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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만하신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렘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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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하신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렘 23:24) 


(렘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주일 아침에 교회 오기 전 식사하고 이를 닦았는데 예배 후 이런 메일을 받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귀하의 아래 어금니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아울러 잇몸이 약화되었습니다. 월요일 오전 시간에 아무 병원 치과에 오셔서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진료시간은 약 30분, 치료비는 3만 원 정도, 담당의사는 아무개입니다.”

알고 보니 칫솔이 자동으로 치아 상태를 감지해 치과에 정보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러닝머신은 무릎 관절 이상을 류마티스 내과에 알렸고, 변기는 내장의 상태를 속속들이 확인해 놓고 있고, 냉장고는 채소가 신선도를 잃었다고 체크했으며, 세탁기는 겨울에 입었던 코트의 정전기가 건강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물에 컴퓨터를 내장하고 이것을 네트워크로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합니다.

자동차에도 이것을 부착하면 지능적인 차가 되어 자동으로 목표를 찾아갈 수 있다합니다. 요사이 많은 운전자들이 장착하고 다니는 내비게이션은 문제도 아니라 합니다.
이렇게 사물이 지능화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접속하는 기술을 가리켜‘유비쿼터스 컴퓨팅’이라 한다합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접속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면서 인간들은‘유비쿼터스 사회’의 도래를 말합니다.

유비쿼터스 (ubiquitous)는 라틴어로‘언제 어디에나 있는’이라는 뜻이라 합니다.
널리 있는, 넓게 퍼져 존재하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가리키는 말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에 충만하심같이 우리 삶에 언제 어디서나 접속시키겠다는 의미의 유비쿼터스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각종 기계들이나 전자제품도 내 잇몸 아픈 것까지 알려주심 같이,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유비쿼터스의 하나님께서 충만하심으로 계십니다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자들을 책망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 친히 밝혀 주신 말씀을 들려줍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자기 마음의 잘못된 것을 근원으로 삼고 말하며, 또 백성들이 듣기 원하는 것을 재빨리 알아서 그것으로 인기를 얻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나 메시지도 없이 그저 나가서 자기 생각대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자들의 이런 태도에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렘 23: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그리고 다시 말씀 하십니다
(렘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충만하신 하나님 안계신 곳없이 계십니다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시 139: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영국에 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란 신의 존재에 대해 믿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생활에 대해서 상당히 비웃고 야유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가 하루는 런던거리를 지나가다가 노동자 한 분이 교회를 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좀 골려주자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지금 어디를 가고 계십니까?"
“예, 교회갑니다.” 
“자, 내가 한 가지 질문하겠는데 대답 좀 해보시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큰 하나님이요. 작은 하나님이요.” 

이 철학자는 어떤 대답이 나오던 간에 그 사람을 좀 골려줄 준비를 하고 대답 듣기를 기다리는데 이 노동자는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나 크셔서,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그를 포용하지 못하는 분입니다. 동시에 제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나 작으신 분이시라서 내 자그만~한 마음속에도 들어와 계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후에 철학자가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었고, 또 감화를 받은 일도 많지만, 내가 읽은 그 모든 책들이 주는 감화보다도 더 큰 감화를 이 소박한 노동자가 하는 말에서 나는 받았다” 고 그랬습니다.

성경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충만하신 하나님 안 계신 곳 없이 계시며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139: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자기 아들과 같이 바람을 쐬러 들판에 나갔다가 탐스럽게 열린 참외를 보았습니다. 하도 먹음직스럽게 보여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망을 보라고 이르고 자기는 밭으로 들어가 참외를 따려 하는데 갑자기 아들이 소리를 쳤습니다. '아버지 누가 봐요!' 깜짝 놀란 아버지가 밭에서 나와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본단 말이냐 아무도 없는데....' 아버지는 다시 밭으로 들어갔고 막 참외를 따려는 순간 아들이 또 누가 보고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본다는 거니? 너 아버지를 놀리는 거냐?'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천진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고 계셔요'

충만하신 하나님 안 계신 곳 없이 계시며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정 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정은 까마득히 높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사실 천정의 모습이 한 눈에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천정의 벽에 가까이 붙어서 선 하나 하나를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여보게, 여기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해두고 내려오게나.'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천정에서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자네겠지.' '맞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 이하로 일할 수는 없네.' 

