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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자유하게 하는 것이 기쁘시게 합니다 (사 58:5-6, 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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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하게 하는 것이 기쁘시게 합니다 (사 58:5-6, 갈 5:1)


일제 강점에서 해방을 맞은 8.15해방 기념 65주년을 맞았습니다. 36년간 일본에 의해 우리의 국권이 강점당하고 빼앗긴 국토와 국권을 다시 찾은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입니다. 국권이 빼앗기고 나면 자유가 얼마나 귀하고, 국가가 얼마나 소중하고, 국민이란 말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난주에는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일본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강제성이 있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에서 볼 때는 아직도 진정성이 없어 보이고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지배한 사람들은 지배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모르는 법입니다. 자유를 가진 자들은 자유가 없는 자들의 고통을 모릅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는 무슬림 여성들에게 ‘부르카’ 착복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부르카‘를 입으면 사람을 식별할 수가 없어서 범죄예방 차원에서 금지했을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여성해방과 인권 차원에서 금지하였습니다. 여성들이 ’부르카‘를 입고 다니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종교적 이유보다 문화적 이유에서 ’부르카‘를 착복한다고 합니다. 
  
지난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5년간 억압통치를 하던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었습니다. 국민들은 해방감을 되찾았습니다. 남자들은 머리에 쓰는 터번을 벗어던지고 수염을 깎았습니다. 여성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덮었던 ‘부르카’를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탈레반은 마호메트가 살았던 7세기의 생활방식에 따라 백성들을 살게 하였으며 위반자는 채찍질을 하고, 감옥행을 선고하고, 처형하기도 하였습니다. 종교적 이유에서 백성들을 억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가 삶의 자유를 주지 못하면 참 종교는 아닙니다. 
  
율법을 누가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사는 것을 싫어하십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마구 싸우다가 한 사람이 “때려봐”라고 합니다. 그런다고 때리면 큰일 납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싸우다가 남자가 “미안해”라고 했는데 여자는 “됐어!”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습니다. 아직 된 것이 아니지요. 옛날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주고 “난 배 안 고프다”라고 하지만 안 고픈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프지요? 
  
율법에는 뜻이 있는데 뜻은 사라지고 문자만, 형식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율법은 좋은데 율법적이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23:23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합니다. 율법의 형식과 내용이 다 중요합니다. 형식도 내용도 다 지켜야 합니다. 율법주의자의 치명적 약점은 형식은 잘 지키는데 내용을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이라고 하십니다. “기뻐하는”이란 말의 원문의 의미는 ‘선택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택한 금식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금식입니다. 의미 없는 금식이란 배만 고프지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원래 승려이었는데 저의 선친을 만나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 분이 어느 사찰의 승려일 때에 100일 기도를 하였답니다. 생식을 하면서 100일을 기도하는데 무언가 도를 닦아보려고 했지만 그 분은 100일이 지나고 나니 눈에 허깨비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금식이나 생식은 배만 고프고 허깨비만 보이지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5절에는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편다고 합니다. 이런 형식을 갖춘다고 금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형식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금식은 영혼을 자유하게 하고, 결박을 풀고, 자유하게 하고, 멍에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진짜 금식의 의미는 모두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기쁘시게 합니다. 

이사야 58:6 상반절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구속당하고, 억압당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흉악의 결박’이란 히브리말로 ‘하레추보트’인데 ‘악의 띠’라는 뜻입니다. 이는 불의하고 잔혹한 권위로 타인의 권리나 유익을 억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섬김의 수단이 아니라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의 띠입니다. 지위나 자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왕들을 보세요.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19왕이 있었지만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 유다에는 20왕이 있었는데 그 중에 8명의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 자신의 지위를 백성을 섬기는 수단이 아니라 백성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하고 악한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라고 합니다. 악이 무엇일까요? 부정직한 마음을 품고 권력으로 억압하고, 지배하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정직은 선한 것입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권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섬기는 것이 권력입니다.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라는 말은 폭력이나, 압제나, 강탈 등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자를 풀어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부당하게 인권을 탄압 당하고 힘으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유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유하게 하며”라는 말은 ‘하페쉼’이란 말인데 노예를 7년 안식년이 되어 자유를 얻게 할 때에 주로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노예를 안식년이 되어 풀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스라엘의 정당한 법입니다. 
  
