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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신 못 차리는 요나 (욘 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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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못 차리는 요나 (욘 4:5-11)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어디를 가고 있습니까?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끝날 때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외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세울 때도 있고 헐 때도 있습니다.  천하의 범사에 기한이 있습니다.  천하의 범사에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나를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드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 사명을 붙잡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 사명을 붙잡는 자는 세상 속에서 존귀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대한 사명과 꿈이 있는 사람은 어느 날인가 만들어집니다.  아무리 위대한 가정에서 태어나도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날인가 내가 깨닫지 못한 위대한 삶을 붙들고 내게 주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위대한 원칙을 붙들면 그때부터 위대한 삶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확고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확고한 목표를 갖지 못한 영혼은 자멸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이 땅에 왔다고 하는 꿈을 가지셔야 합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아무리 세상이 어렵다고 해도 다시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이 없으면 방자해 집니다.  꿈이 없으면 망합니다.  꿈이 없으면 방황합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낭비일 뿐입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은 마치 생명의 젖줄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사모하는 마음을 붙들고 웃을 수 있을 때 웃으십시오.  울 때 마음껏 우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그 영혼의 깊은 곳에서 샘같이 솟아나는 눈물은 우리가 쉽게 살 수 없는 젖줄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영적 자산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못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한 생명을 바라볼 때 제일 불쌍한 사람은 짧은 이 귀한 인생을 원망과 불평만으로 그 남은 인생을 더 짧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능히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의 자리에 온전히 서지를 못합니다.  결코 길지도 않은 인생을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이리 저리 피하다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제대로 한 번 세움을 받지도 못합니다.  이런 사람을 볼 때 목회자인 저는 참으로 가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자신을 세우는 일에 생명을 거십시오.  우리가 남을 세우는 일도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우고 일꾼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사명자로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지금은 내 육체적인 것이 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그 시대에 헌신할 수 있는 자로 세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음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육체적인 부족이나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사명자로 자신을 세워 가는 일에 생명을 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신명기 28장에 약속하신 축복의 새로운 시대가 나를 통하여 나타나는 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역사적인 사명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고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최우선적인 관심과 사명은 생명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사단에게 빼앗긴 잃어버린 하나님의 가족들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나 신앙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 있는 시대에는 영적인 일에 무관심해 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수단이 되어 있는 사람, 그래서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구경꾼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 구경꾼은 언제나 불평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본문의 요나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주전 9세기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인한 침략과 포악한 심성, 거기에다 우상숭배와 배금주의, 육체적인 향락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선지자 요나를 불러서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요청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불순종하여 니느웨와는 반대쪽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께서 큰 폭풍을 일으켜서 요나는 마침내 물고기 뱃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삼일동안 처절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사십일 후에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외친 그 짧은 다섯 마디 말에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 앞에서 요나는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은 상황은 결코 요나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그의 말대로 니느웨 성이 완전히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성과 백성들을 용서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요나는 화를 내면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불평은 단순히 불평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평은 그가 하고 있는 그 일에서 손을 놓게 만듭니다.  그래서 불평은 그 상황에서 물러나 구경꾼의 자리에로 서게 만듭니다.  이것이 요나가 취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망하지 않으니까 화를 내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5절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는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성 동편 언덕에 올라가서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는 언덕에 앉아서 망하지 않는 니느웨 성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전혀 씨가 먹혀들지 않는 요나,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불평하고 있는 요나, 그 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요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십니다.  그 못난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생떼를 부리고 있는 요나의 비뚤어진 인간됨을 깨닫게 하시고자 그를 삶의 교육현장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러면, 구경꾼의 자리에 앉아서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불평하고 있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삶의 교육현장이 무엇입니까?
본문 6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때마침 하늘에서는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태양이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요나의 머리에 내려 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박넝쿨 하나를 무럭무럭 자라게 하더니 태양을 차단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불평하며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동풍을 '시로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열풍이 불면 기온이 급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 대낮의 기온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 동풍은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신경을 날카롭게 합니다.  그리고 동풍이 불면 초목은 메말라 버립니다.  이런 기후적인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요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박넝쿨은 우리 나라의 호박 넝쿨이나 박넝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학명으로 보면 '팜크리스트'라고 되어 있고, 히브리 사람들은 '키카욘' 이라고 부릅니다.  심기만 하면 며칠 내에 3m 정도로 물씬 자랍니다.  잎사귀가 크기 때문에 그늘을 쉽게 만들어 줍니다.  한 번 잎이 나오면 2-3일 정도 피어 있다가 시들어 버리는 그런 나무입니다.

