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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의 축복 (레 7: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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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축복 (레 7:28-34)

소 대신 예배
몽골 이용규 선교사님의 책 [내려놓음]에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2005년 봄,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해서 예배드리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다. 그녀는 몇 달 전 우리 팀의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 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 왔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하나님께 그녀가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 자매가 소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사람이 자기 힘을 의지하다다 안 되면 자신의 실패이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먼저 찾아온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한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다.“ 

레위기와 5대제사
하나님 말씀, 성경에 어렵고 읽어도 잘 모르겠다고 여기지는 책이 몇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레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첫 장부터 나와 별 상관이 없는 동물을 잡아 가죽을 벗겨 각을 뜨고(다리를 자르고), 무슨 도살장도 아니고, 불에 태웁니다. 번제입니다. 그리고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종류도 많고 그것이 그것 같아 헷갈립니다. 
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런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성경에 넣어 놓았는지, 여러모로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화하기 어려운 데도 성경에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큰 뜻과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배’입니다. 예배에 엄청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복
제사, 곧 예배는 회복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고 했습니다. 죄의 먹구름 때문에 땅에는 환한 빛이 없습니다. 인생이 습하고 꿀꿀합니다. 
레위기에 자주 나오는 말 중에 ‘부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하다고 하는 말의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부정’이라는 말을 일방적으로 나쁘게만 여깁니다.  그러나 ‘부정’에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만물은 모두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피조물은 ‘정’과 ‘부정’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부정의 자리’에는 돼지, 오징어 등이 있고, 산모와 한 달에 한 번씩 부드러워진다는 ‘생리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정의 자리’는 부정의 자리를 제외한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는 완전하고 아름다운데 돼지는 억울합니다. ‘부정’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나쁜 것으로 취급당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생명을 낳은 산모가 부정합니까?  ‘부정’의 나쁜 이미지를 벗고 단지 하나님께서 정해 준 자리라고 생각하고 돼지를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돼지는 돼지우리 ‘부정의 자리’에서도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선함으로 지음 받은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특정한 이미지로 정죄할 따름입니다. 
②진짜 문제는 두 번째 ‘부정’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준 자리를 떠나는 것을 ‘부정’이라고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신의 자리에 가려고 하는 것이 부정입니다. 성경은 이를 너무 부정하여 ‘참람’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사람으로 알고 있던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니, 그이 죄목이 참람이 되어 그 죄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막 14:64, 개역) 『그 참람한 말(신성 모독)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또한, 정한 것이 부정과 접촉하고 자기 자리를 떠나 부정의 자리에 떨어진 것을 부정이라고 합니다.  별이 자기 자리를 떠나 다른 행성과 충돌하면 재앙입니다.  이를 영화로 만든 것이 [딥 임팩트]입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죄요, 그 결과는 엄청난 비극이요, 죽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섬길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 자리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사단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한 천사입니다.  (유 1:6, 개정)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그 사단이 우리도 우리의 자리를 떠도록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우리는 죄로 죽게 되었습니다. 

각 자의 자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제사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기에, (히 9:22, 개역)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나 대신 피를 흘리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래서 도살장 같이 되었습니다. 
레위기가 성경의 중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죄로 인해 저주와 고통 가운데 죽음에 떨어지는 것을 살려내는 길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는 것,  자기 자리를 회복하는 것, 모든 저주와 고통에서 풀려 나는 것.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원래의 자리에 있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손으로
오늘 본문 30절에는 “여호와의 화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 지니”라고 했습니다.  동물을 죽이고 피를 내고 가죽을 벗기고 다리를 자르고 내장과 콩팥 기름을 제거하는 일 등을 자기가 직접 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하여 아픔과 고통이 있는지, 직접 경험하도록 합니다. 지금 죽는 것이 자기 임을 철저히 알게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져 오면 제사장은 하늘을 향하여 듭니다(거제). 그리고 흔듭니다(요제).  그리고 불태워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셔서 죄를 잊어 버리십니다. 동물을 태운 연기와 냄새가 향기로운 것은 이것으로 인해 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제물을 드려 제사한 이에게 “이제 당신의 죄는 없어졌습니다”라고 사죄를 선포합니다.  원래의 상태로 회복된 것입니다. 