몸의 장신구들은 원래 노예들을 구속하는 장치들입니다. 목걸이나, 팔찌나, 귀걸이나, 코걸이가 다 노예들의 장신구들입니다. 문신도 노예들에게 주인이 자신의 노예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몸에 문신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노예 장신구가 요즘은  멋으로 사용됩니다. ‘피어싱’을 아시지요? 구멍을 뚫어 무엇을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요즘은 피어싱이 귀, 코, 입술, 배꼽, 가슴까지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와 귀를 뚫어 코에서 귀까지 체인을 감아놓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는 멋있다고 볼지 모르지만 제가 볼 때는 불쌍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구속하는 장치를 이렇게 많이 달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금년 8.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범죄자 19명과 살인범 90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109명은 발찌를 하고 사면됩니다. 이들이 풀려나면서 특별 관리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아마 내년쯤은 발찌가 액세서리로 유행할지 모릅니다. 원래 노예가 하던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선호하면서 삽니다.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노예근성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장신구들을 좋아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혼자 심방도 하고, 설교도 하고, 종도 치고, 청소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일화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새벽기도를 가면서 목사님이 잠결에 넥타이를 매고 새벽기도회를 가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교인들이 자꾸 웃었습니다. 알고 보니 내의에 넥타이만 매고 나간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인들이 다 갈 때까지 강단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길게 기도하였답니다. 급히 옷을 챙겨 입고 나갔는데 윗도리는 잘 챙겨 입었는데 아랫도리가 파자마였습니다. 
  
술을 마신 운전자가 경찰이 나타나자 넥타이를 바로 잡고 경찰에게 “난 안 취했습니다. 맥주 딱 한잔밖에 안 했습니다”하고 했습니다. 경찰은 기가 막히는지 웃으면서 집 전화번호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현장에 오자마자 고개를 획 돌렸습니다. 넥타이를 맨 목에 매고 있었습니다. 
  
넥타이는 고대 로마병사가 여름에 더위를 식히려고 스카프에 찬물을 적셔 목에 감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넥타이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프랑스 군대의 용병인 크로아티아 병사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터키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이 목에 붉은 천을 감고 시가행진을 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루이 14세가 따라 하므로 유행되었다고 합니다. 붉은 천은 생명을 해치는 마귀가 몸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이 14세는 키가 작고 멋쟁이였습니다. 키가 작은 것을 감추기 위하여 처음으로 높은 구두를 신은 것이 하이힐의 유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하이힐은 여성전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넥타이는 남성의 사회적 신분과 예의 상징입니다. 숨 막히는 무더위에도 동여매고 있어야 합니다. 넥타이를 풀고 목이 드러내면 체감온도가 2도나 내려간다고 합니다. 체감온도가 내려가면 전기가 절약되고, 탄산가스 배출 감소효과가 있습니다. 넥타이만 풀어도 이렇게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자유하면 삶의 효과가 엄청나게 증대됩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되고, 성품이 좋아지는 등 부대효과가 큽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거라사인 지방의 무덤에서 군대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쇠사슬로 묶여 있던 자입니다. 귀신들린 자는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멸하려 오셨습니까?”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아 나오라”라고 하십니다.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 속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이 자유를 얻기 위해 2천 마리의 돼지가 희생되었습니다. 
  
예레미야 40:4에는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많은 다른 피조물이 대가를 지불하게 만드십니다. 그만큼 사람의 생명을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기뻐하십니다. 자유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기쁘시게 합니다. 

이사야 58:6 하반절에는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그리고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멍에가 무엇입니까?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소나  당나귀의 뿔이나 목에 멍에를 씌웠습니다. 그리고 멍에란 억압 혹은 강제적인 노동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멍에의 성경적 의미는 억압이나 구속을 뜻합니다. 
  