요나는 이 박넝쿨로 인하여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벌레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줄기를 갉아먹었습니다.  그리고 동풍이 불어오더니 그렇게 잎이 무성하던 박넝쿨이 그만 먼지처럼 바짝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또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불평하는 요나를 향하여 하나님이 묻습니다.
"요나야, 그 박넝쿨을 네가 심었냐?  네가 자라게 했느냐?  네가 그 박넝쿨 하나를 그렇게 아끼면서 내가 만든 니느웨 성의 수많은 사람들, 12만여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실 앞에서 불평하면서 구경꾼의 자리에 앉아있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박넝쿨과 벌레를 준비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박넝쿨을 바라보면서 좀 깨달아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요나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는 오래 전 이 땅에 살다간 한 신앙인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요나는 여기 서 있는 요놈의 나, 요-나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오늘 나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오늘 이 땅의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오늘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요나를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요나를 읽어보면 한 번도 요나가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면 당연히 기뻐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도망을 가면서 기뻐했겠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기뻐했겠습니까?  모래 바닥에 토해져서 살이 삭아진 모습을 부둥켜안고 기뻐했겠습니까?  심지어 삼일 길을 걸으며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가 기뻐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랬던 요나가 마지막 장에 와서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느웨 성이 멸망하기를 기대하면서 동편 언덕에 올라가 있을 때에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 때문에 몹시도 불평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박넝쿨 하나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나는 그 박넝쿨 때문에 기뻐합니다.  아주 크게 기뻐했다고 요나서 전체에서 꼭 한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만약에 요나가 지금 제 곁에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요나! 당신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당신은 무엇으로 인해서 기쁨을 얻었습니까?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했습니까?
당신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도 요나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만 12만명이었다고 하니까 학자들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인구가 거의 줄잡아 100만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도시의 구원입니다.  성경에서는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와도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잔치가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지금 커다란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대 최대의 도시가 주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는 이 엄청난 역사 앞에서도 요나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랬던 요나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박넝쿨 하나를 보고 그토록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요나입니다.  그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우선 순위의 정체성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이런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을 보고 기뻐해야 될 것인가?  무엇을 보고 슬퍼해야 될 것인가?  어느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웃어야 하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울어야 할 것인가?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면 우리의 삶에서 기쁨과 행복의 기준에 대한 정체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영적인 침체가 오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마땅히 기뻐해야 될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둘째는, 싫어해야 할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셋째는, Yes하고 순종해야 할 때 순종하지 못하고, No하고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않는다.  넷째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헛된 것을 붙들고 거기다 생명을 걸고 살아간다.  따라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사랑이 식어진다.  마음에 작은 상처도 치료가 되지 않는다.  사역에 시험이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환경 속에서만 기쁨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물론 때로는 환경이 우리들에게 기쁨을 줄 때도 있습니다.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녀가 나에게 기쁨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 속에서만 기쁨을 찾는다면 한 영혼이 돌아와 구원받는 것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환경 속에서만 기쁨을 찾는다면 말씀에 부딪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기도할 때마다 부어주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앞에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조금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감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저 한끼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것에 행복해 하며 기뻐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지극히 잘못된 행동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의 참된 기쁨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이 행복해 하실 때에 그 자리에 나의 행복이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보십시오.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큰 폭풍을 준비하셨습니다.  폭풍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요나를 이제는 굴종이라도 하게 하시려고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생명을 사랑하시고 계신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요나를 깨닫게 하고자 이번에는 벌레도 준비하셨고,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본문 4장 1절에 보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요나를 화나게 만들었습니까?  "사십일 후에 멸망할 것이요"  내가 곧 멸망한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니느웨는 당연히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니느웨 성에 엄청난 부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니느웨 성을 축복하셨습니다.  요나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싫어하고 화를 냈다고 말합니다.

