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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는 세상, 오는 세상 (마 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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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상, 오는 세상 (마 6:19-34)


본문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말미암아 기쁨과 복을 얻은 사람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이 바로 오는 세상적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본문 6장 19절부터는 이 땅에 대한 염려와 근심을 버리고 오직 하늘의 것들에 마음을 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바로 본문 6장 33절에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하신 것입니다. 
가는 세상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오는 세상은 이 땅의 삶을 끝내고 돌아갈 영원한 하늘나라입니다. 

Ⅰ. 가는 세상적 삶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자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실천적, 행동적으로는 무신론자와 같은 삶을 사는 실천적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무신론자는 하나님 자체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자는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생활 가운데서 잊는 자인데 그 고백 자체가 거짓된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자와 같은 생활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천적 생활을 못하는 무신론자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면서도 생활로 실천하지 아니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들에 대한 반론적 교훈입니다. 곧,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생활하는 자들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1)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을 염려하는 자입니다. 
본문 6장 25절에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라고 했습니다. 

여기 '목숨'은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킵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를 들어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 6장 26절에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인간을 새들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2) 목숨을 위하여 입을 것을 염려하는 자입니다. 
본문 6장 25절에 『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6장 28-30절에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했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목숨이 의복보다 중한 것입니다. 음식은 생명체의 생존에 필요한 소모품(consumption)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음식이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목숨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처럼 집착해서 염려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신다는 반론적 교훈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목숨과 몸을 주셨는데, 몸에 필요한 음식물과 입을 것을 당연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우 폴로 말론 휘마스, )의 '하물며'라는 접속부사와 함께 이 말을 직역하면 '더군다나 더 많지 않겠느냐'입니다. 

이 말을 의역하면 '항차(沆且)더 많이 입히시지 않겠느냐'입니다. 따라서 의, 식, 주를 염려하는 것은 인간들이 집착해서는 안될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사치는 의식주에 있는 것입니다. 사치(奢侈)의 사전적 의미는 '신분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치례함'이라는 뜻입니다. 인간들의 삶의 수단 자체를 통시적 안목으로 말하면 의, 식, 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 식, 주에 따라 신분의 고하를 가늠하는 세속적 시각에 주눅 들거나 쫓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Ⅱ. 오는 세상적 삶입니다. 

본문 6장 33-34절에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하는 삶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라' 는 말입니다. 
『 염려하지 말라 』는 부정적인 명령에 대응되는 긍정적인 명령문입니다. 『 그의 나라 』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종말론적으로 이 세상은 가는(pass away)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가오고 있는(Comming) 하나님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건설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마치 농부가 씨를 뿌려 놓고 기다리듯이 인내하며 기다려야만 하는 나라입니다. 
마가복음 4장 26절에 『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전히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5-16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동역자들입니다. 

골로새서 4장 11절에 『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 『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침노해야 빼앗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의입니다. 
『 그의 의 』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 15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2절에 『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의를 행해야 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9절에 『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주리고 목말랐습니다(마 5:6, 10).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의식주를 위해 염려하는 이방인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종말론적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며 그의 의로우심을 행동으로 반영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최우선 관심사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필요한 의식주를 덤으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에 『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땅의 것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체념하는 자세를 본문에서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구하는 우리의 방식을 교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신론적 방식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주(主) 안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명령입니다. 오는 세상과 가는 세상 모두와 관련해서 주어진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집중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다른 물건들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 너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 더하시리라 』에서 『 그리하면 』의 조건이 붙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경건한 삶이 이 세상 삶에 대해서도 약속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경건한 삶을 추구해야 할 이유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견한 삶에 대해서 다가올 미래적 가치에 대한 약속이 보장 되어있다는 것이 그보다 더 나은 이유입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우리에게 땅의 것들을 공로로 지불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단어는 보상이나 지불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물질들은 작은 댓가의 표시에 불과한 보너스 정도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것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늘의 것,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늘의 것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했습니다. 
벵겔(Bengel)은 하늘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이 땅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을 때에 이 땅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회복되면 모든 것이 다 충족된다는 말입니다. 이 땅의 모든 즐거움을 잃어버려도 괜찮을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노래 가운데 "내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긴데도 주 뜻만 이루어지면 더 원할 것 없다"는 가사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수고할 만한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의의이자 존재 목적이라고 할 때 이 땅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그것을 사지 않겠습니까? 
『 더하신다 』는 것은 땅의 것이니 작은 것입니다.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는 작은 것으로 부르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이 덤으로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족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세상의 축복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분명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Ⅲ. 오는 세상적 삶에는 미래의 짐을 지지 않습니다. 

본문 6장 34절에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고 했습니다. 
『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란 말씀은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염려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의 뜻은 (해 가르 아유리온 메림네데이 헤 아우테스, - )그 내일은 그 스스로가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일은 내일 가서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미래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내일의 시간의 주인도, 내일의 공간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날의 괴로움을 족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지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에 『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 인격이 진보를 가져 올 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과연 고난을 즐거워 할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고난에 대해 고민하다가 망하게 되지만 오는 세상의 사람들은 그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고 했습니다. 

시세로(Cicero)는 말하기를 "오래 살려면 천천히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민하지 않고 걱정이나 긴장하지 말고 살아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으니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며 매일의 삶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고 말해야 합니다(눅 10: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유한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천문학자, 인문학자, 동물학자, 식물학자, 유전공학자, 사회복지학자, 심지어 교육학자,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종말과 함께 인류의 종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와 종말을 주제로 한 모든 작품들은 가장 깊이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이 되고 있습니다. 

처음 창조는 새 하늘 새 땅의 새로운 건설을 위해 약속대로 집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사정에 의해 자신의 계획을 추호(秋毫)의 유예(猶豫)도 허락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가는 이 세상에서 삶이 철저한 사람은 오는 저 세상의 사람입니다. 오는 (저)세상은 가는 (이)세상의 실적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은 이 세상의 기록들의 세상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라고 했습니다. 
가는 (이)세상의 삶이 가는 (이)세상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는 (이)세상의 삶의 기록을 오는 (저)세상에서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가는 (이)세상에서의 삶의 환경과 형편은 기록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행한 것만 기록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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