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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렁 메우기 (눅 17: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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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 메우기 (눅 17:19-26)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 국치 100년과 일본의 합리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오늘 1910년 8월 29일, ‘조선의 황제는 조선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에 의해 발표됩니다. 

1800년대 말 조선이 개항을 시작한 이후에 조선보다 일찍 개항하여 서구화에 열을 올리던 일본은 서구로부터 시작한 제국주의의 흐름에 편승하여 아시아를 일본의 식민지화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한 일본은 점점 노골적으로 한반도를 수탈하기 시작합니다.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 정미7조약을 통해 내정권까지 장악한 이후 1910년 8월 29일, 100년 전 오늘 조선과 일본의 완전한 병합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35년간의 식민지배는 1945년 8.15광복을 맞으며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일제가 남긴 잔혹한 식민지배의 상처는 경술국치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쉽게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20만 명의 조선의 딸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습니다. 200만 명의 조선의 아들들이 일본의 제철소와 탄광으로 끌려갔습니다. 또한 일본은 한반도 곳곳을 약탈했습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아갔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사람들과 조선의 땅과 조선의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일제의 식민지배가 우리에게 남긴 큰 상처는 남북의 분단입니다. 오랜 식민지배 후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있었지만 열강의 간섭을 막아낼 정도로 자립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상황은 분단으로 이어졌고, 분단은 6.25로 이어졌습니다. 

지난주일 22일 오후 2시 일본 도쿄에서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모여 한일시민공동선언 일본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천여 명의 한일시민단체 회원들은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병합조약은 불법·무효임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실행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함과 식민지배의 사실과 가해·피해의 실상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식민지배진상규명법을 제정해야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었지만 무척 희망적인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회는 순조롭게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극우단체들은 ‘조선의 여성들은 스스로 원해서 종군 위안부가 된 것이다.’ ‘한일합방으로 조선은 일본의 큰 도움을 받았다’며 차량으로 본 행사장 진입을 차단하고 취재 기자들을 위협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 극우단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합리화’가 떠올랐습니다. ‘합리화’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 중 하나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 살짝 자기 편한 식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자존심이 손상당하는 것을 막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일본의 극우단체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배가 한반도에 가한 ‘강제’를 ‘자발’로, ‘수탈’을 ‘발전’으로 왜곡시킴으로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며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니들이 원해서 전쟁에 나간거야’, ‘우리가 도와주었으니 너희같이 미개한 나라가 이만큼이나 발전한거야‘. 이런 일본인들의 태도야 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에 ’반(反)’하는 태도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로 존재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현해탄만큼이나 깊고 어두운 간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채 아직도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한(恨)을 더해가고 있으며 양국의 미래까지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깝고도 먼 사이, 깊고 어두운 간극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 부자와 나사로

오늘 말씀에 어떤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그냥 부자가 아니라 상당한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로 왕족이 입었던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으며 늘 호화롭게 살았다합니다. 

