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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 기도 합시다 (삼상 12: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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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기도 합시다 (삼상 12:19-25)


상어는 바다의 제왕입니다. 바다 생명체 중에 최강자이고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그래서 바다 생명체들은 모두 상어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상어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 가운데  유독 상어만 부레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생존하려면 반드시 부레가 있어야 합니다. 부레가 있어야 물속에 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레가 없는 상어는 쉬지 않고 헤엄을 쳐야합니다.  그래야 물속에 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상어는 참 불쌍한 동물입니다. 계속 움직여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속 움직이다보니 상어는 바다 동물 중 가장 힘이 센 동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호령하는 바다의 절대 강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상어가 계속 헤엄쳐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상어가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고 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지 않고 쉬고 있으면 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버리고 맙니다. 상어가 가라앉지 않고 계속 움직일 때 상어 본연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 기도할 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상어가 계속 움직이다보니 힘이 강해져 강자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 기도하면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영적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마치 상어가 쉬지 않고 헤엄을 치는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어놓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다니엘의 적들이 다니엘의 이 기도 습관을 공격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적들은 아무리 다니엘의 약점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일한 약점 아닌 약점이 있다면 바로 이방 땅에서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적들은 왕을 찾아가 왕을 신으로 떠받들면서 왕 이외의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만들게 됐습니다. 이 법으로 다니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한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은 당시 정치 지도자였기에 이 법을 소상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을 어기면 어떻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조차 다니엘의 기도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단 6:10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법을 어겨서 법의 처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기도를 쉴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니엘의 기도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다니엘은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법을 어겨가며 기도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발각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만일 발각된다 해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저 감사했습니다. 

무엇을 감사했을까요? 이방 땅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음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만일 기도하다 발각되어 죽더라도 그것이 순교이니 순교할 수 있음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렇게 기도의 소중함을 깨닫고 살았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이방 땅에서 산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기도를 쉴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육신은 법에 처벌을 받아 죽는다 해도 기도를 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니엘처럼 기도의 소중함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기도하는 것이 법으로 금해진다 해도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다 발각되면 죽게 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기도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상황이라면 결코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니엘 못지않게 기도의 소중함을 깨닫고 기도에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특히 그는 중보기도에 철저하게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에는 영적인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습니다. 그 상징적인 모습이 삼상 2:12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인데도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2:17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이 두 사람은 제사장인데도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의 상황이 이 모양이니 성전 밖은 오죽했겠습니까? 저들은 이미 조상적에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살았습니다. 이제 급기야 하나님 아닌 사람을 왕으로 세워달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무엘이 저들의 주장이 너무도 강력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진노를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백성이 두려워서 사무엘에게 청했습니다.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삼상 12:19)

이 때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이 말은 "나는 너희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계속 기도해왔다. 또한 앞으로도 너희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계속 기도할 것이다. 나는 너희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것을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며 계속 기도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기도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무엘처럼 중보기도의 소중함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그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다면 쉬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기며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중보기도자들은 중보기도하는 것을 하나의 공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남을 돕는 일이요 하나님 앞에서 상 받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중보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중보기도를 하나님의 명을 생각하고, 중보기도를 하지 않는 것을 죄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쉬지 않고 중보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계속 기도해야할까요? 그것이 자신을 위한 기도이든지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이든지 왜 계속 기도해야할까요?

첫째, 기도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눅 18:1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친히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항상 기도하라고 명하셨을까요? 한 번 기도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시기 때문일까요? 마치 난청인 노인에게 말할 때 귀에다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듯이 하나님께서 같은 기도를 계속 반복해야만 알아들으실 수 있기 때문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신앙생활만을 강요하시기 위해서일까요? 그저 세상일 다 뒤로하고 오직 주님 앞에만 서 있게 하시기 위해서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항상 기도하라고 명하셨을까요?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그래서 낙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기도해야 낙심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파울로 코엘료라는 사람이 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에트라 수도원에서 아침기도회가 끝난 뒤 한 풋내기 수도사가 원장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요?" 원장이 답했습니다. "네 간절한 기도가 내일 아침 해를 뜨게 할 수 있느냐?" 수도사가 답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해가 뜨는 것은 우주의 섭리니까요?" 원장이 답했습니다. "네 말에 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 우리가 얼마나 기도하느냐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 풋내기 수도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쓸모없다는 것입니까?" 원장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절대로 그런 말이 아니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해돋이를 볼 수 없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셔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분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도 느낄 수 없어서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낙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켜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기도는 능력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약 5:1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는 놀라운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생각할 때마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성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출 17장 르비딤 사건입니다. 

모세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시내 광야를 행군할 때입니다. 르비딤이라는 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 처음 전쟁을 치르게 됐습니다. 느닷없이 아말렉 족속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땅의 거민들이고 전쟁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 땅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러본 족속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난 430년을 노예로만 살던 민족입니다. 전쟁 경험도 없고 준비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도 그저 지나가는 중입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는 승산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아말렉의 침공은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였습니다.

모세가 이 절박한 위기 상황을 대처해야만 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로 군대를 모집하여 아말렉과 전쟁을 치르도록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론과 훌과 함께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손을 높이 들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출 17:11에 이렇게 그 광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가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강력한 힘으로 밀고 들어가고, 반대로 모세가 기도를 중단하면 반대로 아말렉이 강력한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 결과는 저 산 아래 전쟁터에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산 위의 기도의 자리에서 좌우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바로 기도가 능력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아말렉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아말렉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a"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이 된 것입니다. 바로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에게 가져오는 통로인 것입니다. "+a"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a"의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말렉을 상대하듯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계속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잠 15: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린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창 5:24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 좀 엉뚱하지만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에녹은 자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동행을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녹의 기도를 늘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다 아예 하나님과의 동행을 계속하실 생각으로 에녹을 그대로 데려가신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 대화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이룹니다. 그 만남이 더해가며 하나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집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십니다.

저는 딸과 아들을 두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 저희 부부와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딸과 아들의 전화가 다릅니다. 딸은 수시로 전화합니다. 별 일이 없는데도 자주 전화합니다. 한 번은 제 설교를 인터넷을 통해 들었다고 전화했습니다. 마침 그 설교 중에 제가 찬송을 했는데 우리 아빠는 설교도 잘하지만 노래는 더 잘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한 달에 한두 번 전화할까 말까입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전화합니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마음이 다릅니다. 딸이 전화하면 기대가 됩니다. 오늘은 무슨 말로 나를 즐겁게 해 줄까? 그런데 아들이 전화하면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너무도 좋은 수단입니다. 우리가 계속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필요할 때만 기도 제목이 있을 때만 기도하면 안됩니다. 늘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교회는 또 다시 [5만 시간 기도대행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2008년 [만 시간 기도대행진]으로 성전재건축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5만 시간 기도대행진]으로 성전재건축을 구체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또 다시 [5만 시간 기도대행진]으로 성전재건축을 계속 진행해 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을 흔들림 없이 계속 굳게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계속 덧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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