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의 십자가 (막 15:21-32)

  • 잡초 잡초
  • 318
  • 0

첨부 1


은혜의 십자가 (막 15:21-32)


시인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같은 십자가지만 그 십자가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감동과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저주로 다가오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로 다가옵니다. 왜 그런 걸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저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십자가를 저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눠 갖는 군병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는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며 온갖 희롱을 다하며 채찍질 했던 로마 군사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즐겼습니다. 

아주 신이 나서 예수를 채찍질해 댔습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그들의 채찍질은 사정이 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33살의 팔팔한 청년 예수가 그 짧은 고난의 언덕길,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다가 세 번이나 쓰러질 정도로 아주 잔인한 채찍질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시로 관을 만들어 예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가시에 찔려 머리에서도 피가 흘러내립니다. 그런 상태로 왕을 상징하는 자색의 옷을 입히고 손에는 규를 상징하는 갈대를 들려주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합니다.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갑니다. 그렇게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채찍질하고 희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아마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벌벌 떨다 뒤로 나가 자빠졌을 것입니다. 단지 그들은 장난삼아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희롱의 의미로 꿇어 절했지만 그들이 죽어 심판의 주님 앞에 섰을 때 자기들이 채찍질하고 희롱했던 그분이 다름 아닌 심판의 주님이심을 깨닫고 얼마나 가슴이 떨렸을까요? 

그때 나는 아무 것도 몰랐노라고, 정말 몰랐노라고, 알았다면 그럴 리가 있었겠느냐고 항변하겠습니까? 아니요? 그들에게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은 로마의 군병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어 유대인들이라고 하면 개 발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을 만큼 시건방진 마음으로만 가득합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해서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압니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예수가 사실은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요?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골고다 언덕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을 때가 제삼 시 그러니까 아침 아홉 시입니다. 예수의 심문 과정을 다시 한 번 본다면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빌라도가 예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을 해댑니다. 그래서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다시 말합니다.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한데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동원된 고관들과 백성들은 막무가내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댑니다. 그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으면 이러다가 민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고 그렇게 골고다 언덕을 올라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겨우 아침 아홉 시라니 그럼 처음 재판을 시작한 시간이 도대체 몇 시라는 얘깁니까? 어쨌든 십자가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재판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환호하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 말이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예수에 대해서 들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들 말을 통해 볼 때 저들은 예수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더 이상 예수를 통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죽어 마땅한 사람, 그저 입만 살아있던 위선자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 조금도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너무도 쉽게 모욕의 말을 뱉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욕의 말 희롱의 말이 자기에게 다시 비수가 되어 날아오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또 한 사람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 강도로 표현될 정도니까 저가 별로 질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기도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만큼 중죄인입니다. 그런데 옆에 못 박힌 예수를 저주하고 모욕해댑니다. 끝까지 회개할 줄 몰랐던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죽어가면서 조차도 온갖 악담을 다 퍼부어대는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죽어 마땅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가장 못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직책은 살리는 일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은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로 들어가 시은좌에 그 피를 뿌리며 죄 사함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와서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며 주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함으로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자비와 복이 내리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로 살아나가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장로들이야 말로 말 그대로 백성들의 연장자로서 잘 다스려나가야 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맡은 일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살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죽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백성들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한데 정말로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니죠. 사실은 백성들을 핑계 삼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이들은 예수를 십자가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몰아붙인 장본인들입니다. 그에 동조한 추종 세력들도 문제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바로 이들에게 있습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이야 말로 자기 배만 생각한 그래서 더 책임이 무거운 사람들이요 더욱 무거운 형벌이 저들에게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모든 일을 주도한 세력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도 자비를 베풀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보면서 뭐라고 합니까?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그들이 지금 제 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떨결에 예수를 욕보이기 위해서 한 소리긴 하지만 그들 스스로 예수가 남을 구원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라고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희롱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 뿐 그렇게 인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실지로 예수는 그리스도였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 희생 제물이었음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때 그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지옥으로 들어갔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생각한 이들 모두에게 있어서는 공통점은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를 자신들의 은혜를 위한 기회로 삼지 못하고 결국 그 십자가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십자가를 은혜의 십자가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예수님이 못 박하신 그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처럼 구레네 사람 시몬 역시 우연히 이 시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던 그 언덕길을 지나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전혀 상관도 없을 이 사람이 갑작스럽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됩니다. 그는 이방인입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제일 북서쪽 지금의 리비아에 속한 지중해의 해변 도시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와 있다는 것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장사꾼으로서 대목을 노리고 예루살렘에 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자기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우연찮게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강제로 예수님 대신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랐던 이 사람이야말로 우연찮게 찾아온 은혜를 붙잡게 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사람입니다. 그때는 불평으로 가득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가 은혜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우연을 가장해서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치고 구레네 시몬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기회를 통해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른 은혜의 사람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왜 하필이면 나야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 길에 있었던 사람이 어디 시몬 한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시몬이었을까요? 

