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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여호와 삼마 (겔 48: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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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삼마 (겔 48:30-35)


(겔48:30-35)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라.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동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서편도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1. 오늘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 36년으로부터 해방된 지 65주년이 되는 광복 기념 주일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한일 강제 합병은 1895년에 일어난 민비 살해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프레데릭 맥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에 기록된 명성황후 민비 살해 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조선 공사 미우라 코로오는 직업 청부 깡패 둘을 은밀히 불러 거사를 지시했습니다. 두 깡패 아다찌 겐조와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불량배 24명을 모아 살해 행동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에 대항하는 민비 살해를 위해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쯤, 왕비의 침소로 뛰어들었습니다. 살해조 조장인 일본군 오카모도 류노스케가 한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끼면서 왕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부인하면서 몸을 홱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며 낭하로 도망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세자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르자 살해조가 민비를 덮쳤습니다. 여러 명이 쓰러진 작은 여인을 난자했습니다. 칼에 피가 튀었습니다. 살해조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왕비를 이불에 둘둘 말아 멀지 않은 정원 마당으로 옮겨 그 위에 석유를 붓고 준비한 나무를 주위에 쌓았습니다. 타오르는 불에 계속 석유를 부어댔습니다. “모든 것이 다 타고, 그리고는 몇 조각의 뼈만 남았다.” 기울어 가는 나라, 그 슬픈 나라의 ‘국모’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민비가 살해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고종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밖에 기독교인 누구 없느냐!” 기독교는 그 때 그 가련한 왕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위기의 때에 왕은 기독교가 필요했습니다. 고종을 비롯해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은 기독교를 통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기독교를 ‘어렵고 위험한 때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보았던 것입니다. 

일본의 패망 직전 상황에 대한 역사 기록 중 하나입니다. 조선 총독부 총독 미나미, 그 후임자 고이소, 아베 모두가 일제 당시 조선 교회를 완전히 해체하여 일본 교단 산하에 두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자들을 모조리 투옥했지만 오히려 불안을 감추지 못했던 것을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패전 직전 “미군이 필리핀을 함락시켰을 때 일본군 지도자는 미.소가 조선에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조선인 기독교인이 거기에 협력할 것을 두려워하여 1945년 8월 중순경 조선인 기독교인을 모두 살해하도록 본격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고 블레어(W.N.Blair)는 기록했으며, 마펫은 그 처형이 8월 1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총독부는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40만의 군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교도들입니다.”는 보고를 받고 이들을 살해할 계획을 수립, 진행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본 패망 직전 대량학살 당할 위기에서 하나님의 이 나라 역사에 대한 개입이 없었던들 이 땅에 40만 기독교인들은 8월 18일 몰살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데는, 그리고 조선의 광복, 해방을 위해서는 단지 폭탄 두 발로 충분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에 약 4톤의 원자폭탄을 실은 B29 폭격기가 일본의 히로시마를 조준했습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첫 번째 원폭으로 히로시마의 인구는 약 44만명 중, 6만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압력파로 인하여 투하지점 1Km 내외에 있던 사람들의 86%가 즉사한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실로 처참했습니다. 방사능에 의해 살갖이 벗겨졌고 내장기관이 녹아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약 5km 범위에서 섬광을 본 사람들은 모두 눈에 화상을 입고 실명했습니다. 암이 희생자들에게 발병해서 히로시마의 암환자가 2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가사키(당시 인구 30만 명)에 투하된 두 번째 폭탄 역시 4만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이 당시 두 도시에 징병과 징용 등으로 강제 또는 반강제로 끌려와 살았던 조선인이 7만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원폭 당시 4만 명이 죽었고 3만 명이 살아남았으나 대부분이 원폭피해로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능력마저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 당시 우리나라는 물자,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수탈을 당한 상태에서 도저히 스스로는 독립하거나 국권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 없었던들 우리는 나라 해방이라는 광복은 누릴 수 없었습니다. 

