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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 (룻 1:19-22, 룻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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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룻 1:19-22, 룻 4:13-17)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아주 방대한 책입니다. 66권으로 되어 있고, 제가 갖고 있는 성경책으로 지면이 1754페이지나 됩니다. 하지만 이 방대한 성경의 주제를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풀어보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창조, 타락, 그리고 구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린 인간의 범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고 죽음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언약을 지켰다면 인간은 영생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 다행히 하나님이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대속으로 믿는 자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회복’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조화와 질서입니다. 코스모스(cosmos)라고 하죠. 이 단어는 우주라는 뜻도 있지만, 조화 혹은 질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혼돈과 무질서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가리켜 카오스(chaos)라고 하죠. 이 카오스를 다시 코스모스로 회복시키는 것,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이것은 창조(원창조)를 새롭게 하는 ‘재창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이뤄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구원은 곧 회복이요 재창조입니다. 그래서 고후5:17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ion)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마치 이런 겁니다. 옛날 고물 장사 아저씨들이 골목을 돌며 고물을 수집했습니다. 그 중에 양은그릇이 인기였습니다. 양은그릇 찌그러진 것을 갖다 주면, 엿으로 바꿔주기도 하고, 심지어 새 그릇으로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적에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커서 깨달은 원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고물을 수거해서 용광로에 집어넣고 녹입니다. 그걸 가지고 새 그릇을 만듭니다. 이런 게 바로 구원이요 재창조이며 회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외 없이 회복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도 마찬가지 회복의 축복을 경험합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제목대로 룻입니다. 그러나 룻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바로 나오미입니다. 이 시간에는 나오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보면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룻기의 역사적 배경은 사사시대(士師時代)입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 사후 340년(B.C. 1390~1050)을 가리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을 떠난 나오미 : 인생의 쓴맛을 보다  

사사시대에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다가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본래 베들레헴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자 이방 땅 모압으로 피신합니다. 룻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엘리멜렉)이 그의 아내(=나오미)와 두 아들(말론,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went to live for a while)” 아마 흉년을 잠시 피해서 모압에 가 있다가 돌아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흉년이 들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자연 재해라 여기고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8km 지점 위치하고 있는 평원입니다. 그 이름이 무슨 뜻이죠? ‘떡집’입니다. 그 이름이 암시하는 베들레헴은 풍요로운 곳입니다. 일명 ‘배.둘레.헴’이데(조크), 배 둘레가 40인치 이상 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웬만한 가뭄쯤은 끄떡없어 농사가 잘 돼서 잘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 곳에 흉년이라니! 이건 정말 이상한 겁니다. 예삿일이 아니죠.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내리신 징계였다는 겁니다.  

사사시대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다는 겁니다.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욕심대로! 이건 아니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면 혼납니다. 인생 망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제멋대로 살면 말씀으로 경고하시고,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매를 드십니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사사시대 사람들처럼 나오미와 그 남편 엘리멜렉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흥미롭고도 안타까운 것은 엘리멜렉이란 이름의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My God is the King)라는 뜻입니다. 그 아버지가 신앙적 소원을 담아 그렇게 지어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과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게 아니라, 자기가 왕 노릇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왔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갑니다. 이건 단순히 지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적성 국가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우상숭배 국가입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살기 편하다고 찾아간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영적인 행위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죠? 룻1:3~5 보십시오.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잠시 체류하다 돌아오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조금씩 깊이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러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죠?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옐로카드죠! 그때 얼른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머뭇거리며 두 아들 이방 여인들에게 장가 들이고 살다가 두 아들마저 죽게 됩니다. 레드카드! 나오미, 룻, 오르바 과부 세 사람만 남습니다. 절망 그 자체입니다.   

다행히 나오미가 그제야 정신 차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나오미라고 부르자 어떻게 하죠? 20절~21절 보세요.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장계로 인생이 괴롭게 됐는데 무슨 나오미냐 이겁니다. 그 이름이 무슨 뜻인가 하면 ‘희락’ ‘기쁨’ ‘즐거움’(Pleasure) 즉 단맛이란 뜻입니다. 그 이름 부르지 말고 대신 뭐라고 부르라고 하죠? 마라! 마라는 ‘슬픔’ ‘쓰라림’ ‘괴로움’(Bitterness) 즉 쓴맛이란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제 자기는 인생의 쓴맛을 본 불쌍한 여인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의 배반하고 불순종하면 반드시 쓴맛을 봅니다.

고난이 올 때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징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설사 특별한 잘못 없이 당하는 애매한 고난이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와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승리의 축복의 길입니다.   

룻은 나중에 어깨너머로 배운 신앙인데도 고난 중에 하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동서 오르바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행하다 중간에 친정으로 가버렸지만, 룻은 뻔히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라갑니다. 그 장면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합니까? 

룻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but Ruth clung to her)” 여기서 ‘붙좇다’라는 단어는 ‘착 달라붙다’ ‘매달리다’(cling to) 이런 뜻입니다. 고난이 온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멀리 도망치면 손해만 보게 됩니다.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고양이 피하다 호랑이 만난다!”  

고난이 오면, 어떤 형태의 고난이든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 내가 해결해 주마! 이런 신호입니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룻이 그렇게 해서 큰 축복을 받았잖아요. 히스기야 왕도 그랬습니다. 그가 중년에 죽을병에 걸려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죠? 