이건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 아니 어쩌면 반복적으로 그 기회가 내게 주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기회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런 고통과 갈등을 통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만들어주고 계신 지도 모릅니다.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우리는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저주스러운 고통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런 순간들을 가장 은혜롭고 가장 복된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선택은 어쩌면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떨결에 억지로 대신 지게 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평생의 그 어떤 은혜보다도 귀한 은혜일 줄은 그 시간에는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뜻과는 상관없이 어떤 고난의 순간이 혼란스러움이 우리들을 사로잡게 될 때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의 시간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가장 저주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이 오히려 가장 큰 은혜를 내게 넘치도록 하는 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강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사람의 강도들 그들은 처음에는 한결같이 예수를 저주하며 욕했습니다. 자기들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못 박히신 예수를 욕하며 저주하고 있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긴 그 정도까지 되니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중 죄인이 아니고서는 십자자게 달리지 않는데 로마 입장에서 보아도 이들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허용되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있으면서도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습니다. 처음에는 그 두 사람이 다 예수를 욕했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그의 마음이 바뀌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가 말하기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청을 드립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놀라운 응답이 저에게 주어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그 주님의 말씀처럼 몇 시간 후에 그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갑니다. 그 순간 그는 또 한 번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말 한 마디 잘했을 뿐인데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의 몹쓸 죄인인데 행악자요 강도일 뿐인데 그런 그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다니 그리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였다니 그 순간 그의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십자가를 은혜로 바꾼 또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십자가 곁을 지킨 백부장입니다. 그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입니다. 형 집행을 총 책임지는 책임자입니다. 어쩌면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했던 사람도 바로 이 백부장일지 모릅니다. 너무 지친 피투성이 예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다 몇 번씩 쓰러지는 예수를 보면서 비록 잠시 후에는 그 십자가에 못 박힐 자이긴 해도 이 상태로는 어렵겠다 싶어 눈에 띄는 구레네 시몬으로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그에게는 근본적으로 자비심이 있습니다. 그랬던 그가 십자가 곁을 지키며 형지 집행되는 모든 과정의 증인이 됩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예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이 무명의 백부장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던 일곱 마디도 다 생생히 들었던 이 사람이 나중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 신앙 고백이야말로 이 백부장을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한 고백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구레네 시몬도,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 하나도 그리고 이 백부장까지도 전혀 은혜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입니다. 단지 공통점이 있다면 우연이었던 아니던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가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저주가 은혜로 바뀌도록 만들어주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우리들이 지금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지금도 순간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와 마주합니다. 

단지 교회 종탑 위에 보이는 십자가, 교회 강단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 아님 우리들의 목에 자랑스럽게 금빛으로 빛나는 십자가가 아닌 우리가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에서 마주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는데 십자가야 말로 우리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나를 쓰러지게 만드는 십자가, 나의 마음을 온갖 미움과 저주와 비난과 욕설과 원망과 좌절로 가득하게 만드는 십자가, 가장 힘든 결단을 하게 하는 순간들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저주의 길로 들어갈 수도 있고 은혜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간의 나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 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의 다른 강도처럼 우리 마음의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 나도 지고 갑니다. 오늘 주님의 낙원의 은혜를 나에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나를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 너무 감사합니다. 나도 그 주님의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십자가 기쁨으로 지고 가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이야 말로 참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나의 주님이 되시며 나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고백을 통해 은혜의 십자가를 마주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그린 많은 그림들에는 주님이 달리신 가운데 십자가가 다른 두 십자가보다 더 크게 또는 조금 더 높게 언덕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다 현저한 자리에 두고 싶어 하는 화가의 열망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께 다른 두 강도들보다 높거나 두드러진 자리가 주어졌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주님을 일반 범죄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 십자가들은 같은 높이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서 저는 예수님이 다른 두 십자가 위의 하찮은 죄인들로부터 한참 위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계셨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또한 저는 세 십자가가 서로 꽤 가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강도는 주위의 군중들의 고함과 소동 속에서도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죽어가고 있는 강도의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지만 않았다면 얼마든지 손을 뻗어 예수님의 손 위에 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바라보고 믿음의 손으로 주님을 만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와서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께 믿음으로 손을 뻗어 보셨습니까?
“사람들은 주님 손에 못 박고 그 이마를 찔렀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오라!’고 악마같이 기뻐 날뛰며 소리 질렀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머무셨네!” 
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게 저주입니까 아니면 은혜입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