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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험악한 세월, 은혜의 삶 (창 4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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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악한 세월, 은혜의 삶 (창 47:1-12)


오늘 본문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서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 야곱이 그의 다른 아들들과 함께 이집트에 와서 이집트 왕 바로를 접견한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며 총애하던 바로는 그의 부친 야곱을 반갑게 맞으며 그의 나이를 물었습니다(본문 8절). 그때 야곱은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본문 9절) 했습니다. 그가 산 백삼십 년은 덧없이 지나간 험악한 세월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바로 앞에서 겸양의 모습을 보여야 했을 것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말 속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의 깊은 삶의 탄식이 서려 있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래 조용한 사람(창25:27)으로 태어난 야곱은 어려서부터 아니 엄마의 태중에서부터 들짐승같이 건장하고 활달한 쌍둥이 형 에서와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피곤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 인생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엄마 태에서 나올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창25:22-26).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은 받고 있었지만 아버지 이삭의 사랑은 형 에서에게 다 빼앗기고 있었습니다(창25:28). 

어머니의 사랑도 어쩌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데 대한 보상의 성격이 컸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그가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피곤했을 때를 이용해 팥죽 한 그릇을 그에게 주는 대신 장자의 명분을 자기에게 팔게 한 야곱(창25:29-33)을 악랄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자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쉽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랐으면 그랬을까 하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훗날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맏아들 에서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야곱이 에서로 변장을 하고 아버지의 눈을 속여 장자가 받을 축복을 다 받아 훔친 일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창27:1-40). 

아무튼 장자로서 자기가 받을 아버지의 축복을 아우에게 다 도둑질당한 에서는 분노로 가득 차 야곱을 증오하며 아버지만 세상을 떠나면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창27:41). 이 사실을 안 야곱은 그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그를 멀리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그녀의 오라버니 즉 야곱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라반에게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먼 땅 하란으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창27:42-45). 야곱의 험악한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에게로 간 야곱은 거기서 그의 두 딸 중 작은 딸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아내로 얻기 위해 칠 년을 며칠 같이 일했습니다(창29:16-20). 그런데 칠년의 노동 끝에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은 줄로 알고 첫 날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 밤을 같이 지낸 여인은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교활한 외삼촌 라반이 동생만큼 예쁘지 않고 시력마저 나쁜 큰 딸 레아를 먼저 시집보내려고 속임수를 쓴 것입니다. 

기가 막힌 야곱은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습니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된 일입니까?” 울부짖으며 항변했지만 라반은 말하기를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않는 바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기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레아와의 칠일 간의 혼사를 다 치르고 그녀를 아내로 맞으면 그때 라헬도 아내로 줄 것인데 그 대신 또 칠 년 간 자기를 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창29:21-30). 

야곱은 레아와 라헬 두 자매를 아내로 맞았을 뿐 아니라 그녀들의 요구로 그녀들의 몸종인 실바와 빌하까지도 아내로 맞아야 했습니다. 아들들을 낳기 위한 경쟁 때문이었습니다. 네 아내와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로 야기된 문제들은 야곱에게 많은 갈등을 안겨주었지만 어쨌든 야곱은 열두 아들과 디나라는 딸 하나를 두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을 위하여 이십 년 동안 힘을 다하여 일했습니다. 낮에는 더위와 싸우며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양을 치다가 맹수에 물려 찢기거나 낮에든 밤에든 도둑을 맞으면 자기 것으로 보충해 가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했지만 외삼촌은 야곱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는 등 야곱 가족의 재산을 모두 착취했습니다(창31:6-7, 15-16, 38-40). 거느려야 할 식구들은 늘어나는데 외삼촌에게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자기 자신의 재산을 모을 수 없으리라 판단한 야곱은 자기의 모든 식구들을 거느리고 외삼촌 라반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을 형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형과 화해하기까지는 피를 말리는 깊은 불안과 번뇌의 기간을 지내야 했습니다. 밤을 새며 하나님과 겨루다가 허벅지 관절을 얻어맞고 다리를 절게 되는 것과 같은 얍복 나루터의 처절한 고뇌를 겪고서야(창32:24-32) 유혈의 충돌이 없는 형과의 재회가 이루어진 것입니다(창33:1-12). 

그러나 야곱의 삶은 그때부터 더욱 험악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레아가 낳은 딸 디나가 가나안 땅 이방 족속의 추장 세겜이란 자에게 끌려가 강간을 당한 것입니다(창34:1-2).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을 찾아와 어차피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그들을 혼인시키고 두 족속이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이동생 디나가 당한 일에 분격한 오빠들 즉 야곱의 몇 아들들은 속임수를 썼습니다. 즉 세겜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통혼을 해서 한 민족이 되어 같이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는 안 된다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그 말을 좋게 여기고 지체 없이 그대로 행했습니다. 

하몰과 세겜은 성문 앞에 서서 출입하는 모든 자에게 말해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받은 모든 사람들이 상처가 낫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칼을 가지고 기습해서 그들을 다 죽이고 디나를 되찾아 올 뿐 아니라 그들의 재물과 아내들까지 다 빼앗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일로 해서 야곱은 그곳 가나안 주민들에게서 “악취나는 사람”이 되게 된 것이었습니다(창34:6-30). 

