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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에 결심한 것을 행하십시오! (왕상 19: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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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결심한 것을 행하십시오! (왕상 19:19-21)


지난 팔월 한 달 간, 예배의 배경 이미지는 사막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미지는 한 사람이 사막을 혼자 걸어가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하늘에서 물을 내리고, 불을 내렸던 엘리야였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쳤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생명의 위협 앞에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던 사람도 탈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사막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탈진한 엘리야를 회복시켜주시기 위하여 잠을 재우고 떡과 물을 먹이셨습니다. 터치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인 탈진에서 벗어나 영적 충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이미지는 하늘과 땅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모래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호렙산 굴 속에 들어간 엘리야는 바람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우리는 영혼 깊숙이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네 번째 이미지는 모래 언덕만 보이는 것 같지만 그 너머 저 멀리 푸른 땅과 파란 하늘이 보이는 것입니다. 여전히 부끄러운 자아에 얽매여 있는 엘리야였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두 나라의 왕을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를 이을 선지자를 세우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이미지는 사막의 카라반들이 낙타에 짐을 실고 떠나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결심하고 행동하여야 합니다.

사막은 생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꿈틀거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막은 영적 생명이 소생하는 곳입니다. 성경에서 사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 기도하신 후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음성을 듣고, 사명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사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생활의 즐거움에 파묻혀 하나님을 만나는 고독을 느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영혼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조용한 새벽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여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부단히 연습하여야 합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서 그 음성 듣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생활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미한 음성을 들은 후 엘리야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하여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구를 만났습니까?

I. 만남

19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9a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엘리야는 일어나 호렙산 굴을 떠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만 남았다’고 불평하며 죽기를 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하여 다시 길을 떠납니다.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쳤던 그 길을 다시 되짚어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사명에 순종하기 위하여 올라갔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엘리야가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엘리사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16b)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는 필연적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가수 노사연이 노래하는 ‘만남’의 노랫말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이미 결정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자신이 결심하고 행동하므로 이루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미처 깨닫지 못한 만남도 있습니다.
19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9b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는 열두 겨릿소, 스물네 마리의 소로 밭을 가는 큰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는 능숙하게 밭을 가는 유능한 농사꾼이었습니다. 그에게 엘리야와의 만남은 불현 듯 다가온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의 명성이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2. 누구에게는 우연적 만남입니다.
     
사람들의 삶에는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만남이 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계획도 없이 다가오는 만남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 중에 다가오는 놀라운 일들이 있습니다. 처음의 만남에서는 그 결과를 전혀 짐작조차 못하는 만남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계획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하나님께서도 모르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모르고 우연이라고 할 뿐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롬 8:28[공동])는 것을.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어떤 만남을 가져야 합니까?
19절 세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9c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신에게 일어날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엘리사에게 엘리야가 다가갔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보통 겉옷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준 것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3. 누구에게는 의도적 만남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우연입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필연적인 뜻을 나는 사람은 우연을 깨뜨리기 위해서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향하여 의도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깨닫게 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필연적인 뜻을 아는 여러분, 여러분은 깨닫지 못하고 우연이라는 사람들에게 사명으로 다가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연한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결심합니다. 어떤 결심을 합니까?


II. 결심

20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20a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엘리야를 만난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던 소를 버렸습니다. 엘리야에게로 달려와서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소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나가던 사람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휙 던져 줍니다. 그러자 밭을 갈던 사람이 달려와서는 ‘부모님과 뽀뽀하게 해 주세요’하고 외칩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엘리사는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던져 줄 때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을 부르시는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밭을 갈던 소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입맞춤으로 부모님을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입맞춤’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적 인사법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작별하겠다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이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1.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버리다’[bz"[;/아자브]는 말은 ‘버리다’는 뜻뿐만 아니라, ‘떠나다’, ‘무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다른 측면에서 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물건을 만난 사람은 그 동안에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립니다. 천국의 비유에서 보화가 숨겨진 밭을 발견 사람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보화가 숨겨진 밭을 샀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다른 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을 때, 그는 배와 그물과 부모를 떠났습니다(마 4:20). 일찍이,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자신의 고향을 떠났습니다(창12:1-4).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난 사람은 그동안 주인으로 여기고 따르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전에 좋아하던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린 것이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버려야 할 것을 생각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생각난 버려야 할 것을 버리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또 무엇을 결심하였습니까?
     
