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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씨뿌리는 비유(1) (마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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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비유(1)  (마 13:1-9)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어제 우리 교회는 두 날개 양육 시스템의 일환인 전인치유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110여 명의 성도들이 참여해서 많은 은혜를 받은 줄로 믿습니다. 두 날개 양육 시스템에 의하면, 전인치유 수양회는 열린 모임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성도들이 4 주간에 걸쳐서 새가족 교육을 수료한 후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인치유 수양회를 통하여 모든 쓴 뿌리를 뽑아내고, 옥토와 같은 마음 밭으로 변화된 후라야 양육 반에 들어가서 말씀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기획된 시스템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우리 교회가 가졌던 전인치유 수양회는 새 가족들이 몇 분 되지 않고 대부분 기존 신자들이었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성도들이 참여하여 쓴 뿌리를 뽑아낸 후,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씨 뿌리는 비유’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절묘한 타이밍이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그 감격 그 감사함에만 그칠 뿐, 실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성과 생활이 성장하지 못한 채 그대로 머물러 있는 상태가 허다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성장을 방해하는 적이나 장애물이 무엇인가 하는 그 대상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장애의 요인들을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면서, 신앙 성장의 장애 요인과, 성장치 못한 신앙이 가져오는 결과와, 성장해야 하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 즉 ‘게네사렛’ 호숫가로 나가셨습니다. 이 ‘게네사렛’ 호수의 이름은 다양합니다. ‘갈릴리 바다’ 혹은 ‘디베랴 바다’라고도 합니다. 물이 워낙 부족한 나라이어서 작은 호수임에도 그 나라 사람들은 곧잘 바다라고 부릅니다. 내륙의 호수로서 길이 약 21km, 그리고 폭은 약 11 km 밖에 안 되는 작은 호수입니다. 그래서 바다라고 하지만 짠 바다가 아니라 민물 호수입니다. 대체로 ‘게네사렛’이라고 많이 불리는데 그 원래의 뜻은 ‘부요의 정원’ 또는 ‘풍요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호수의 물은 송수관을 통하여 이스라엘 전국에 생활용수, 공업용수, 농업용수로 공급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곧 젖줄이요 생명선과도 같습니다.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잡히는가 하면, 사막가운데의 농장인 ‘키브츠’에 물을 공급해서 과수를 맺게 하고 또 스프링쿨러를 돌려서 잘 자란 채소에 흡족하게 물방울을 맺게 하는 정말 부요의 바다입니다. 이런 ‘게네사렛’ 호숫가에 풍요의 정원에 예수님께서 나아가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곳에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무리들이 해변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많은 무리가 모인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한 배에 올라 앉으셔서 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밭은 인간의 마음 또는 심령을 의미합니다.

첫째는 길바닥 같은 심령입니다. 4절에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라고 했고, 19절에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라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할 때”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돌짝밭 같은 심령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주님을 따르지만 어려움이나 핍박이 있을 때, 이겨낼 만큼 뿌리가 깊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으려 할 때 대체로 몇 가지 어려움이 따릅니다. 먼저 세상의 조롱이 따릅니다. 다음은 구체적인 핍박이 따릅니다. 세상과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핍박합니다. 성경은 “무릇 주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이면 세상이 우리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욕을 먹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아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라고 여기시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를 믿으면 자기 내부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어떤 이는 기뻐서 좋아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라는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육신의 충동이나 정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부에 번민이 생깁니다. 

과거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일들이, 이제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육신적으로는 악한 일을 하고 있는데, 내 마음은 선한 일을 추구 합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의 내부적 갈등이 계속됩니다.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인생의 목적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가 너무나 고고해서, 이것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을 것을 주님은 미리 아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내게 의가 없는 줄 알고, 이것 때문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과거에는 고통 받지 않았던 것으로 지금 고통을 받으신다면 감사하십시오. 

과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었던 것이 지금은 내 마음에 부담이 되고, 내 마음에 아픔이 될 때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거룩을 향해서 우리의 걸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과거에는 내가 예수 믿고 조그만 죄를 지어도 양심이 가책이 되었는데, 지금은 큰 죄를 지어도 양심의 가책이 없다면, 그러한 성도들은 시급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가시밭과 같은 심령입니다. 이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서 말씀을 막기 때문에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염려라는 것은 주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짊어진 짐, 곧 문제들, 걱정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주님이 다 맡아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재리의 유혹이란 말은 인생의 안전과 행복이 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 놓으면, 그 돈이 내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준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돈의 위력 앞에 마음이 흔들리고 유혹을 당합니다. 그 다음은 욕심입니다.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는 욕심이 나를 이끌 때가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옥토와 같은 심령입니다.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 시간은 이와 같은 네 종류의 마음 밭 가운데 길바닥 같은 마음을 어떻게 옥토로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길가와 같은 심령의 소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겸손하게 자기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아서 답답할 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날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언제 사람들이 마음을 강퍅케 했습니까?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마음을 강퍅케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면서, 세상의 멸망이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노아 혼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강퍅하게 했다는 이 표현의 당시 시대상은, 기껏해야 시집가고 장가가고 물건을 사고팔고 집을 짓고 헐고 하는 것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즘 이 시대는 자기를 위해서 많이 노력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구원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귀를 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많은 기회가 있지만,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러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강퍅할 대로 강퍅해져서, 롯의 집에 찾아온 천사와 남색 하고자 온 동리의 남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안 듣는 정도가 아니라, 그 심령이 참으로 강퍅해졌습니다. 롯의 사위들은 장인의 경고를 농담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벧후 3:4에 있는 말씀처럼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라고 하면서 주님의 재림이나 심판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년이 하루같이 길이 참으시면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주님은 언제 오시느냐? 주의 강림하심이 어디 있느냐? 창조할 때부터 하나도 변한 것이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주님의 강림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소돔과 고모라가 무서운 멸망을 당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회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옷을 찢고 자백했습니다. 온 백성들은 삼일동안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회개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넬료라는 사람의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0:33에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고넬료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넬료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행 16:14에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열어 말씀을 청종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주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대개 성도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기가 선 자리를 지지해 줄 때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성도의 굽은 것을 펴기 위해서 아픈 것을 지적하고 잘못된 것을 책망하면 ‘목사가 나를 쳤어!’라고 말합니다. 서울의 H 목사님에게 어느 날 한 신자가 이렇게 항의를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하신 설교 말씀 나를 두고 하신 거지요?” 이렇게 항의하는 신자에게 “네 물론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설교한 것은 들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성경 원리의 해석에 틀렸으면 얼마든지 지적해 주십시오. 그러나 성경 원리에 입각해서 말씀이 선포되어졌다면 순종을 하십시오. 성경을 고치는 것이 쉽겠습니까? 당신 행실을 고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랬더니 묵묵부답이더라는 것입니다.

