾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남자들은 강제 징병을 당하여 전선에서 총알받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젊은 여자들은 일본 군인들을 위안하기 위해 무참히 정신대로 끌려갔습니다.
우리 말을 빼앗기고, 우리 글도 빼앗겼습니다. 교회들이 많은 핍박을 당하였고, 자기들의 귀신을 섬기라고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습니다. 
우리의 뇌리 깊은 곳에 박혀 있는 반일감정(反日感情)은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축구시합을 하더라도 다른 모든 나라에 져도 일본팀에게 만큼은 절대 질 수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국교회 성도들의 끊임없는 독립에의 의지와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 날은 우리 민족에게 축복의 날이고 영원히 잊지 못할 날입니다. 65년이 지난 요즈음 후손된 우리들이 이 놀라운 감격을 까맣게 잊어가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세대 가운데는 일본의 부패한 문화에 깊이 빠져 우리의 민족혼(民族魂)을 좀 먹히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우리는 광복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말기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종 에스겔에게 주신 주님의 애타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유다가 어찌하여 멸망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은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로 오늘 우리의 현실, 특히 한국교회의 현실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을, 우리는 본문에서뿐 아니라 선지서 전체를 통하여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 세대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며, 또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그 죄성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들려옵니다. 

30절=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절=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무너진 성을 쌓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성 무너진 데에 서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막아낼 것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무너진 신앙과 윤리의 성벽을 재건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속주의, 인본주의, 혼합주의, 다원주의의 포로된 삶에서 제2의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의 죄악상

24절= “...너는 정결함을 얻지 못한 땅이요 진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이로다...”

본문에 보면 유다를 구성했던 4종류 신분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즉 선지자들, 제사장들, 방백들, 그리고 백성들이 그들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린다면, 유다 패망의 원인은 이들 모두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1) 먼저 선지자들을 보겠습니다. 

25절= “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28절=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선지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순수하게 직고(直告)해야 할 선지자들의 배역한 부패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원래 선지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전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본절에 의하면 에스겔 당시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구실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근거하여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회개와 순종을 촉구하기보다는,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의 비위나 맞추며 자신의 생계 잇기와 재물 축재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불의한 위정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철저히 아부하는 선지자들의 타락한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대표적인 예가 예레미야 선지시대의 하나냐라는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28장에 보면 이 두 사람의 대화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먼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한다. 성전도 무너질 것이다. 너희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 언뜻 보기에는 불신앙적인 말같이 들립니다. 
이때 하나냐 선지자가 그 말에 반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했는데, 유다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유다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냐. 언약궤가 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지 않느냐.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가 드려지고 있지 않느냐.” 거짓 평화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때 다시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이제 너희는 더 이상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모습에 안주하지 말라. 하나님은 더 이상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 계시지 않는다. 너희는 이제 너희의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예레미야 28장 마지막 절(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냐 선지자를 죽여 버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에스겔 당시의 선지자들은 하나냐처럼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스스로 속이거나 아니면 착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거짓 평안을 외치며 축복을 함부로 빌어 주고, 사람들의 인기와 인정받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죄와 영혼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지 않는, 거짓 종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였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2) 다음에 제사장들을 보겠습니다. 

26절=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 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율법을 지켜야 할 제사장들이 먼저 율법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땅히 '거룩'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성결한 삶을 지도하고 가르치며, 그들의 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을 자기 이익 추구의 본거지로 삼고, 거룩과 속됨을 구별하기는커녕 우상 숭배자들과 이단들도 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모두 받아들이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용납하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이제 형식적인 날에 불과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증거되고, 하나님 그분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더럽히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말 2:3에 보면 하나님은 부패한 제사장들을 저주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3) 다음으로 고관들은 어떠합니까? 

27절= “그 가운데에 그 고관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고관이란 오늘로 치면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지도하는 정치가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고관들도 극도로 타락했습니다. 뇌물을 좋아하였고, 불법으로 돈을 횡령하였고, 억울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자들과 힘없는 자들을 불공평하게 판단하였습니다. 
정치의 생명은 공의와 정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포기하였고, 이리떼로 변했습니다. 나약한 자를 죽이기까지 하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윗물은 이제 흐릴 때로 흐려져서 악취가 편만해졌고,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였던 것입니다. 

4) 그러니 자연히 그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9절= “이 땅 백성은 포악하며 강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도 못하고 성결과 거룩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된 불쌍한 백성들, 악정에서 요령과 기회만을 배운 백성들은 이제 강도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는 불신의 풍조가 팽배했고,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찼으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형제인 자기 민족끼리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타락은 이제 사회 전체를 윤리적 타락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졌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비록 예배의 형식은 남아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악한 영의 열매들로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 중요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펴본 본문의 역사적 사실이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특히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본문은 마치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들의 현실이 이 에스겔 시대와 너무도 똑같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이 누구로 나와 있습니까? 소위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아니었습니까? 그 중에서도 특히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했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아니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 인구가 늘기는 하는데 사회는 계속 더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 이라는 자들이 숫자적으로는 늘어나는데 세상은 계속 더 썩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많아지는데 세상은 점점 더 캄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짓 평안을 외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회 안에 잠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볼 때 교회의 축제와 행사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고, 부흥회나 제자훈련, 성경공부, 찬양 집회 등 수많은 모임들도 볼 수 있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쉽지 않고, 애통하는 심령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교회의 타락입니다. 영적인 타락입니다. 사회의 타락, 윤리의 타락은 영적 타락이 그 원인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고백해야 합니다. 사회의 타락은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신이 득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 외치시는 말씀을 듣기 바랍니다. 


2. 성 쌓는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30절=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찾다가...”

