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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의 이유 (겔 12: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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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의 이유 (겔 12:21-28)


한 엄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엄마는 의사에게 아이가 내 말을 듣는 건지, 못 듣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청각 장애가 있는지 진찰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그 아이를 진찰한 후에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이 아이는 청각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엄마의 말을 들어도 듣지 않는 척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예언하는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도 그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에스겔 12장 2절을 보면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눈이 있어도 보려 하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 두 선지자는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내용을 예언했습니다. 그들이 예언한 대상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이미 바벨론에 포로 되어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포로 생활이 70년 동안 지속할 것이니 그곳에서 자리 잡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직 멸망하지 않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수년 내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 와서 멸망할 것이니 반항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 죄에 대한 형벌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했다고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매국노 취급하고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언어로만 전달한 것이 부족해서 두 가지 상징적인 행동으로 가시적인 메시지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는 낮에 이삿짐을 꾸려 밖에 내어 놓고 저녁에는 성벽에 구멍을 뚫고 어깨에 이삿짐을 메고 피난 가는 것처럼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포로 되어 끌려가는 신세가 될 것을 가시적인 행동으로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떨면서 식물을 먹고 근심하면서 물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마치 음식을 먹을 때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사는 사람처럼 떨면서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언어를 수반하고 상징적인 행동을 동반하여 예언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 모든 예언을 직접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보면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하는 너희의 속담이 어찜이뇨” 일부 거짓 선지자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가 하는 예언은 응험이 없는 예언이며 그 예언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절로 25절에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속담을 못하게 하고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는 있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13장에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엄한 심판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간접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을 듣기는 듣지만, 변명을 하고 예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말이 그의 보는 묵시는 여러 날 후의 일이라 그가 먼 때에 대하여 예언하는도다 하나니” 이 사람들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예언이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직도 먼 장래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간접부인의 반응입니다. 

사도행전 24장 25절을 보면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총독 벨릭스가 두려워하면서도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봐도 벨릭스가 바울을 불러 복음을 듣고 예수 믿었다는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복음도 일종의 예언입니다. 목사들이 선포하는 복음은 예언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천국 가고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은 장래 일을 말하는 예언입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은 복음을 직접적으로 부인합니다. 그리고 지옥 형벌을 스스로 자처합니다. 

성경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베스트셀러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마귀와 많은 사람이 공격해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정면으로 도전하고 직접적으로 부인합니다. 오늘은 이들보다는 조금 더 지혜롭지만, 복음을 간접적으로 부인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들은 복음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먼 장래 일이니 지금 신경 쓸 이유가 없고, 그것은 무덤을 넘어선 축복과 저주에 관한 일인데 내가 죽으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 시간만큼은 현세를 즐기고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입술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간접 부인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Ⅰ. 복음은 장래 일이긴 하나 그렇게 먼 장래 일은 아니다

 1. 에스겔은 B.C 592년에 예언했고, 그렇게 먼 장래 일은 아니다
 
에스겔이 예언할 때가 B.C 592년입니다. 예언을 시작한 지 1년 뒤에 에스겔 8장부터 12장까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주전 587년이었습니다. 불과 5년밖에 남지 않은 때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먼 장래 일이라 생각하고 우리와 관련이 없다고 반응했습니다. 
 
 2. 인생이 긴 것 같아도 무덤 너머의 일도 먼 장래 일은 아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시편 90편 10절에 보면 모세의 말대로 우리의 인생은 화살처럼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젊은 사람에게 80살이 먼 장래 일 같아도 80세 되신 분께는 중학생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다. 한 번은 70세 넘은 권사님을 위해 노년기가 축복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가 야단맞았습니다. 요즘은 중년이 길어져 80세까지가 중년이라고 합니다. 저도 49세에 담임 목사로 와서 벌써 58세가 되었습니다. 인생이 참으로 빠릅니다. 무덤이 먼 장래 일 같아도 그렇게 먼 장래 일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가 안개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0세까지 사신 분들은 인간의 수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위대한 성공자입니다. 옛날에는 인생 70은 고희로부터 희귀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무덤이라는 것은 먼 장래 일이라 생각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무덤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3. 솔로몬도 청년들을 향해 청년의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권면했다
 
