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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된 화목을 누리며 (고후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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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된 화목을 누리며 (고후 5"2)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과 우리에게 가르침이 된 모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회복’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화목’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결국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불화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화목을 복원할 수 없는 인간들의 인생의 모든 비극이 빚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사랑하는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난과 섬김의 생애를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피 묻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다시 화목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현재에 누리는 화목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루어진 화목은 원리적으로는 영원하며 불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화목을 현재 우리가 누리면서 사는가 입니다. 어제는 하나님과 화목했는데 오늘은 그 화목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갈 수 있고 작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적인 사랑을 누리면서 살았는데, 올해는 아주 메마른 상태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인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은 사람들이 불신자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었음을 주목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전체를 불신자라고 생각하고 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세워질 때 얼마나 커다란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을 겪었습니까? 아덴에서 인간의 변론과 철학으로 전도하려다가 성과를 거의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선교적인 패배를 경험하고 견딜 수 없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고 돌아온 것입니다. 말로는 아덴의 많은 철학자들을 굴복시켰지만 그들에게 하나님과 화해의 살 길을 열어 주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만이 하나님을 등진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킬 수 있다는 분명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는 역사 속에서 놀랍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정말로 은혜와 은사가 충만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지금 그랬던 교회를 향해서 화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발점 이후의 삶

문제는 언제나 신자가 되풀이하는 실패에 있습니다. 복음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었는데 성화의 삶에서 너무 태만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그릇된 안정감이 주는 교만도 작용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때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끊임없이 세우고,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구속의 은혜를 통한 화목을 성화의 노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기 전에 행했던 더러운 악과, 도시에 있는 사악한 영향력들이 한순간에 물밀듯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삶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고린도 지방은 항구도시였습니다. 물자가 많고 무역이 활발했기 때문에, 물질을 사랑하는 정신이 교회 안까지 밀려들어왔습니다. 철학적인 주장에 따라서 편을 갈랐고, 성적으로도 문란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 간에 사랑이 없어졌습니다. 이를 볼 때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 전서 13장을 들어야했던 이유가 그들의 특권이었다기보다는 사랑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보다도 큰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구원하셨는데, 왜 우리가 보는 현실과 마음은 타락한 도시와 같을까?’ 그러나 사도는 그것이 이상할 게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진노 아래 살아가던 종의 신분에서 변화되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삶은 회심과 중생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렇게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의 품안에서 살아가는 행복,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풍성한 기업들을 누리면서 사는 진정한 신앙의 행복은 거룩한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유혹과 싸우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고, 마음을 지키고, 진리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서 영혼의 더러움들을 씻어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가득 차서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려는 성화의 분투 없이는 누구도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경험도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고 나서도 교인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교회생활을 해나가는 것 자체에 대해 한없는 무거움을 느낄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참회를 하고 나서는 누구도 대신 져줄 수 없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날마다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순간 유혹을 이기고, 시험을 경계하며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지배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나님을 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삶’입니다.

분투하는 자들의 고백

주님이 늘 내 마음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고백은 부단한 성화의 삶 가운데 부패한 자신의 본성과 싸우는 노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주의하게 살아서도 절대 태만하게 살아서도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거룩함이 없이 행복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난 후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십자가는 자기를 지키지 않고는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만큼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위에 적은 힘이나마 주님의 세워주신 자리에 굳게 서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온전히 누려야 합니다. 맡은 사명이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주님이 세워주셨기 때문에 주께 하듯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성도의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그 은혜의 복음의 도를 배반하지 아니하고 한번 경험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림으로써 더욱 견고해져서 척박한 이 땅에 거목과 같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그늘 아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떻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화목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지를 알려주었으면…….’하는 대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말입니다.

신앙을 배운 사람들은 그 시대의 정신과 싸우고 예수 안에 있는 충만한 사랑의 은혜를 누리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은 하루하루의 연속입니다. 미래에 주님을 위해서 영광스럽게 헌신할 꿈을 꾸면서 오늘 태만하게 사는 것은 몽상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내가 수많은 꿈을 꾸고 있어도 하나님이 내일 나를 데리고 가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날은 하루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주님을 향한 신뢰, 경건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사십시오. 날마다 성실하게 자기를 살피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고, 열렬한 기도로 매일의 삶을 승리로 이어가는 아름다운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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