부자에 대한 짧은 소개에 이어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시 짧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시간이 지나 그 둘은 결국 죽습니다. 부자는 장사 되었습니다. 아마 살아생전에 그랬듯이 호화롭고 화려한 장례가 치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도 그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 누워 병든 몸으로 음식을 구걸하던 한 거지의 죽음. 그 시신의 처리는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그의 시신은 거의 쓰레기 취급을 당했을 것입니다. 살아서도 그 삶의 모습이 극과 극이더니 삶의 마지막 모습, 장례까지 극과 극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음부로, 하데스라 하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이 부분은 권선징악(勸善懲惡),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는 우리를 당혹케 만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부자나 거지 나사로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놀부가 흥부를 대하듯 그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매몰차게 대했다던지, ‘왜 매일 남의 집 앞에 와서 구걸질이야’하며 뺨이라도 한 대 때린 일이 있다면, 말씀에 수긍하기가 한결 수월했을 것입니다. 또 그에 이어, 거지 나사로가 ‘주님 저 부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라며 스데반처럼 기도를 드렸다는 내용이 있었으면 그 역전의 상황을 좀더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난 부자는 그저 한 명의 부자였고 나사로 또한 그저 한 명의 거지였습니다. 아니, 조금 추론을 해보자면 그 부자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찌되었건 부자는 거지가 볼썽사납게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와서 구걸을 하는 것을 그냥 두었습니다. 허락에 가까운 묵인을 해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보면 그 부자는 그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거지가 자기 집 대문에 진을 치고 누워 구걸해도 그냥 묵인해 주는 사람, 더 나아가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사람. 부자는 그렇게 나름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죽어 가게 된 곳이 지옥이라니요? 좀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다 보면 더욱 당황스러운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지옥불의 뜨거움을 견디다 못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주 안쓰러운 장면입니다. 만약에 제가 아브라함의 자리에 있었다면 물 한 방울이 아니라 한 대접은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상의 존재치고는 아주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대답을 합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아브라함의 반응은 한마디로 너무 합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자신을 꺼내 달라, 놓아 달라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저 물만 조금, 그것도 손가락에 찍은 물 한 방울만이라도 달라는 것인데 안 된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매정하게 부자의 청을 거절하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부자는 이미 세상에서 살면서 누릴 호사 다 누렸기에 죽은 다음의 세상에서는 그가 누릴 호사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호화스러웠던 옛날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합니다. 

둘째, 지옥의 부자와 아브라함 품 안의 나사로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있어 서로 오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다 이 구렁텅이 부분에서 생각이 멈추었습니다. ‘구렁텅이… 이렇게 서로 볼 수 있고 말도 나눌 수 있는 거리인데 도저히 오갈 수 없는 구렁텅이란 도대체 어떤 구렁텅이일까?’

서로 볼 수도 있고 말도 나눌 수 있는 거리이지만 서로의 고통에 대하여는 전혀 무감각한 거리, 그 간극으로서의 구렁텅이.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습니다. 날마다 잔치하듯 호화롭게 생활하던 부자의 잔칫상과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몰골로 그 잔칫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걸하기 위해 나사로가 누워있던 대문 사이의 거리, 그 간극. 지옥불의 부자와 아브라함 품 안의 나사로 사이에 놓여 있는 구렁텅이는, 잔칫상의 부자와 대문 밖 맨 바닥의 나사로 사이의 거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렁텅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니요 아브라함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부자 본인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가 살아생전 나사로 사이에 만들어 놓은 거리와 간극은 죽어서도 그대로 존재했습니다. 서 있는 위치가 바뀐 채 말이죠. 

부자.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 받으며 살았을지 모릅니다. 좋은 아버지요 좋은 남편, 좋은 친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사로와 자신의 사이에는 지옥을 만들고 살았습니다. ‘거지가 다 그런 거지’, ‘이 놈의 거지가 어쩌다 우리 집 앞에 오게 된 거야. 그저 나 정도나 되니 쫓아내지 않고 여기서 구걸하며 살게 해주는 거다’하며 큰 선심 쓰듯 나사로를 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부자는 나사로의 고통과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그와 자신의 거리를 이런저런 이유로 합리화하며 살았습니다. 그 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될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죠.

․ 기억투쟁

재일교포 2세요 저술가인 서경식 선생은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묻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일본 식민지배의 아픔과 분단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게 된 서경식 선생님은, 역사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해야하는 고통들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는 강자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기 쉽고, 강자의 승리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약자의 고통은 외면당합니다. 그러나 진정 어제의 역사보다 오늘의 역사가 나으려면, 오늘의 역사보다 내일의 역사가 나으려면 강자의 폭력에 의하여 죽어간 무고한 약자들의 고통을 투쟁하듯 기억해야만합니다. 그것을 이른바 기억투쟁이라고 합니다. 

