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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3의 세력 (창 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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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의 세력’ . com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3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14;1-16)

 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서, 특히 자신을 경건하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신앙이란 구름 위에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예배당에 머물러 있으면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사회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살아가려고 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산 위의 영광스러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고통에 짓눌려 탄식만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경건한 생활일까요?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에게서 배워야 할 하나는 그의 신앙이 예배하는 자로서 ‘제단(祭壇)’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땅을 딛고 살았습니다.  예배자 아브람이 살아간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우선 주목해야 할 말은 ‘당시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누군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것으로 어떤 시대를 가리킵니다.  단지 똑딱거리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활동 무대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살고 있던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엘람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엘람은 오늘날의 이란 고원 남부에 위치했던 나라였는데 그 당시의 최강국이었습니다. 최강국 엘람이 그 주변의 시날, 엘리살, 고임이라는 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으니 가히 당시는 엘람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 세상에는 주류(主流)가 있습니다.

어떤 시대이든지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나라 또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도력을 발휘하여 힘을 모으고 그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세상에는 흐르는 강력한 물줄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힘이나 세력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아진 힘을 무조건 좋은 것이라거나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힘은 얼마나 세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물줄기는 항상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크던 작던 바른 물줄기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시대에 영적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적 흐름을 주도하는 젊은이가 되기를,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 세상에는 저항(抵抗)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주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국도 있고 주류에 대항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4절) 엘람에 대항하는 나라와 그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돔 왕 베라, 고모라 왕 비르사, 아드마 왕 시납, 스보임 왕 세메벨, 그리고 소알 왕 벨라였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사해 주변 지역의 왕들입니다. 이들은 십이 년 동안이나 엘람을 섬기다가, 십삼 년째 되는 해에 배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배반이라는 말은 별로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만 ‘반역하다’ ‘반항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행동을 배반이라고 보아야할지 독립전쟁으로 보아야 할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릅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이고 피지배의 입장에서는 독립전쟁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3. 세상에는 전쟁(戰爭)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과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이 적정선에서 타협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협상이나 타협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엘람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 지역의 네 왕과 그들에게 저항하는 남쪽 지역 다섯 왕이 맞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 4개 나라의 연합군과 5개 나라의 동맹군이 충돌하는 전쟁입니다. 엘람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소돔을 중심으로 한 동맹군이  인류 최초의 소규모 세계 대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에 전쟁의 소용돌이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사는 오늘도 이 세상의 소용돌이는 그치지 않습니다. 아직도 지구의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세계화를 이야기하지만 지역적인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480년에서 1965년 사이에 약 500년 동안에 일어난 전쟁은 무려 308차례나 된답니다. 이 전쟁 가운데 국제전은 152차례, 제국주의적 전쟁은 70차례, 시민전쟁은 86차례였습니다. 전쟁의 규모도 두 약소국 간에 몇 개월간 지속된 전쟁에서부터 30년 전쟁(1618-48), 7년 전쟁(1756-63), 나폴레옹 전쟁, 제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까지 다양하였습니다. 특히 제1, 2차 세계대전은 세계의 모든 강대국과 그 주변의 많은 국가를 끌어들인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또 지금은 경제 전쟁이 더 지독한 전쟁이라고 말을 합니다.  온 세계가  경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원하는 유능한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입니다. 또한 군사적 충돌이나 경제 다툼만이 전쟁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심각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영적 혼란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류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바람이 잘 날이 없습니다. 강풍이 사정없이 불어 많은 사람들을 휩쓸고, 파도에 파도가 겹쳐 거대한 물기둥이 되어 사람들을 덮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싸움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싸움이 있습니다.  가정에도 싸움이 일어나고, 직장에서도 개인간의 부서간의 힘겨루기가 일어납니다.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싸움이 발생합니다. 지하철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옆에서 말리던 사람들이 ‘여기가 교회냐 그만 싸워라’하더랍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있고 그 갈등이 심각한 대립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한 모습입니다. 

4. 세상에는 성패(成敗)가 있습니다.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싸움이 끝났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승리였습니다. 수비를 하던 가나안 지역의 다섯 왕이 패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홈그라운드에서 패배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수렁에 빠지고, 나머지는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쳐들어온 가나안 북쪽의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아마 남부 가나안 동맹군이 전쟁의 장소로 싯딤 골짜기를 택한 까닭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아 침입군에게 방해가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오히려 자신들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이런 것이 세상사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또 이 땅에서는 영원한 성공도 없고 영원한 실패도 없습니다. 잠시 성공하였다고 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패배하였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생에도 패자 부활전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결과에도 낙심하지 않는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3절 말씀을 보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전쟁을 할 그 당시에는 ‘싯딤’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는 염해(鹽害)였다는 것입니다. ‘싯딤 골짜기’라는 말은 ‘아카시아 골짜기’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하게 자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염해, 소금바다가 되었습니다. 왜 싯딤 골자기가 염해가 되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전쟁에서 패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죄와 타락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패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어그러진 길로 가다가 마침내 유황불로 심판당한 사실(19:1-11,24,25)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5. 세상과 연관(聯關)이 있습니다.