속죄의 어린양 제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벧전 2:24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고 했고 또, 벧전 3:18에서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이 십자가 복음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인이 된 이들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는데, 찬양과 기도의 입술로 신앙을 고백하며 구원을 확증하는 자리입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제사장이 사죄를 선언한 것처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음’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은 새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힘이 되고 지혜가 되고 용기가 되고 방향이 됩니다. 

예배와 말씀에 대해,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브리티시 위클리(British Weekly)라는 잡지사에 편지 한통이 배달되었습니다. 잡지사는 잡지에 이를 게재했습니다. 
"목사님들은 설교에 상당히 큰 비중을 두고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아주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해 왔고 그 동안 제 추산이 정확하다면 적어도 3천 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놀라는 것은 그 설교 중에 제목을 단 한 편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시간을 달리 썼다면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에 설교에 대한 찬반 양론이 산사태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한 편지가 그 논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저는 결혼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32,850번의 식사를 하였습니다. 거의 저의 아내가 요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는 그 많은 식사 중 언제 어떤 메뉴로 식사를 한지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식사를 할 때마다 매끼 영양을 공급받았습니다. 저는 그 많은 식사가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이미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압니다." 

나눔이 있는 기쁨
예배는 나눔이 있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도살장 같이 피와 연기, 살타는 냄새, 기름타는 냄새가 자욱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게 죄 사함을 받은 후에는 다시 산 기쁨, 원수같이 되었다가 화목하게 된 기쁨을 모두 같이 나눕니다. 특히 화목제는 피와 기름을 제단을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을 비롯해 모두 나누어서 잔치처럼 지냈습니다. 
사무엘 상 1,4-5을 보면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하면서 임신하지 못하는 한나에게 더욱 많이 나누어주며 위로하며 힘을 주었습니다. 
또, 삼상 9:24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원하고 기다리던 왕이 세워졌을 때, 사무엘은 일부러 제사장 몫은 뒷다리- 넓적다리를 남겨주었다가 사울에게 주면서 기쁨을 같이 나눕니다.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예배는 축제의 자리입니다.  하늘 나라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축복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리입니다. 

어느 장례식장에 시체 세 구가 있는데 한결같이 웃는 모습입니다. 크게 웃다가 죽었기 때문이랍니다. 
첫 번째 사람은 로또 복권이 당첨이 되어 너무 기뻐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들이 삼수를 해서 서울대학에 합격하여 너무 기뻐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었습니다. 번쩍할 때 사진 찍는 줄 알고 '치즈'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모두 웃고 있지만  씁쓸한 웃음입니다. 인생에 진짜 격려와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모든 제사에는 무교병- 누룩 넣지 않은 것을 씁니다. 뻥튀기 된 것, 발효되어 원래의 모습이 아닌 것은 쓰지 않습니다.  온전하고 순전한 그래로를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자기 손으로 제물을 잡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꿀도 석지 않습니다.  그러니 맛은 정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에 예외 조항이 있습니다. 같이 나누어 먹는 기쁨을 위하여 유교병을 허락합니다.  (레 7:13, 개정)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제물로 드린 고기 중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도 그날 다 먹어야 합니다.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예외 조항이 있습니다.  (레 7:16, 개정)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하나님께 어떤 소원을 아뢰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헌물을 바칠 때에는 이웃과 친지, 친구들을 불러서 자기의 서원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도록 더 큰 기쁨과 격려, 그리고 이웃의 지원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예외 조항까지 두시며 사랑의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애찬의 자리는 이와 같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는 애찬을 국수로 했습니다.  유치부에 다니던 아들, 승준이는 유치부 예배와 성경공부, 그리고 국수를 먹어야 그날의 공식적인  예배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은 선생님 손을 잡고 잔치 국수를 먹으러 가는 장렬한 행렬이 있었습니다.  유치부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그렇게 정담을 나누며 기쁨을 나누며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그 얼굴들이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떠오르는 얼굴을 두고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주신 복을 회복하여 온전히 누리는 것이요,  서로 다르지만,  이해하고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기도해 주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예배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신 33:29은 바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할렐루야!
(서연교회 이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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