2절에 보면, 요나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면 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용서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나님 때문에 내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졌습니다.  내가 선포했던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신의 변덕스러움 때문에 내가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한 마디로 말해서 요나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자기만 공연히 미친 소리하고 다닌 꼴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말은 헛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넋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내 생각과 하나님의 명령이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경험과 이해가 교회의 공동체의 방향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우리는 내 자존심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 개인적인 경험과 이해보다 교회 공동체의 선을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어떤 개인의 자존심이 백성의 구원보다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도 개인의 자존심이 짓밟혀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자존심이 공동체의 선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내 자존심이 상할지언정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받아야 옳은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좀 손해를 보고 속상한 일들이 있고, 내 자존심이 상처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영혼들은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진정한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무엇을 손해보았고, 어떤 상처를 받아보았으며, 무엇을 빼앗겨 보았는가?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가 천국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빼앗겼습니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내 명예가 추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가 침범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천하 보다 귀한 한 영혼의 가치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요나 1장부터 4장까지의 마지막 결론은 오늘 본문 4장 10절과 11절입니다.  10절은 요나의 가치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야, 네가 심었냐?"  "요나야, 네가 재배했냐?"  "네가 아꼈거든."  너 너 너, 요나의 가치관은 철저하게 박넝쿨 중심의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11절에서는 하나님의 가치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내 가치관은 생명의 가치관이다.  내 가치관은 영혼의 가치관이다.  보십시오.  10절과 11절은 요나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이 아주 철저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나야, 네 생각도 중요하겠지.  네 정서도 중요할거야.  물론 네 느낌도 소중하겠지.  그리고 네 신념도 중요할 것이고.  그러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나 하나님 여호와, 너를 창조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온 우주의 운행자가 되는 나 여호와가 무엇 때문에 행복해 하고, 무엇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내 가치관이 박넝쿨에 머무는 한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내 재산을 증식시키고, 내 건강을 관리하고, 내 지위를 보전하고, 내 명예를 조금 더 높여 가는 것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눈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 내 온갖 관심이 박넝쿨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눈이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보고 살아갈 때 잃어버리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환경을 통해서 분복을 누리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환경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약속하신 복들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빠져서 매몰되어 살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학교에 한 반이 중간고사에서 꼴찌를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화가 난 모양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공부를 안 할 수 있느냐?  50점 이하는 전부다 밖에 나가서 손들고 서 있어."
맹구란 아이가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나는 50점인데 어떻게 할까요?"
"문틀에 끼어 서 있어."

사랑하는 여러분, 중간지대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가치관 50, 하나님 나라 가치관 50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 구하느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진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먼저 구할 것인가?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길 것인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내 눈이 박넝쿨에 가려서 섬기고 구원해야 할 이웃을 볼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7절처럼 벌레를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박넝쿨의 가치관에 가려서 하나님의 소중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면 동풍이 불어서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마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한 번에 훅∼ 불어 버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나도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들을 나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달 가까이 요나를 살펴본 이유가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로서 가치관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선지서는 선지자가 백성들을 꾸짖고 달래고 바꾸어 가는 이야기라면, 유독 요나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를 바꾸기 위해서 애쓰시는 절절한 사랑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될 선지자가 뭇 사람들로부터 꾸중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 1장에 보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될 요나가 선장의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리고 시궁창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건져내야 될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으로부터 책망 받는 요나로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아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적인 가치는 분명합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본국에 들어가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듣던 수많은 신학생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면접을 하면서 이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저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테일러가 말합니다.  "다 소중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선교사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때 신학생들이 묻습니다.  "선교사님,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거든요.  오직 사랑 때문에."

우리 나라 어떤 선교사님은 옷을 입지 않고 사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들을 사랑하니 같이 벗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 자존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벗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의 주변에서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 땅에 환경과 조건 때문에 울고 웃는 인생이 되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보람 때문에 울기를 원합니다.  그 행복 때문에 웃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내가 가장 아끼는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것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4장 11절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나는 끝입니다.  그 다음에 요나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결론이 없습니다.  결론은 두 가지가 가능할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아끼고, 자신의 자존심이 손해 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교사가 되어서 잘 살았다.  그렇게 결론이 내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요나는 원래 싸가지가 없는 인간이라 5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충성하면서 살다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갔다.

5장이 없습니다.  4장의 결론 없는 미완성교향곡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나 5장은 저와 여러분이 기록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요나 5장은 우리 각자가 기록한 내용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여전히 불평하면서 구경꾼의 자리에 앉아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나도 아끼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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