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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악과 (창 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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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창 2:8-17)


옛날부터 사람들이 에덴동산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습니다. 연세 조금 드신 분들은 ‘에덴의 동쪽’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영화 주제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사랑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에덴동산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우리 생각과는 달리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월드컵이 열렸던 남아공의 희망봉까지 이어지는 1000미터 이상 되는 고원지대를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이고, 동산은 파라다이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기쁨의 낙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 중앙에 나무 두 그루를 두셨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또 하나는 선악과였습니다. 생명나무는 계속해서 생명이 이어지는 나무이고, 선악나무는 그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는 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시면서 명령을 내리셨는데, 그 명령은 아주 엄했습니다. 다른 과일은 다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곳에 있는 수 백 그루, 수 만 그루가 되는 많은 열매들은 다 먹어도 되지만 이것만은 먹지 말라는 선악과 금지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과를 가지고 오늘 우리들에게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인간은 법의 제한을 받는 법치주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법치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강 생각하겠지만 제대로 정의해보면 법치주의란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기독교는 성선설과 성악설 중 성악설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는 기독교 기본 인식입니다. 즉 사람은 본래 악하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살지 아니하므로 소위 말하는 덕치주의로는 제대로 통제할 수 없으며, 알아서 잘하라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으로 다스리는 덕치주의를 배격하고, 덕치주의가 아닌 법률로서 사람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법치주의입니다.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내가 하기 싫다고 내 마음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법을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법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이런 저런 이유로 하지 않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법에는 세상 법도 있고, 하나님의 법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법을 지켜야 하는 존재이므로, 할 수 있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라고 선악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참으로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을 너무 쉽게 자의적으로 또 우리 편의주의로 해석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가 저지른 범죄가 참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기독교인들이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범죄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세상 법도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 법도 지키지 아니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러는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왜 교회를,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지 생각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연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잘 아십시오. 여러분, 돈이 있어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인간 존재가 아닙니다. 기도교인들은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힘이 있다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불순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성입니다. 이 의미가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의 마지막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순종하지 아니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비가 오는데, 청개구리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겠습니다. 청개구리는 어머니 말씀을 늘 반대로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라면 저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면 이렇게 했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청개구리의 어머니가 죽기 전에 “내가 죽거든 개울가에 묻어라” 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비가 오면 그 무덤은 떠내려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개울가에 자기 무덤을 세우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런 아들이니까 이렇게 말하면 틀림없이 반대로 개울가에 묻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개구리는 이번만큼은 어머니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머니 말씀대로 개울가에 어머니 무덤을 모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만 오면 걱정이 많았습니다. 물이 불어나면 어머니 무덤이 쓸려갈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들에게도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 청개구리 어머니처럼 그것이 걱정이 되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정말 우리도 청개구리 같이 행할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예배드리는 시간에 딴 생각을 하고, 다른 일을 할 때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할 텐데, 기도해야할 텐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이런 불순종하는 경향이 많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오늘 ‘반드시 죽으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애들아, 내가 먹지 말라고 하면 더 먹고 싶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먹고 싶어도 참고 먹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인데 그것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우리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선과 악을 알게 되면 분별하여 악은 행하지 아니하고, 선은 추구하면 더 좋을 텐데 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시는가?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틀린 말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장군들이 여러 분 계시는데 장군들은 전쟁에서 어떤 상황이든 전쟁의 규칙을 지킵니다.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장군들은 만약 자기가 전쟁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전쟁의 잔인함을 부하들이 당한다는 것을 직접적인, 간접적인 많은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전쟁규칙보다 더 좋은 생각이 들어도 장군들은 많은 공부와 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것을 알기 때문에 전쟁의 규칙들을 꼭 지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아십시오. 장군들이 전쟁을 규칙을 지키는 이유는 이런 이유에 앞서 그것이 전쟁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장군이 전쟁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장교들이, 사병들이 법을 지키겠습니까? 모든 이유와 까닭보다 먼저 그것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실 때에는 항상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첫째 이유는 그것이 명령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과 전쟁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이길 텐데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불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물으셨을 때, 사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제사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제일 좋은 예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에 좋은 양, 좋은 소가 있어 이들을 죽이지 말고 제사를 드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죽이지 않고 끌고 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란 예배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나는 제사보다, 제물보다 순종을 더 좋아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한다는 것이 정말로 잘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옳다는 것이 정말로 맞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그것이 답입니다. 핵심은 이런 저런 이유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그 이유가 타당한가, 그렇지 않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용서에는 정말로 여러 가지 이유가 많습니다. 용서해야 평화가 생겨납니다. 여러분들 마음이 편치 않겠지만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이런 저런 박한 일을 한 사람들도 때가 되면 용서해야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나에게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도 용서해야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해야 건강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건강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완전한 건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용서와 건강은 아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의사들은 우리의 장은 뇌와 직접적으로 한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무언가 뇌 속이 틀어졌다 싶으면 금방 장이 좋지 않습니다. 이처럼 용서와 건강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용서에서 얻어지는 평화와 건강은 덤일 뿐 용서의 참된 이유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용서해야합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위대한 믿음의 선배인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을 참 좋아합니다. 그녀는 독일군에 의해서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아버지, 언니도 함께 변을 당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코리 텐 붐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은혜에 대해서 간증을 하였습니다. 간증이 끝나고 나면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어느 날 한창 인사를 나누던 중 저만치에 자기가 독일 감옥소에 있을 때 어려움을 주었던, 아버지, 언니에게도 어려움을 주었던 간수가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언쟁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 다 용서해도 저 사람만큼은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하라고 저에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때도 하나님은 아무 대답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가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네가 용서할 수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용서하라는 내 말에 순종하겠는가, 아니 하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코리 텐 붐은 푹 꺾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알았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 간수를 꼭 안았습니다. 코리 텐 붐은 자기 생애 최고의 완전한 평화가 그 순간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아야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존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의 뜻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신불의 뜻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신불의 뜻을 따라야한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타이타닉 조크를 생각해 봅니다. 조난당한 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구조선에 서로 타려고 하지만, 자리가 모자랍니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해야 노약자들이 구출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를 희생할까요? 법이라고 이야기하면 줄줄이 물에 뛰어 든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절대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할 자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법으로 자꾸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면 아무런 생각 없이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로 인간이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법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은 건강에 좋습니다. 그리고 쉴 수 있는 여유도 참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들, 사랑하는 자녀들,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주일 중 하루 안식해야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절).. 일곱 째날, 여섯 째날, 금요일, 토요일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주일에 하루는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당신도 쉬셨다는 행위언어입니다. 