충만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앞에서 바로 행하여야 합니다

충만하신 하나님 안 계신 곳 없이 계시며 보시고 아시되 혀의 말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139: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7세기 영국에서 경건운동인 '퀘이커교'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형식을 부정하고 '내면의 빛'을 따르며 영적인 체험과 선행을 강조했습니다. 영국에서 이 운동이 한창 일어날 때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이는 쾌이커교의 귀부인이 '어떻게 자신을 가꿔 그런 매력을 지니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합니다. '저는 입술을 위해 진리를, 음성을 위해 기도를, 눈을 위해 긍휼을, 손을 위해 자선을, 몸가짐을 위해 정직을, 마음을 위해 사랑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충만하신 하나님을 믿고 도움을 구할 때 즉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옛날 어느 수도원에 훌륭한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 중에 특히 한 아이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 아이는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못생겼고, 무엇을 가르쳐도 늘 쉽게 잊어버리는 아이였는데도, 원장은 특별히 그 아이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제자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그 불만이 쌓이고 쌓여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모든 제자들이 마당에 모여 스승인 원장에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내가 문제를 내마. 그것을 풀어 가지고 오면 내가 왜 이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는지 알게 될 게다' 원장은 제자들에게 작은 새 한 마리씩을 주고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해질 때까지 그 새를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해질녘이 되자 제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여 수도원 마당에는 죽은 새가 쌓여 갔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이의 손에는 작은 새가 산 채로 있었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저 바보는 원장님이 무얼 시켰는지도 모르나 봐!' 하며 비웃었습니다. 원장은 왜 새를 죽이지 못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어요. 

우리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 하나를 키우는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원인 모르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먹구름이 그 가정을 덮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린 딸이 엄마를 땅에 묻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현관에서부터 시작하여 방. 부엌. 응접실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두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어두운 밤이 되었습니다. 아빠가 딸을 침대에 눕히고 기도해주면서 편히 자라고 하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딸의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가 가보았더니 “아빠. 무서워요. 어두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빠가 딸에게 타이릅니다. “아무리 어둡고 무서워도 아빠가 있으니 무서워 말고 조용히 자거라.” 그런데 어린 딸이 눈을 감고 한참 있더니 “아빠. 아무리 어두워도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라고 하며 안심하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때 그 한 마디에 딸과 함께 상심했던 이 아빠는 새 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딸의 입술을 통해서 나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신 것 감사합니다. 나의 주변이 아무리 어두워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므로 실망치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가정에 먹구름이 덮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같이 느껴지지만 내가 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고 힘을 얻습니다. 평안을 얻습니다.” 

이렇게 그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의 마음에 있던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것을 그는 느꼈습니다. 그를 사랑하시는 면에서 만세 반석이 되시고. 변함이 없으신 충만하신 하나님을 믿을 그 때에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헤롯이 야고보의 순교를 유대인들이 기뻐했기 때문에 교회를 박해하기 위한 추가 조치로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행12:3-4) 사도 야고보의 순교와 계속된 베드로의 투옥은 예루살렘 교회의 존폐를 가름하는 위기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처형 전날 밤에 주님께서 보낸 천사에 의하여 쇠 사슬이 벗겨지고 감목문은 저절로 열려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이르니 앞에는 시퍼런 바다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뒤에는 수많은 애굽 군대가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급한 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을 확신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 담대히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3:13-14).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밀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메뚜기를 날렸듯이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이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바닷물은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바닷물이 마른 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은 벽이 되어 멈춰 섰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지로 바다를 건넜습니다.

갈멜 산에서 엘리야는 결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전의 날이 되어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참 신을 섬길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제의하기를 이 송아지 제물 위에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 참 신으로 드러날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아침부터 열심히 기도를 드렸으나 무응답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의 신과 그들을 조롱하였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12지파의 수효대로 12돌을 취하여 여호와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물 주위에 도랑을 판 후 송아지 제물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드디어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자 곧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여 제단은 물론이거니와 도랑의 물마저도 다 태워 버렸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지난날의 은총을 생각하게 합니다. 목련과 벚꽃을 피워 환한 봄을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짙은 녹음으로 세상을 푸르게 하셨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그 나무의 푸른 잎들은 고운 단풍으로 물들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조금 늦어 벚꽃의 개화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또 단풍의 때를 자칫 놓치기 쉽습니다.

세월과 함께 우리의 삶도 빠르게 흘러갑니다.

(벧전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아름다운 것은 짧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웠던 때도 속히 지나가고 맙니다. 짧은 인생에도 하나님이 계시어 벚꽃의 허무함으로 서러워하는 사람들에게 푸른 솔 같은 소망을 주십니다.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꿋꿋이 살아가는 솔의 삶에 큰 관심을 두시고 인도하시는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온 땅에 햇볕이 가득한 여름, 하나님께서 세상에 충만하시니 아름답고 충만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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