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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없는 이유 (행 26: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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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는 이유 (행 26:24-32) 
  

이 시간 “믿음이 없는 이유”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자녀 되고, 믿음으로 해결되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믿음으로 약속 받고 응답 받고, 믿음으로 불가능이 없으며, 믿음으로 기쁘시게 하고, 믿음으로 천국을 갑니다. 

성도라면 믿음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려고 하지만 맘대로 되나요? 여기에 대해 영적으로 진단해 보고 참된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왜 믿음이 없을까요? 우리는 그 원인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머리로 믿기 때문입니다. 

베스도 총독의 말을 보세요. 24절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의 말을 듣고 미쳤다고 외치는 베스도 총독의 모습입니다. 

베스도 총독의 입장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유대의 종교에 관한 지식은 없고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 헬라적 사고방식을 가진 베스도로서는 바울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의 고장으로 논리와 합리에 진리의 근거를 두었습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을 학문에 심취하다가 미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논리의 머리에 어떻게 믿음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이 바로 머리로 믿으려는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되면 믿고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고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기 사고의 틀에 가두는 것으로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부인하고 성경을 부인하고 신앙을 윤리와 도덕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해야지 자꾸 논리의 잣대를 들이 대지 마세요. 하나님의 일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2. 말씀에 무지할 때입니다. 

26-27절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이 말을 아그립바에게 하게 된 동기는 베스도가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의 종교적 배경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을 향해 말합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으로서 유대 풍속과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이방인으로서 메시아가 온다느니 죽지만 다시 산다니 뭐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알지 못하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성경이 알려주는 대로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성경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성령을 믿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자 성령이 있음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알지 못하니 어찌 구할 수 있으며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에 무지하지 말고 유식하시기 바랍니다. 

 3. 체면을 중시할 때입니다. 

28절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왕은 바울의 명석하고 논리 정연한 변론에 몹시 당황하여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쩍하게 반문을 받아 넘기는 장면입니다. 바울의 말이 다 맞으니 그대로 호응했다가는 유대인들의 반감을 살 것 같고 아니라 하자니 유대의 정통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더구나 아그립바는 허세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의 체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기보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는 말로 넘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서 체면을 중시하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체면 때문에 입으로 시인하지 못하고 찬송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한다면 죽은 신앙입니다. 자신을 너무 그런 것에 묶어놓지 마세요. 우리 믿음은 활짝 피어야 합니다. 너무 남을 의식해서 너무 억압하면 자라지 않습니다. 

예절은 필요하지만 너무 체면 챙기지 마세요. 사람이 웃어야 할 때는 웃고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건강하답니다. 감정이 메마를 때 우리 심령도 육체도 마릅니다. 환경도 마릅니다. 믿음에 감정이 중요합니다. 뼈대만 가지고 하는 것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감정이 사라지면 죽은 것입니다. 

 4. 사명을 망각할 때입니다. 

30-32절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의 무죄가 또 다시 선언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는 그들의 말은 무슨 여운을 남기는 말입니다. 즉 바울이라는 사람은 어리석고 쓸데없는 일을 하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의 사명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상소는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형태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이 상소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복적인 고소를 종결짓는 상소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즈음에서 석방되었다면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명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알지 못한 그들이 어떻게 바울의 상소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상한 부질없는 사람으로만 비쳐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사명을 이해 못하면 안 됩니다. 바울처럼 사명 붙잡으셔야 합니다. 자기 사명 붙잡아야 믿음이 더욱 자랍니다. 가만있어 몸을 아끼면 건강해지나요? 더 약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도 해봐야 믿음이 더욱 자랍니다. 전도해 보세요. 믿음이 큽니다. 봉사해 보세요. 믿음이 강해집니다. 사랑해 보세요. 행복이 옵니다. 기도해 보세요. 능력이 옵니다. 드려 보세요. 더욱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요나처럼 저 험한 시험 물속에서 고난당하시는 분들 자기 사명 찾으세요. 그런데 사명이란 넘어야 할 고개가 있어요. 알아주지 않아도 욕을 먹어도 오해를 받아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낙심하는데 이 사명의 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사명자입니다. “너는 내 일해라. 그러면 내가 네 일해 주겠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몸은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하시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옥토에 떨어질 때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베스도처럼 머리로 믿지 마세요. 진리에 무지하지 마세요. 아그립바처럼 체면에 메이지 마세요. 자기 사명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자기 문제를 깨닫고 바울과 같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크게 쓰임 받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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