사38: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눈물의 기도를 듣고 15년이나 수명을 연장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왕가와 나라를 크게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승부를 내야 합니다. 회개하고 착달라붙어 매달리면, 기도하고 순종하면 필승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벽지는 종이입니다. 아주 약해요. 주먹으로 치면 찢어지고 구멍이 납니다. 그런데 벽지가 일단 콘크리트 벽에 착 달라붙으면 어떻게 되죠? 아주 강해집니다. 어느 정도로요? 콘크리트 벽만큼의 강도를 갖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있으면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붙어 있으면 강해집니다. 나오미는 고난이 닥쳐올 때 하나님께 다가가 붙어있지 않고 오히려 멀리멀리 가다가 인생의 쓴맛을 보고 말았습니다. 
  

[2] 하나님에게 돌아온 나오미 : 인생의 단맛을 보다   

만시지탄이지만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러자 이제 인생의 쓴맛에서 벗어나 인생의 단맛을 보게 됩니다. 1:22절.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 ” 나오미의 귀향! 이것은 단지 지리적 이동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겁니다. 아직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지만,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이미 회복이 시작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죄로 말미암아 깨졌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납니다! 호6:1 보면,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피를 토하듯 외친 호세아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모든 것을 회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 는 말씀입니다.  

나오미가 귀향하자 서서히 회복의 역사가 진행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회에 ‘긍휼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농사지을 땅이 없는 사람이 밭에 와서 추수하다 남은 이삭을 마음대로 줍도록 허용한 것입니다. 아무도 금지할 수 없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왔는데 아무런 소유도 없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그래서 긍휼의 율법대로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밭의 주인이 보아스였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부호인데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멕렉의 가까운 친척입니다. 

룻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우연히’라는 말은 룻의 편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 밭으로 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룻의 발길을 그곳으로 인도하신 겁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 히브리어로 ‘고엘’이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고엘은 ‘기업을 무를 자’(Kinsman-Redeemer)라는 뜻입니다. 이것 역시 긍휼의 율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져서 토지를 잃었을 때,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찾아 주는 겁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죽었을 때 그 미망인에게 장가들어 대를 이어주었는데, 이를 가리켜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대를 이어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회보장제도였습니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 사회는 여인들의 인권 상황이 열악했습니다. 생계조차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계대결혼을 하면 살 길 열립니다. 한 마디로 새 인생(new life)으로 회복시켜주는 겁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면 나오미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고, 살 길도 열립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죠. 보아스보다 가까운 친족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1순위이고 보아스는 2순위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권리라고 주장하면 보아스와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포기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룻은 이방 모압 여인인데다가 생기는 것은 없고 온통 의미와 책임 뿐입니다. 

결국 보아스 차례가 됐습니다. 4:13절.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오벳)을 낳은지라” 보아스와 룻이 결혼합니다. 그 사이에 누가 태어나죠? 오벳!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보아스와 룻은 다윗의 증조부모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오는데 룻의 이름이 당당히 올려져있습니다.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룻과 보아스의 결혼 후 그들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자 덩달아 나오미의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4:14절~15절.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보아스)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 15 이는(오벳은) 네 생명의 회복자(restorer of life)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여기 보면 ‘생명의 회복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벳을 가리키는데, 그로 인해 나오미의 인생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미의 새 인생이 펼쳐집니다. 완전히 망해서 자기 이름을 ‘마라’(슬픔)로 불렀던 나오미! 이제 다시 ‘나오미’(기쁨)라는 이름을 되찾은 겁니다. 이제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쓴물이 아니라 단물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역사요 회복의 역사입니다.   

사61:3 보면, 예수님을 통해 얻는 구원을 이렇게 표시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플 때 머리에 재를 뿌립니다. 그리고 베옷(상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회복함으로 재 대신 화관(꽃으로 만든 왕관) 즉 기쁨의 왕관을 쓰고, 베옷 대신 찬송의 옷 즉 예복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의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승리의 인생이 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 들어오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애매하게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조차 이렇게 외칩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의 기쁨은 환경과 조건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심령 속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생수로 인해 부어지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대중가요 가수에서 목사로 변신한 이종용 목사님(미국 LA 코너스톤교회 담임)의 이야기입니다. ‘너’ ‘겨울아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등을 부르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풍미했던 인기가수였습니다. 1975년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최고 가수상을 받는 날에 대마초 소지죄로 구속 수감됐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었는데, 감옥에서 사형수를 만납니다. 그가 만든 구리 십자가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나는 사형당하겠지만, 당신은 곧 출소할 테니까 예수 잘 믿고 내 몫까지 살아주시오!” 그 말을 듣고 지나온 인생을 회고해 보니까 하나님을 떠나 사던 인생이 얼마나 쓰고 허무한지 절절히 깨달아졌습니다. 사실은 화려한 인기 스타 생활의 이면에 허무감이 가득했기에 대마초에 손을 댔던 것입니다. 

학창 시절에는 YMCA 활동도 했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자신을 생각하며 회개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 앞에 돌아왔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된 겁니다. 그가 수년 전 펴낸 간증집의 제목이 이겁니다.「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과거 가수 시절 불렀던 노래 제목입니다. 그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몰랐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과거의 인생이 정말 바보 같았음을 고백한 겁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목사로 과거 인기 가수 시절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쓴맛 인생에서 단맛 인생을 회복되고 변화된 겁니다. 마치 나오미가 마라에서 진짜 나오미로 회복된 것처럼!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회복의 역사입니다. 전인생의 변화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예수 믿노라 하면서도 삶은 자꾸 예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 밖에 있으면 K.O.입니다. 예수 안에 있어야 O.K.입니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 하나님과 영적인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가까운가? 먼가? 이게 바로 행복지수입니다. 부디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쓴맛 인생이 아니라 단맛 인생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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