전도자인 솔로몬은 청년들을 향해서 전도서 11장 9절로 12장 1절에 청년의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을 섬기려 해도 섬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드라마라고 보는 것이 수상한 삼 형제입니다. 경찰인 아버지가 귤 두 개를 얻어먹었다고 쫓겨났습니다. 집에서 하루 세끼 먹는 삼식이가 되었습니다. 밤참까지 먹으면 사식이가 됩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참으로 짧고 무덤도 먼 장래 같아도 가까운 장래에 불과합니다.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군중이 분노해서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분필을 가지고 자신들을 학대한 귀족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대문에 X자를 그렸습니다. X자는 내일이면 죽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술 마시고 춤추며 놀았습니다. 내일은 먼 장래 일이니 그 때 가서 생각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4. 예수님도 생각지 않을 때에 다가올 종말을 예비하라고 하였다
 
내일이든, 5년 후든, 50년 후든 남아 있는 시간이 긴 시간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2장 40절에 보면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죽음은 득달같이 다가옵니다. 무덤도 우리에게서 멀지 않습니다.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Ⅱ. 복음이 장래 일이긴 하나 현재 일의 연속일 뿐이다
 
 1. 에스겔도 이마에 인 맞은 자는 장래 형벌에서 면제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래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까? 현재에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8장과 9장을 보면 현재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을 위하여 탄식하고 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마에 표를 하여 장래 심판에서 건져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현재와 장래는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재 순종하는 사람은 장래의 심판이 면제되고 현재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장래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2. 죄는 병과 같다 

죄는 병과 같은 면이 있습니다. 지금 질병이 시작되고 있는 환자가 치료하지 않고 질병을 키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금 병을 고쳐야 장래에 병이 심각해지고, 죽음이 속히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죄 사함을 받아야 장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장래 일이긴 하나 현재의 연속입니다. 

 3.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현재도 하나님의 원수이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현재 하나님과 원수 상태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인데 미래의 원수가 될 것이 아니고 현재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과 화목되기 전에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입니다. 인간 원수도 많아서 살기 어려운데 하나님까지 원수가 된 인생이 어떻게 형통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입니까? 원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장래 일만은 아닙니다. 현재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사람은 장래에 불안한 사람이 아니라 현재에 불안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것을 장래 일로 미루시겠습니까? 
 
 4. 복음이 주는 현재적인 축복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복음이 주는 축복은 미래의 축복도 많지만, 현재의 축복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 순간 우리는 현재에 죄 사함 받고, 현재에 의롭다 함을 얻고, 현재에 성령 받고, 현재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현재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고, 현재에 하나님과 화목하고 강건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그 순간에 오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기를 거부하고 복음 받아들이는 것을 장래 일로 미루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되어 불안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을 장래 일로 미루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생을 살아도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Ⅲ. 복음은 진실로 장래 일에 관한 중요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예언은 장래 일이라도 확실성과 현실성이 있다
 
하나님의 예언과 점쟁이의 예언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점쟁이의 실현성 확률은 50%입니다. 누가 말해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은 100%입니다. 

본문 2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않을찌니 나의 한 말이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시간이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예언이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이처럼 확실성과 실현성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예언한 것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장래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현세의 장래와 내세의 장래가 있습니다. 

 2. 현재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현세의 장래도 밝다
 
자신의 장래가 밝은 것인가 어두울 것인가는 지금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밝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면 어둡습니다. 지금까지 캄캄했다고 할지라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면 장래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잠언 23장 17절로 18절에는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정녕히 장래가 있을 것이며 소망이 끊어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고 자식 죽고 남게 되었던 나오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장래는 항상 밝다는 것을 믿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악인들도 잠시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말이나 부정부패로 부자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24장 20절을 보면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지속성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형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상 숭배하고, 부모를 괴롭히고, 바람피우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경우 보셨습니까? 잠깐은 잘 될지 모르지만 지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정직하고, 부모 공경하고, 부부간에 정절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잘 됩니다. 예수 믿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현세의 장래도 밝습니다. 
 
 3. 현재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내세의 장래도 밝다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사도 바울처럼 빌립보서 1장 23절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기를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심판의 날이 와도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 33절, 34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심판의 날이 되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고 송사할 자도 없고 정죄할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누릴 내세의 영광은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갈 내세의 영광은 사람이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린 영광은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내세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큰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천국에 갔더니 하수구 막는 보도블록 왜 가지고 왔느냐고 베드로가 말했다는 확인이 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현세의 장래도 잘 되고, 내세의 장래도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결론
 
복음을 장래 일이라 말하고 장래로 미루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복음이 장래 일이긴 하지만 현재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며, 은혜 받을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캄캄했을지라도 앞으로는 광명한 인생을 맞이할 분은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간다면 현재의 장래도 밝은 것이며 내세의 장래도 영광스러운 장래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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