역사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 그 자체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서는 역사의 바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지난 광야 40년간의 역사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민족의 일제 36년사에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B.C. 609년경,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불의와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백주(白晝) 대낮에 약탈과 폭력이 난무하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조롱받고 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주께서는 옛날부터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의 거룩하신 주님,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 악한 대적이 낚시로 백성을 모두 낚아 올리며, 그물로 백성을 사로잡아 올리며, 투망으로 끌어 모으고는, 좋아서 날뜁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그 그물 덕분에 호의호식하며 기름진 것을 먹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물에다가 고사를 지내고, 투망에다가 향을 살라 바칩니다. 그가 그물을 떨고 나서, 곧 이어 무자비하게 뭇 백성을 죽이는데, 그가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합1:1-17) 

하박국은 자신의 이러한 질문에 혹시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경우 대답할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당장 이루어질 것은 아니지만 이루어질 때가 정해져 있으니 그 때가 분명히 올 것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라. 지체되지 않고 그 때가 올 것이니라.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와는 거룩한 성전에 있느니라. 온 세상은 내 앞에서 잠잠하라.”(합2:1-4) 

시편 121:1-4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산”은 하나님께서 임재(臨在)하신 곳,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의미하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한 순간도 어김없이 성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감찰하고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람의 머리털까지 세실만큼 세밀하고 완벽하게 지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믿고 잠잠하여 때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의 자서전 ‘밤’(Night)은 대표적인 아우슈비츠(유대인 수용소) 문학으로 손꼽히는 논픽션, 유대인 학살의 진실을 고발하는 실화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헝가리의 작은 소읍 시게트라는 곳에서 신앙심 깊은 부모의 사랑을 받는 외아들(세째)로서 두 누나와 동생과 함께 유년 시절을 15살까지 보냈습니다. 그는 15살이던 1944년 부모와 누나, 여동생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갑니다.

위젤은 수용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자기 금니를 노리는 감방 책임자에게 시달립니다. 위젤이 선뜻 금니를 내놓지 않자 대신 늙은 위젤의 아버지를 때리고 모욕을 주며 괴롭힙니다. 견디다 못한 위젤은 변소에서 녹슨 숟가락으로 금니를 뽑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를 비롯 가족 모두가 다 학살당하고 맙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수용소에 끌려가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그의 자서전의 제목, ‘밤’이 암시하듯 ‘빛과 생명’, 그리고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학살 수용소의 잔혹한 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다 붙들린 13세 소년이 공개적으로 교수대에 매달렸습니다. 30분 이상,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혀를 내밀고 꿈틀거리며 천천히 죽어가는 끔찍한 모습을 바라봐야 하면서 엘리 위젤은 절규합니다. “하나님이여 자비를...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그 순간 소년 위젤의 내면에서 대답이 들려옵니다. “그가 어디 있냐구? 저기 있잖아. 저기 목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잖아?”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은 ‘나는 그 어린아이의 죽음 가운데, 유대인들의 고통과 절규 가운데 함께 있노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악명높았던 헐레스코스라는 지방에는 유대인 600만명이 집단학살당한 ‘인간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선민(選民)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유태 민족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나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가마솥에서 연기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저주와 지옥의 현장, 수용소 한 구석 벽에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304장 1,3절) 라는 찬송가 가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벽 아랫면을 발견하고는 더욱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의 상태, 지옥의 절규 속에서 무엇보다 더욱 두렵고 안타깝게 그들을 떨게 만들었던 것은 독일의 잔인한 고문과 학살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회의와 갈등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결국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들을 사랑하시며 자신들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라고 고백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인권말살의 현장은 인류가 가장 문명화되었다는 21세기 이 시대에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지금 휴전선 너머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상황은 엘리 위젤이 말한 홀로코스트와 다를 바 없다고 수많은 탈북자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 수십만명의 국민이 목숨을 걸고 자기 나라를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북한이 유일합니다. 그런 북한의 실제상황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은 거꾸로 압제자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엘리 위젤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결코 그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며 “침묵은 고통을 주는 사람을 더 부추길 뿐,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지 않는다.”고 개입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나의 슬픔, 나의 고통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도 그저 아득히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항상 거기 계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Jehovah is there)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저 저 멀리 거기 계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기 가까이 계셔서 나의 슬픔과 고통을 보시고, 아시고, 그 중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잔인한 감독자들에게서 구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으며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3:7-10입니다. 

(출3:7-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오늘 본문의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Jehovah is there)라는 뜻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1:8)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셨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마지막’,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 되셔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세대의 주가 되셔서 역사를 통치하시고 구원과 심판의 주로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2. 오늘 본문은 B.C.586년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간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에스겔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당한 이유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가증스러운 우상을 숭배하며 온갖 죄악을 범하고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여전히 뻔뻔하고 강퍅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설명하시고 에스겔로 하여금 어떠한 핍박이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겔2:3-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당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이스라엘의 참상은 ‘골짜기를 가득 메운 바짝 마른 뼈들’과 같았습니다. 