부디 주님의 말씀을 접할 때 겸손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모범적인 교회이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 자세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살전 2:13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약 시대의 가장 모범된 교회, 사랑스러운 교회, 칭찬을 받는 교회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신앙을 계속 잘 유지하기 위해서, 말씀을 들을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롬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곧 말씀에서 납니다. 믿음은 모든 말씀을 뿌리로 하여 자랍니다. 그래서 성경을 겸손하게 읽는다던지, 주일 오후 예배나 수요예배 구역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동방교회가 멸망했는가?” 라는 책자가 있습니다. 동방교회는 오늘의 터키에 있었고, 그 터키에는 계시록에 나타난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있었습니다. 안디옥, 빌라델비아, 서머나, 등등의 아름다운 교회들이 모두 터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교도들이 들어와 다스리면서, 이들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 결과 말씀이 없는 고로 동방 교회들은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교회들이, 그리고 그 교회가 있던 도시들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성지순례 길에 그러한 교회들을 찾아보게 되었지만, 완전히 폐허뿐인 흔적들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반대로 중공의 경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일천만 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공이 50여 년 전에 나라를 개방하지 않고 문을 닫았을 때는, 기독교인이 불과 70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0여년 만에 일천만 명 이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중국의 경우 처음부터 제도 중심으로 교회를 시작하고 성장시켜 온 것이 아니라, 말씀 중심으로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정에 모이면 의례히 성경공부부터 시작했으며, 말씀으로 서로 권면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30년 동안 기독교가 다 죽은 줄 알았으나, 막상 문을 열교 보니 그 바위덩이 같은 핍박 밑에서도 새파랗게 자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D. L Moody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듭난 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기로 서약하면서 생활을 했는데도 늘 넘어집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당황한 무디는, 산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산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중에 어떤 때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그를 휩싸기도 했습니다. “아 이제 나는 됐다!” 라고 생각한 무디가 산을 내려와서 살다보면 그 은혜가 한 달을 못 갑니다. 그래서 “아하! 혼자는 안 되겠구나! 유명한 부흥사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다.” 라고 생각한 무디는 생업을 팽개친 채, 열리는 부흥회마다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참석한 부흥집회에서 깊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제 이런 귀한 은혜 속에서 승리의 삶을 영위하리라.” 그리고 나서 한두 주일 지나고 나니까, 또 비참한 자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아무래도 화인 맞은 양심인가 보다. 성경 속에 나타나는 길바닥 같은 마음처럼 씨가 자라지 못하는 믿음인가 보다.” 이렇게 무디는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며 혐오하다가, 어느 날 문득 펴든 성경이 로마서 10:17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는 믿음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읽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 무디는 위대한 무디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과 늘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귀한 은혜를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어도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사이가 나쁘면, 그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저 사람은 위선자다.” 라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또 사람을 강단에 세워놓고 그 사람을 멸시하면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절대로 은혜를 못 받게 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손해입니까? 물론 목사에게도 손해일 수 있지만, 치명적인 손해는 신자인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딤전 5:17에 보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존경하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능력으로 임하려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리차드 디한(Richard Dehann)은 신자들의 설교를 듣는 자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사가 설교할 때 눈을 똑 바로 쳐다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깊게 들으면서 말씀이 마음을 울릴 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아멘을 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입으로 해도 좋습니다. 둘째, 말씀이 은혜가 되었을 때, 그 은혜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표현을 잘하지 않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표현이 안 되면, 영원히 묻히는 짝사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표현이 필요합니다. 아내가 정성껏 마련한 반찬을 먹으면서 참 맛있다 하면 어디가 덧납니까? 아내가 교만하게 됩니까? 결코 그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남편의 칭찬이 격려가 되어서, 다음에 더 맛있게 반찬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목사가 전한 말씀에 감사할 줄 알면 잘못된 것입니까? 목사가 교만할까 보아서요? 

그것은 목사의 책임이고,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교회를 잘 봉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자라는 모습의 구체적인 평가는, 그의 봉사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가르치는 분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행동이 없이는 믿음이 잘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9절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보아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듣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듣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 맞아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매 맞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잃어버리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잃어버리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어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끝까지 못 깨닫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자와 같이 지옥 가서 깨닫는 사람도 있으나, 가장 어리석은 깨달음이요 소용없는 깨달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이 아니라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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