그런 기억투쟁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아니 그런 기억투쟁을 당신의 본분으로 삼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나사로의 이름 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나사로. 히브리어로는 ‘엘레아자르’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사로와 같은 이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강자의 역사가 기억하려하지 않는 약자의 고통을 기억하고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수많은 나사로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그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의 이야기를 당신의 이야기로 삼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2007년 일본에 생명평화역사 기행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후쿠오카의 오다야마 묘지라는 곳에 들렀습니다. 그 곳은 조선인의 시신 80여 구가 묻혀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일본에 끌려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종살이를 하다가 8.15 해방을 맞아 어렵사리 배를 구해 조국으로 돌아가려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현해탄을 다 건너지 못하고 태풍을 만나 익사하게 되었고 그 시신이 죽어서도 돌아오고 싶지 않은 땅, 일본으로 다시 떠내려 오게 된 것입니다. 분봉도 없이 평지 처리된 묘역에는 위령비가 세워져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일본인, 가와모토 요시야끼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해마다 9월 17일에 추모회를 갖습니다. 이렇게 기념사업을 지속하는 이유는 4가지입니다. 첫째, 희생자에 대한 추모를 위해서입니다. 이곳은 죽은 자의 침묵의 함성을 듣는 곳입니다. 저희들은 ‘편안히 잠드세요.' 라고 추모하지 않습니다. ‘억울함을 푸세요. 원한을 얘기하세요. 크게 말해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둘째, 이곳은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강제연행, 강제징용 등의 일본의 만행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셋째, 오늘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묻힌 이들은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살해당한 피해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잊어버리려는 역사의 인식을 바로잡아야합니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재일교포, 한국인, 모두가 그런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넷째, 맹세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맹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날은 정말 너무 더웠습니다. 기온이 40도와 41도 사이를 오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잠깐이라도 양지로 나갔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늘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가와모토 요시야키 목사님은 커다란 밀짚모자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시고는 절대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 뜨거운 햇볕을 달게 받는 벌처럼 받고 계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 또한 기억투쟁을 하고 계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죽음, 그들의 억울함과 원한을 기억하려 힘겨운 투쟁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 구렁 메우기

주위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지옥의 구렁텅이들을 봅니다. 그런 구렁텅이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도 있고 인간과 자연, 나와 너 사이에도 있습니다.

그 어떤 구렁텅이든, 그 안은 잊혀져서는 안 되지만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잊혀지기를 강요당한 고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많은 부자들에 의하여 무시당하고 외면당한 수많은 나사로들의 피눈물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일본 소설가 엔도 슈샤꾸는 그의 대표적 소설, [침묵]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데 있었다.’

우리 누구나 그 부자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 고통 준 바를 망각한다면 바로 우리가 그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와의 사이에 만든 구렁텅이가 있다면 그 구렁텅이를 메우십시오. 그런데 제가 보니 많은 구렁텅이는 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쪽에서 만든 구렁텅이가 있고 그 위에 다른 한 쪽에서 만든 구렁텅이가 놓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나를 향해 만들어 놓은 구렁텅이는 내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그를 향해 만든 구렁텅이는 내가 메울 수 있습니다. 그 구렁텅이는 삽과 포크레인으로는 메울 수 없습니다. 그 구렁은 기억투쟁으로 메울 수 있습니다. 그릇된 자기 합리화를 버리고 그의 입장이 되어 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을 때에만 그 구렁은 메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묵묵히 구렁을 메워가고 계십니다. 잔칫상의 부자가 대문 밖의 나사로에게 다가가 그를 형제로서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 흘릴 수 있도록 구렁을 메워가고 계십니다. 또한 언젠가 아브라함 품의 나사로가 지옥의 부자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 지으며 ‘이제 그만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나오라’ 손 내밀 수 있도록 구렁을 메워가고 계십니다. 

이 가슴 벅찬 하나님의 사역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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