여러분, 이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피곤하셔서 쉬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안식하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가족과 함께 지내려고 쉬셨습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건강 때문입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쉬신 까닭은 우리들에게 행위언어로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 아무 쉴 필요도 없는 내가 쉬었으니 너희도 나를 따라 쉬라고 엄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런 저런 까닭이 아닙니다. 나도 이유 없이 쉬었으니 여러분들도 쉬라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의 법을 지킬 것인지 우리들에게 물으시면서 인생은 그런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악과와 안식일을 함께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두 번째 선악과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그 명령은 여러분을 향한 나의 테스트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테스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가 아닌가의 결과로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중요한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생각해도 되는지에 대한 판단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로 내가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아니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아주 어렵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어렵습니다. 그것은 언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순종할 때에, 때로는 이것은 아니다 싶은 그것도 순종할 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당신과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동반자, 하나님의 동역자, 함께 일할 만한 사람으로 세워주십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고백하거나, 그럴만한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당연하게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순종하는가, 제대로 순종하는가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가시면서 천기를 누설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정도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있습니까? 그럴 정도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을 부탁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중요한 일을 아무에게나 부탁하지 못하십니다. 정말로 특별한 일을 부탁할만한 사람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습니까?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아니하는가를 보고 판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지고 계신 것이 많습니다. 정말로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도 많이 가지고 계시고 복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자녀의 복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돈도 정말로 많습니다. 제가 가끔 농담 삼아 나한테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제가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돈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많이 가지고 계시는 그것을 누구에게 주실까 망설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무언가 주고 싶은 사람을 어떻게 찾으시겠습니까? 순종하는가 하지 아니하는가? 이것으로 분별하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또 사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먼저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왕으로 세우셨고, 자기 자리를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니까 왕의 입지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시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주셨지만 사울이 계속해서 내 친구, 내 동반자가 될 수 있으며, 내 모든 일들을 맡길 수 있겠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진짜 더 큰 복을 줄 수 있겠는가를 보셨는데 아니었습니다. 또 기회를 주셨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도저히 가망 없는 사람으로 판단하시고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아, 네가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내가 너를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이제 네가 나에게 불순종하기 때문에 나도 너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급한 일로 하나님을 찾아가도 그렇게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 일절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히 버리신 것입니다. 끝까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순종하는지 아니하는지, 하나님 법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보신 후, 그를 포기하셨습니다. 

반면, 다윗을 봅니다. 그는 잘했지만 참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볼 것이 없는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하나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보기에 악을 행하였는가? 네가 왜 이렇게 무서운 죄를 지었는가?”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도 하나의 기회입니다. 사울은 이런 저런 핑계를 다 댔지만 다윗은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즉각적으로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라는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다윗을 보시고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친구로 삼아주시고, 동반자로 삼아주시고 게다가 세상의 복이란 복은 다 주셨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다니엘 때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 왕이 잔치를 하는데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벽에 어떤 글씨를 썼습니다. 깜짝 놀라 그 뜻을 알려고 했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다니엘이 들어와서 “벨사살이여, 당신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옛날에 정신병에 걸리고 왕좌에서 물러났다 다시 회복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아버지가 왜 정신병에 걸리고 왕 자리를 빼앗겼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당신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끝입니다.” 라고 선고하였습니다. 아무리 왕의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버리시니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에 벨사살은 암살을 당하여 죽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들으십시오.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렘11:4~5)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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