이제 12절 말씀을 봅니다.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12절) 엘람 연합군에 의하여 소돔이 패배하자 그곳에 살고 있던 롯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를 그냥 ‘소돔에 살고 있던 롯’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브람의 조카 롯’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소돔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로잡아 갔다고 말하지 않고 그 중에 특별히 한 사람을 가리켜 ‘아브람의 조카 롯’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류와 비주류의 이 전쟁에 아브람이 끼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세상을 사는 신앙인은 세상과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에 어떤 바람이 불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집단이 어려움을 당할 때 혼자서만 고고하게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지속된 3년 동안의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남북한을 합친 인적 손실은 무려 5백 20만 명 규모로서 당시 남북한 인구 약 3천만명중 1/6정도가 손실된 민족사의 대비극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인명피해 이외에도 국토의 대부분이 황폐해졌고 물질적 피해도 컸으며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지요.  그 전쟁에서 교회는 무사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전쟁 중에 수많은 예배당이 불탔습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숨졌습니다. 많은 신앙지도자들이 납북되어 순교하였거나 아직도 생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교회가 완전히 황폐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 속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소용돌이를 교인들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믿음의 사람들도 세상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전 5:10).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6. 믿음의 행동(行動)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람은 그의 시대, 그의 장소, 그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가만히 있는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을 버리고 떠나버린 조카 롯, 좋은 땅을 양보하지도 않은 조카 롯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있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그 롯이 전쟁에서 잡혀 갔다고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고 녀석 잘됐다. 나를 버리고 배반하고 떠나더니 당했구나. 싸다 싸.'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두려워하면서 얼마든지 ‘내 힘을 넘어선 일이야’ 하며 합리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조카가 아파할 때 자기도 아파합니다.  롯이 위기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아브람은 즉시 자기의 군사를 동원합니다. 지체하면 어떤 어려움이 생길지 모릅니다. 조금 지나면 조카가 죽을 지도 모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믿음이란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롯에 대한 사랑으로 ‘죽으러 가자, 같이 죽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인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반드시 나를 지켜주신다. 나는 이길 수밖에 없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군대의 숫자로나, 실력으로나, 경험으로 볼 때 아브람이 이길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포기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켰을 겁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자신감입니다.  

믿음은 계산을 뛰어넘고, 환경을 능가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없다고 할 때 두 손들고 나를 포기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은 손을 들어 주신다.’  이성과 상식으로 생각했다면 아브람은 조카를 포기했을 겁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14:14-16)  

아브람은 그 믿음으로 성공을 합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창14:16)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부녀들,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다 데려왔습니다. 잃었던 재물과 짐승도 다 가지고 왔습니다. 할렐루야!!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안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일을 일으켰습니까? 상식입니까? 경험입니까? 아닙니다.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7. 제3의 세력(勢力)이 있습니다.

가장 강한 세력은 그돌라오멜의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류도 비주류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세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아브람과 동맹한 제 3의 세력이 세상의 주류세력을 깨어버립니다. 이 세력이 바로 ‘믿음의 세력’입니다. 평소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면 등장하여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세력은 세상정치와 결탁하는 것이 아니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이 무엇인가요? 롯을 구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전면(前面)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력은 세상을 기독교로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바로 부패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지.. 지배하는 힘이 아닙니다. 가장 강한 힘이지만 주류가 아니며, 주류가 될 마음도 없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단어는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최초로 여기서 사용됩니다. 왜 굳이 아브람을 “히브리 사람”이라는 수식어로 부를까요? 그 말뜻이 답입니다. ‘건너온 사람’ 즉 이방인(異邦人) 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건너온 사람,  이방인입니다. 천국이 고향이지 가나안이 고향이 아닙니다. 그에게 가나안은 영원한 타향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힘(세력)을 기를 마음이 있는가요? 없는가요?  만약 여러분에게 세력이 있다면 그 힘을 어디에 시용하고 싶은가요? 저는 여러분들이 세력가가 되기를 꿈꾸기 바랍니다. 개인이 하면 ‘반대’이지만, 세력이 하면 ‘대안’이 되지 않습니까?  꿈이 있는 사람... 이루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은 세력을 모읍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우리는 천국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시지요? 천국운동은 반드시 힘을 합쳐야 하는 일입니다.  같이 해야 하는 일이 전도(傳道)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세력, 잘못된 흐름을 바꾸어 놓을 새로운 흐름, 영적인 흐름, 구원의 신령한 흐름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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