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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득이 필요할 때 (고전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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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이 필요할 때 
 김영준  2010.08.29 
  
고린도전서 2:1-12 
 
저는 우리 교회 이름이 ‘기쁜소식교회’이기 때문에 성경이나 찬송가에서 ‘기쁜 소식’이란 단어를 보면 참 반갑고 기쁩니다. 역시 교회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기쁜 소식’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찬송가가 아홉 장이나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상당히 많은 찬송가에 우리교회 이름이 등장을 하는데, 찬송가 75장 ‘창조의 기쁜 소식 온 세상 널리 전하세’, 111장 ‘천사의 기쁜 소식 목자가 듣고서’, 255장 ‘이 기쁜 소식을 곧 전하라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하라’, 그리고 179장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성령이 오셨네’. 그 이외에도 다른 찬송가가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찬송가들은 주로 성탄의 소식이라든가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로서 기쁜 소식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179장은 성령이 오셨다는 소식을 기쁜 소식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 그것이 기쁜 소식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분이고 우리가 가장 모르는 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삼위하나님 중에 성령이 제일 활발하고 제일 우리와 가까운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보좌 위에 앉아계시고 예수그리스도는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성령은 어디에 계시느냐,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고 교회와 함께 계십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란 책을 보면 마귀가 화로에다가 물을 뿌려서 그 화로의 불을 끄려고 하는데 꺼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화로 뒤에 성령이 계셔서 은밀히 불에다가 기름을 부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말하면 그것처럼 막연한 말이 없습니다. 아주 애매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성령을 경험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이것은 좀 더 구체적이고 주기적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은혜를 받을 때마다 경험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제가 느끼는 것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가 이후에 성령체험을 한 다음에 깨달았어요. 과거에 내가 가끔 예배드릴 때 느꼈던 그것이 성령이었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후에 신앙 연조가 깊어지게 되니까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을 말하는 사람,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을 경험해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여전히 침묵하시는지, 하나님이 여전히 부재중인지를 말해야 됩니다. 현재 교회의 침체 이유는 성령과의 접촉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있는데 성령이 없어요, 도덕은 있는데 성령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와서 느끼고 얻는 게 없어요. 그러니 교회에 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독일에 음악을 공부하러 간 어느 학생이 그 마을에 교회가 다섯 개가 있는데 교인들이 너무 없어서 그 다섯 개의 교회가 교인들을 합쳐서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어요. 나머지 네 교회는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당들은 역사가 수백 년이나 되고 아주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을 갖춘 고딕스타일의 건물들이에요. 아주 멋있고 유서가 깊은 예배당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들 중에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어요. 다섯 개 교회 중에 네 개가 문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독교를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고 예수를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과정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악해서 사람이 세속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교회 생활이 의미가 없고 와닿는 게 없고 얻는 게 없다면 우리교회도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얻기 때문에 옵니다. 얻으면 다시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 얻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경험하면 교회에 마음이 끌리고, 마음이 열리고, 믿고 싶고, 가고 싶고, 예배하고 싶고, 배우고 싶고, 배우고 있다고 느끼고, 내가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그리고 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기쁜소식이라고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원시 기독교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목회론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목회론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고 사도바울이 발견한 바, 유일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성도들의 믿음을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발견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4-5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권하는 말’이란 것은 설득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믿게 하기 위해 내가 지혜를 동원하여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설득위주, 설명위주입니다. 설명으로 도배를 합니다. 권고, 설득, PR 세일즈, 마케팅 어떻게 하면 믿게 할까, 어떻게 하면 교회에 오게 할까, 어떻게 하면 배우게 할까. 기독교는 오늘날 하나의 빅 PR 프로모션 캠페인, PR 캠페인으로 변질을 했는데 그러나 설득작업으로 사람을 믿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설득해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사람의 설득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지혜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돼지 3형제와 비슷합니다. 아기돼지 3형제 이야기 들어보셨죠? 하나는 짚으로 집을 짓고 한 형제는 나무로 집을 짓고 한 형제는 벽돌로 집을 지었어요. 그런데 늑대가 와서 후~ 불었더니 짚으로 된 집도 날아가 버리고 나무로 지은 집도 날아가 버렸는데 벽돌로 지은 집이 남았다. 이것이 아이돼지 3형제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지혜가 있는 동화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짚으로 지었느냐, 나무로 지었느냐, 돌로 지었느냐.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지혜에 기초한 믿음은 짚으로 지은 집과 같아요. 금방 무너져요. 누가 와서 철학을 전하고 세상 생각을 전하고 의심을 전하면 금방 무너집니다. 