20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20b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한 후에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2.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기서 ‘따르다’[&l'h/하라크]는 말은 ‘함께 길을 걷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딘지 함께 있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막 3:14). 마음만 함께 있고 몸은 따로 있는 것은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결심하여야 합니다.

또 무엇을 결심하였습니까?
     
20절 세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20c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공동번역에서처럼 “어서 가보게. 내가 어찌 작별 인사를 금하겠는가?” 하는 긍정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새번역에서처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짐짓 딴청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사에게 진짜로 결심했느냐고 그 진정성을 묻는 것입니다. 앞에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아무 말 없이 겉옷을 걸쳐 주고는 자기 길을 휘적휘적 갔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뛰어서 엘리야를 좇아가야 했습니다(:20a). 엘리사는 진심으로 엘리야를 따르겠다고 스스로 결심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3. 진정으로 결심하였습니다.
     
결심에는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일시적인 감정으로 결심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결심은 의지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여자가 자신과 결혼하자는 남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100일 동안 밤마다 집 앞으로 찾아와 주신다면 당신 뜻대로 결혼하겠어요.” 
     
그 날 밤부터 그 남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 여자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 증거로 집 앞에 서 있는 큰 나무 밑에다 금을 그어 놓았습니다. 99일째 밤은 폭풍우가 몹시 몰아치는 밤이었습니다. 여자는 비바람 속에서 금을 긋고 있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이에 감동하여 우산도 쓰지 않고 맨발로 남자에게 달려가며 말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어요. 내일 밤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우리 지금 당장 결혼해요” 
     
그러자 금을 긋던 남자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습니다. 
“저… 저는 아르바이트생인데요.”
     
혹시 연애편지는 대필을 하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A W 토저는 사랑을 감정적인 사랑과 의지적인 사랑으로 나누었습니다. 감정적인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꺼지고, 올라갔다 떨어졌다 합니다. 그러나 의지적인 사랑은 의지적 행동이 반복됨으로써 완전히 체질화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우선 그렇게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먼저 자신에게 ‘사랑 없음’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겠다고 결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지적 결심은 반드시 행동이 따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결심은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결심입니다. 그것이 의지적인 결심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행동입니다.


III. 행동

2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1a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엘리야를 만나고 따르기고 결심한 엘리사는 집으로 돌아가 황소 두 마리를 잡고 쟁기를 부수어 그 고기를 구워 동네 사람들에게 대접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소를 부리며 농사를 짓던 엘리사가 소를 잡고 농기구를 불살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는 
     
1. 결심을 행동하였습니다. 
     
마음속에서만 머물러 있는 결심은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다가 안 되면 말지’ 하는 것은 스스로 실패하기로 마음먹는 것입니다.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사람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과테말라 한인교회 김상돈 목사님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교목으로 사역하셨습니다. 학생들을 목회하면서 많은 보람을 느끼며 살던 중, 과테말라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솔직히 안 되면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출발하였습니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친구 목사들이 준 선물을 풀어보다가 큰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김상돈 선교사 과테말라에 잠들다’ 
그것은 자신의 비석에 새길 비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였습니다.
“아! 선교사는 한번 가면 그만이구나. 다시 돌아오는 왕복티켓이 없구나. 
성경에서도 ‘가라!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지, 갔다 잘 돌아오라는 말씀이 없구나.”
     
비행기 안에서 비장한 결심을 한 김상돈 선교사는 오늘까지 20년 동안 과테말라에서 멋지고 아름답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영적인 배수진을 쳐야 합니다.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오직 앞으로 나가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길이 결코 쉽고 편안 길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가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2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1b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엘리사가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 다 내고 엘리야를 따라가서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수종 드는 것이었습니다. ‘수종’[tr'v/솨라트]은 하인이나 경배자로서 ‘시중들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섬기다(minister), 봉사하다(serve)를 의미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가서 그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손 씻을 때 손에 물을 부어주는 것과 같은 허드렛일을 하였습니다(왕하 3:11). 큰 농사를 짓던 사람이 궂은 일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2. 섬김을 행동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편안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폼 나고 위대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섬기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만 바라며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고, 섬김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추운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느린 속도로 조금씩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 나무껍질 틈새에서 벌레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달팽이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구나. 저 위에는 사과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러자 달팽이가 계속 기어오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이면 사과가 열릴 거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행동을 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좌절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을 의지 하고 행동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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