동물에게 멍에를 씌워 다루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짐승에게 멍에를 씌워 무거운 짐을 얹으면 역축의 숨통을 압박하여 호흡이 곤란해졌습니다. 심할 때는 질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멍에는 매고 있는 그 자체로도 고통이 큽니다. 
  
굴레와 멍에는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소에게 꿰어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굴레입니다. 굴레는 죽을 때 까지 쓰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멍에는 일을 할 때만 쓰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노비나 천민이라면 이것은 굴레입니다. 벗을 수 없는 굴레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은 멍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소를 함께 묶어 두기도 합니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묶여 있으면 개인행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멍에를 매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밭을 간 경험이 없는 소를 훈련할 때 경험이 많은 소에다 나무로 만든 마구를 달아 멍에를 지도록 합니다. 어린 소가 멍에를 함께 매면 늙은 소가 하는 대로 합니다.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안간 힘을 쓰지만 벗을 수가 없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말 네 마리를 묶어 뒤에 마차를 달아 달리게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멍에로 네 마리를 묶어 놓았을 때 네 마리가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발이 맞지 않으면 절대로 달릴 수 없고 아니면 마차가 전복되고 맙니다. 
  
멍에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 아시는 예수님은 멍에를 해결하십니다.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나와 함께 멍에를 매자”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1:29-30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멍에는 더 이상 멍에가 아니라 멍에가 자유로 바뀝니다. 
  
어디에 누구와 묶여 있는가에 따라 자유가 되기도 하고 멍에가 되기도 합니다. 마귀와 함께 묶여 있으면 멍에입니다. 주님과 함께 묶여 있으면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미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는 그의 서신에서 64번이나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속박이 아니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1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매는 것은 멍에입니다. 주의 종이 매는 것은 자유입니다. 
  
아이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성격이 비뚤어지고 방황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나쁜 짓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7살이 되던 때에 어머니는 “아가야 어미의 부탁이 하나 있다” 하면서 집의 큰 기둥에 나쁜 일을 할 때마다 못을 하나씩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기둥에 못을 박기 시작하였습니다.

3년이 되자 그 기둥에는 못을 박을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병들어 죽게 되자 아이를 불렀습니다. “더 이상 못 박을 자리 없어요”. 아이가 말하자 어머니는 다시 소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못을 박지 말고 좋은 일을 할 때마다 못을 하나씩 빼다오”. 아이는 좋은 일할 때마다 하나씩 못을 빼기 시작하였습니다. 50년이 흐른 후에야 마지막 못을 뺐습니다. 노인이 된 아이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70노인 된 아이는 기둥을 잡고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못을 다 뺀 기둥에 못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 35년의 일제 강점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침탈 100년을 맞고 해방 65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자유를 빼앗긴 상처는 깊습니다. 우리 민족과 강산의 곳곳에는 못 자국이 남아 상처로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얼마나 죄질이 나쁜 악인지 모릅니다. 나영이에게 상처를 준 것은 잠시지만 상처는 깊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가장 나쁜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결 론 

최근 북한의 목함지뢰 120여개가 떠내려 왔습니다. 폭발하여 다치기도 하였고, 임진강이나 강화도에는 피서객도 줄었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목함지뢰를 의도적으로 떠내려 보냈다고도 합니다. 우리 군이 서해안에서 훈련을 한다고 해안포를 남쪽으로 발사하였고 계속 전쟁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중국에서 저염분수로 어장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바다에 민물이 들어온 것입니다. 중국 양즈강에서 서해와 남해로 민물이 들어와 수온의 상승하고 염분이 저하되어 어폐류 25%가 폐사했다고 합니다. 봄만 되면 보내주던 황사로는 모자라서 이제는 민물폭탄까지 퍼붓고 있습니다. 이렇게 북한과 주변국에서 계속 우리를 괴롭히지만 우리는 평안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주변 상황들이 있지만 우리나나 만세입니다. 언제는 우리가 잘 해서 평안했습니까? 경제를 봐도 경제대국이 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하나도 없는데 경제적으로 참 좋아지고 있습니다. 안보도 우리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유치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만세’가 아니라 ‘하나님 만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시려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모든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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