유다의 타락상을 꿰뚫어 보신 하나님은 그 땅을 위하여 무너진 성을 쌓아 올릴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을 쌓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느헤미야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마음에 예루살렘 도성이 훼파된 사실로 인해 엄청난 부담을 가진 것을 아셨고, 그의 피맺힌 기도를 응답하셔서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重建)할 수 있도록 모든 길을 기적처럼 열어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52일 만에 완전히 재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하여 축복을 말하시면서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사 58:12) 라고 하십니다. ‘무너진 곳’은 어떤 곳입니까? 백성들의 안전을 해치고 평화로운 삶을 박탈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너진 데를 다시 세우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성을 쌓고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라에도 무너진 곳이 있을 수 있고, 교회에도 우리네 가정에도 무너진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공동체나 모임이나 개인의 삶 속에도 무너진 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세상과 교회가 함께 타락해버린 이 시대에 느헤미야와 같이 성벽을 쌓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이 필요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성을 쌓는 일이란 어떤 일입니까?

1) 나부터 불의를 배격하고 의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불의(不義)는 나라를 패망케 하고 의(義)는 나라를 흥왕케 하는 법입니다(잠14:34).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든 불의가 범람하면 나라가 망하고 의가 성하고 팽창하면 나라가 흥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인은 국방(國防)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경찰서 열 곳을 세우는 것보다 예배당 한 곳을 세우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더 유익하다는 김구 선생의 말씀처럼, 열명의 군경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나 한명의 의인을 소유하는 것이 나라의 국방과 치안을 위해 보다 더 생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이라고 지칭했습니다(왕하2:12 ,13:14). 이것은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말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더 좋은 내일의 조국을 기대하고 있다면 우선 나부터 불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옳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곧 나라를 위해 성을 쌓는 일입니다. 

2) 신앙 인구를 증가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물의 힘으로 발전기를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물이 고여야 되는 것이지 한두 홉의 물로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인으로 말미암아 국가와 민족이 구원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량의 의인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지 한두 사람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고 세계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롯은 의인이었습니다(벧후2:7). 그럼에도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성은 망했습니다. 의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열명의 의인이라도 거기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불의와 죄악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길, 멸망과 재앙으로부터 겨레를 보호하는 길은 이 땅에 의인 곧 신앙 인구를 증가시키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구국에 대해 묻는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 도덕의 불모지에, 양심의 폐허위에 성을 쌓는 작업이 벌어져야겠습니다. 우선 나 자신부터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성을 쌓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3. 누가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설 것인가?

30절= “이 땅을 위하여...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본절은 읽는 이의 가슴에 엄청난 경고의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타락한 성읍을 멸하지 못하도록 몸을 던지는’ 한 사람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해 진노의 불을 쏟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영적, 도덕적인 죄악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보할 기도의 용사를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심판을 거두실 텐데 그 한명조차 없다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설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던져 중보의 기도를 드리던 사무엘과 같은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 12:23). 사무엘은 바쁜 일과 중에서도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의 제사장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죄인을 비난하고 심판하며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기가 청산할 자인 것처럼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계속합시다. 그리하면 모세의 기도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멸망 직전에서 용서를 받은 것처럼(신9:25, 민14:13) 이 나라가 사유(赦宥)를 받을 것이며, 다윗의 기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재앙에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 백성들이 건짐을 받게 될 것입니다.(삼하 24:25). 과연 중보 기도는 민족을 죄에서 구원하며 나라를 멸망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나라를 구한 소년 한스’ 같은 중보기도자는 없는 것입니까? 네덜란드 하링언이라는 도시에 조그마한 소년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잔뜩 쭈그리고 앉아 어디엔가 팔뚝을 들이밀고 있는 동상 밑에는 “나라를 구한 소년 한스” 라는 제목의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한스라는 소년은 나라의 대부분의 땅이 바다보다 낮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이웃마을에 갔던 소년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제법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둑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물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급히 달려가 보았더니 바다를 막아 놓은 둑에서 물이 조금씩 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만히 두면 결국 둑이 무너져 마을 전체가 바다가 될 것이고 이웃 마을도 바다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을 향해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큰일 났어요. 둑에서 물이 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들릴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아, 우선 나 혼자의 힘으로라도 이것을 막아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웃옷을 벗어 팔뚝에 감아 그 구멍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잠시 물이 멈추는 것 같더니 다시 물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스는 자신의 바지마저도 벗어 팔뚝에 감아 그 구멍을 막았습니다. 밤이 되자 몸은 춥고 팔은 저리고 아팠지만, 소년 한스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 팔을 빼면 이 둑이 무너질 것이고 온 마을이 물바다가 될 터인데, 내게 이길 힘을 주십시오.” 
다음 날 새벽, 일하러 가던 한 농부가 둑에 붙어 있는 한 소년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온 몸이 물에 불어 기절해 있었습니다. 농부는 소년의 팔을 뽑고, 둑을 막았습니다. 소년은 온 몸을 던져 나라를 구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도 소년 한스가 필요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8.15 해방 65주년을 맞습니다. 선교 2세기를 맞은 한국교회는 1,000만 성도와 3만 교회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교회가 한국교회의 성장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며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가 외형적인 성장만을 가리키며 칭찬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칫 성장에 따르는 문제점을 보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1,000만 성도와 3만 한국교회가 썩어져가는 이 한국사회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교회사를 살펴보면 신학교가 잘되고 부흥했던 때 치고 교회가 타락하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살길이 신학교의 갱신에 있고, 나아가 강단의 회복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엎드리실 때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자들이 배출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누가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설 것입니까? 우리의 교회와 도시와 나라를 가슴에 담고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 몸을 던져 중보 기도하는 서현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 박순오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