(겔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받은 곳,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는 말씀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작은 생명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인 절망과 죽음의 상태를 암시합니다. 당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황이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서의 결론이며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인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끝나고 무너진 예루살렘이 회복되어 그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 ‘여호와 삼마’는 첫째,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듭되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징계와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옷은 입은 사람으로 하여금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는 것입니다. 

(겔10:1-2)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숯불을 성읍 위에 흩으라’는 것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의 죄악과 불의를 태워 정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어 예루살렘 성전에 임했던 영광이 떠나갈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겔10: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참상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1:4-9) 슬프다! 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를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 어찌하여 너희는 더 맞을 일만 하느냐? 어찌하여 여전히 배반을 일삼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골병이 들었으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난 곳과 매맞은 곳과 또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인데도, 그것을 짜내지도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상처가 가라앉게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 너희의 땅이 황폐해지고, 너희의 성읍들이 송두리째 불에 탔으며, 너희의 농토에서 난 것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방 사람들이 약탈해 갔다. 이방 사람들이 너희의 땅을 박살냈을 때처럼 황폐해 지고 말았구나. 도성 시온이 외롭게 남아 있는 것이 포도원의 초막과 같으며, 참외밭의 원두막과 같고, 포위된 성읍과 같구나. 만군의 주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마치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처럼 될 뻔하였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고 본토에서 쫓겨나 이국 땅에서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은 절망적인 고역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경과한 후에 이스라엘은 다시금 회복될 것입니다.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고 버리는 분으로 알았던 하나님께서 ‘그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함께 하셔서 회복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목적은 정결케 하여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1:25-26)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이를 다시 한 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고 약속하신 말씀이 이사야 4장입니다. 

(사4:1-6) ...그 날이 오면, 주께서 돋게 하신 싹이 아름다워지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 안에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 땅의 열매가 자랑거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때에는, 시온에 남아 있는 사람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곧 예루살렘에 살아 있다고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거룩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딸 시온의 부정을 씻어 주시고, 심판의 영과 불의 영을 보내셔서, 예루살렘의 피를 말끔히 닦아 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주께서는, 시온 산의 모든 지역과 거기에 모인 회중 위에, 낮에는 연기와 구름을 만드시고,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빛을 만드셔서, 예루살렘을 닫집처럼 덮어서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그의 영광으로 덮으셔서, 한낮의 더위를 막는 그늘을 만드시고, 예루살렘으로 폭풍과 비를 피하는 피신처가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인생들을 사랑할지라도 ‘거룩하게 씻어서’ 사랑하십니다. 더러운 채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부정한 것을 씻어 주시고 심판의 영, 즉 성령과 불의 영을 보내셔서 더러운 죄악을 완전히 태워 성결케 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덮어 회복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잠15:6) 제아무리 많은 소득이라도 불의(不義)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잠16:8) 정결케 하시고 의롭게 하시어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4. ‘여호와 삼마’는 둘째로, 하나님께서 믿음의 자손들과 항상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전에도 우리와 함께 하셨고, 이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시고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12:1-3)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7: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말씀)과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언약’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머나 먼 하란, 외삼촌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외롭고 고달픈 광야 여정에 해가 저물어 피곤한 몸을 누이고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이내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8:13-15)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으로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 말씀에 야곱이 잠에서 깨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28:16)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귀로만 들었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신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과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항상 함께 하셔서 그 언약을 다 이루어 축복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영원히 기억하시며, 자손 수천 대를 두고 명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다.(시105:8)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광야 40년을 걷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빈 손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은 금’ 즉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게 하신 일(창15:14), 병든 자나 약한 자가 하나도 없도록 하신 일,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일,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신 일, 반석에서 물을 내시되 마른 땅에 강같이 흘러내리게 하신 일, 40년 동안 광야를 지날 동안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고 신발이 해어지지 아니하며 발이 부릍지 아니하게 하신 일 등,(신 29:5)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기억하셔서, 다시 말해 그 언약과 함께 하셔서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 주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05:37-42을 보겠습니다.

(시105:37-42) 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그들이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그들이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성도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떠하든지, 어떠한 곳에 있든지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심을 믿으시고 언약의 말씀 가운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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