그러나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험악한 순간은 아마도 그의 열두 아들 중 가장 사랑했던 요셉을 잃었을 때일 것입니다. 네 아내 중 유일하게 참으로 사랑했고 처음부터 사랑했던 라헬이 오래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뒤늦게 난 아들이었으며 야곱 자신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에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해서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창37:3-4). 

요셉에 대한 야곱의 각별한 사랑은 당연히 다른 아들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질투와 미움 끝에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입었던 채색옷을 벗겨서 숫염소의 피를 적셔 가지고 아버지 야곱에게 갖다 보인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야곱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야곱의 슬픔과 비통함을 창37:33-35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아들 따라 같이 죽고 싶을 만큼 슬퍼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이런 험악한 일을 다 당하는구나.” 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겪은 험악한 일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온 천하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집트에도 흉년이 들기 시작했지만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이집트는 앞섰던 칠년 간의 풍년 동안 곡물을 잘 저장하여 두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에는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야곱이 아들들을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막내이며 죽은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하나 남은 아들이고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온 줄 알게 된 요셉은 자기의 동생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에 연극을 꾸몄습니다. 그 긴 연극이야기는 창세기 42장부터 45장 사이에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아직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자기들이 옛날에 팔아먹은 자기들의 아우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요셉이 그의 형들을 정탐꾼들로 몰아서 삼 일 간 가두었다가 나중에는 한 사람만 옥에 가두고 다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정탐꾼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이번에 이집트로 내려오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막내 동생을 다음에 데려와야 다 풀어주어 돌려보내겠다고 한 것입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하자 야곱은 요셉을 잃었는데 그 아우마저 잃게 하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며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창42:14-38). 그러나 기근이 갈수록 심해지고 양식을 구하러 다시 이집트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야곱은 베냐민을 다른 아들들과 함께 이집트로 보내게 됩니다(창43:1-15). 이때의 야곱은 형들에 손에 이끌려 이집트로 가는 베냐민을 찢어지는 심정으로 지켜보며 아마도 이렇게 되뇌었을 것입니다: “이 험악한 세상 내가 너무 오래 살았구나.” 

그러나 야곱의 삶은 사실은 바로 앞에서 그가 말했듯 험악한 세월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은 험악했을지 몰라도 끝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바로의 면전에 섰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광영이었습니다. 바로의 절대적 신임과 총애를 받는 총리대신의 아버지였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아니 그보다, 그 이전에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그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그 소식 하나만으로도 그때까지의 험악한 세월이 다 보상되고도 남을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천하대국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 또 잃을까 걱정하던 베냐민도 살리고 볼모로 잡혀있던 아들도 살리고 기근에 시달리던 온 가족들 다 살게 되고 바로의 초청으로 그가 보내준 수레를 타고 그가 보낸 길양식을 먹으며 이집트로 가서 가장 기름진 땅을 하사받아 번성하며 살게 된 것은(창45:17-21, 46:1-7) 숨이 막힐 정도로 복된 반전의 역사인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백삼십 년의 세월이라는 험악한 나그네 길을 보냈다고 술회했지만 그 이후로 그간 산 삶은 평안하고 영광스럽고 복되기 그지없는 삶이었습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 요셉은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사십 일 걸려 향으로 처리하게 하였으며 애굽 사람들이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애곡하였습니다(창50:2-3). 
애곡하는 기한이 지나자 요셉은 바로의 허락을 얻어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에 장사하러 올라갔습니다(창50:4-6). 그때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병거와 기병이 심히 큰 떼를 지어 요셉을 따라 올라갔습니다(창50:7-9). 이것은 가히 바로의 장례식에서나 볼 수 있을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장례의 의식과 행렬이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험악한 세월이 어떻게 이런 놀랍게 복된 삶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곱이 지녔던 그 숱한 약점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복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가 인간적으로 약해지고 곤고해질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그를 붙잡고 죽기로 매달리며 그의 은혜를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험악하게 그를 가슴 아프게 하며 그에게서 사라졌던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시고 야곱과 그의 온 자손을 극심한 기근에서 다 살리실 뿐 아니라 이집트에서 감격스런 재상봉을 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요셉의 입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창45:5, 7-8, 50:20). 하나님 안에서는 그 아무리 험악한 세월도 다 은혜의 삶으로 변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광복 65주년 기념일입니다. 35년간의 일제의 강점기를 합치면 최근 100년의 우리의 역사 중 첫 대부분은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험악한 세월을 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65세 이상 되신 분들은 모두 일본제국에 의해 나라를 강탈당한 때에 태어났습니다. 국치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65년 전 광복을 맞았지만 남북분단과 가족이산과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잿더미 위에서 가난과 질병과 싸워야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장 가난한 나라, 희망이 없는 나라로 보였던 대한민국이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지구상의 가장 성공적인 나라로 우뚝 섰습니다. 가장 험악한 세월을 산 이 민족이 지금 행복한 민족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험악한 세월을 은혜의 삶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한 모델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에 바른 믿음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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