사람의 지혜에 기초했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의 설득과 또 다른 사람의 논리를 동원하면 금방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한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말,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할 수 있느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입니다. 4절에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압니다. 사도신경에 “성령이 계시는 것과”; 성령의 존재를 우리가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성령의 나타남을 경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성령은 나타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말은 성령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Manifestation of the Holy Spirit" 성령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령이 당신을 나타내셔서 우리가 그분을 경험하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믿음을 갖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성령은 우리와 제일 가까이 역사하시지만 당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우리가 성령을 알게 된다기 보다는 예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성령이 숨어서 역사하신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실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예수님을 섬기게 되고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결과로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권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와 같이 역사하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이론과 신학과 또 대화와 논쟁과 철학보다는, 그것으로 사람을 믿게 하기 보다는 성령의 역사를 구하고, 성령에 의존하고, 성령을 따르고, 성령이 역사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설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을만한 이유가 믿지 않을 이유보다 더 많기 때문에 그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이 말은 반지성주의를 말하는게 아니에요. 저는 처음에 반지성주의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신앙의 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회심하고, 거듭나는 것, 회개하는 것,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 영적인 성격, 영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이것이 결코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 토론도 필요 없고 신학이 필요 없고 배울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것이라면 고린도전서는 2장 5절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더 이상 할 말이 무엇이 있습니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있으면 되지 무슨 사람의 말을 더할 필요가 있고, 사람의 말을 더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전하는 말은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담론이 계속되고 고린도전서 뿐만 아니고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디모데전후서, 빌레몬서 계속 담론이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주도적인 역할을 우리가 간구하고 믿지만, 이제 장성한 자에게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내가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지혜를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6절에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지만 지혜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만 이것은 장성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숙한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우리가 성숙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혜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담론이 필요하고 공부해야 하고 배워야 하고 책을 읽어야 하고 묵상해야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길가에 서있는 전신주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전신주가 띄엄띄엄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전선을 원하는 곳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전신주와 같습니다. 필요한 부분에서 역사하십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충분히 믿음을 연결시켜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보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의 역할은 그 띄엄띄엄 서있는 빈 공감을 때로는 메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주십니다. 내가 믿을 만큼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이 자라나기 위하여, 이 믿음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대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인생의 경험이 우리에게 유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의 공간을 때로는 우리가 메워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왜 허구한 날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들으십니까? 이미 믿는데. 그러나 믿음을 지속하기 위해서, 좀 더 성숙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궁금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믿는 사람에게 핍박이 있느냐, 왜 믿는데 고난이 있느냐, 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런 식으로 하시느냐, 하나님의 뜻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걸 우리가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C.S 루이스의 책을 읽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왜 세상에 전쟁을 허락하느냐, 는 대목이 나옵니다. C.S. 루이스가 아주 어려운 질문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말하기를 전쟁이 비극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약에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 전쟁터에 나가있는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전쟁이 없다면 이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은 젊음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인생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죽음을 직면하게 되니까 이 젊은이들이 영혼의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영생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찾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비극이지만 이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서 오히려 젊은이들에게는 자기들의 영혼과 믿음에 더 유익한 계기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왜 아무도 이런 얘기를 나에게 해주지 않았을까,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아무도 이런 얘기를 나에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지혜인데 하나님의 지혜이며 세상 사람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말해주지 않으면 모릅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때로는 대답이 도서관에 있고, 책 속에 있고, 설교 테이프 속에 있습니다. 

누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 “집사님, 집사님의 질문에 대해서 내가 답을 가지고 왔어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일은 백년에 한번도 안 일어날거예요. 내가 찾아가야 되요. 책을 열어야 되요. 테이프을 기계에 넣어야 되요. 교회를 찾아가야 되고 물어봐야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삽나이까’ 물어봤던 것처럼. 또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가 예배하는 곳이 예루살렘입니까, 여기입니까’ 물어봤던 것처럼 물어봐야 합니다. 교회에 물어봐야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그랬어요.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진리는 이미 존재합니다. 진리가 없는 게 아니에요. 진리를 우리가 모르는 게 문제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게 문제지요. 믿지 않는 것이 문제예요. 진리를 믿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장성한 자에게는 지혜를 말한다, 그랬어요. 성령이 우리에게 믿게 하신 다음에 우리가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를 주셨어요. 그러나 이제 더 잘 믿기 위해서,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혜를 배워야 됩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요 성령이 주시는 것이지만, 이전에 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했던 성령이 가르치시고, 그것이 믿는 자들을 통해서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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