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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고 들은 것을 말하면 됩니다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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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들은 것을 말하면 됩니다 (행 4:13-22)
   

초대교회의 역사를 읽어보면, 복음이 부흥하는 곳에는 항상 위대한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곧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사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을 믿고 따는 제자로서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실격처리 해야 할 사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베드로가 부인한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가슴 아프고, 다시 말하기도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하속들에게 잡혀가시는 것을 보면서 멀찍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세자장 가야바의 집으로 들어가시니 할 수 없어 베드로도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집에는 안뜰이 있고, 바깥뜰이 있었는데, 마침 사람들이 바깥뜰에 불을 피어놓고 있었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끼어들어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안뜰은 조금 높은 곳에 있었고, 바깥뜰은 낮은 곳에 있었기에 아랫뜰이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제사장의 집으로 들어와 아랫뜰, 바깥뜰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의 한 여종이 다가오더니 불 쬐고 있는 베드로를 향하여,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앞뜰로 나갔습니다.  그 때에, 어떤 사본에는 “마침 닭이 울더라.”는 말을 적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앞뜰로 나가면서 앞문으로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참으로 다급해졌습니다.  여기서 저들에게 붙잡히면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보통 맹세할 때에는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맹세한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기록하는 기자는 차마 그 말을 기록할 수 없어서 다만 맹세하면서 부인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맹세하는 것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한술 떠 떠서 저주하면서 맹세하여야 그의 말이 먹혀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저주할 때는 어떻게 저주해야 하는 것입니까?   보통 같으면, 자기를 저주하든지, 아니면 누구를 저주해야 합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하든지,   “예수를 따르는 도당들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하든지, “내가 예수를 따르는 자이면 천대에 벌을 달게 받겠다”고 하든지, 그런 말이 저주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맹세했는지, 어떻게 저주하였는지, 상세하게 적지 않는 것은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베드로가 살아 있었고, 설마 베드로가 그런 말씀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아서 구구절절이 기록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닭이 곧 두 번째 울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그에게 말씀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다시 재기할 수 있게 하셨고, 초대교회를 위한 초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비겁하고도 비겁한 사람을 들어보라고 하면 사도베드로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다시금 부르시고 세워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를 다시 들어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고백이요,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권능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행2:38에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도 하고, 저주 하면서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이름을 전파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것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 예수님이 자랑스럽게 말할 사람, 주님을 따르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결격 사유가 없는 사람만이 예수를 말할 수 있고, 예수님을 말해야 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 베드로가 말을 했다고 하면 우리도 할 수 있고, 베드로, 그가 말해야 했다고 하면 우리도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도베드로가 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유대인의 기도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제9시 기도 시간, 오후 3시의 기도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러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태어나면서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미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개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구걸하였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 걷지 못하는 장애인 거지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하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거지가 걷는 것과 뛰는 모습이며,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면서 그가 본래부터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심히 놀라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드는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운집하여 두 사도의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 나은 사람이 두 사도를 따라다니는데, 병자가 회복된 것은 거짓말할 수 없는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가 되었고,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사도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최고 실권은 산헤드린 공회가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대제사장과 랍비들 중에 사두개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사두개인들은 영도 없고, 천국도 없으며, 천사도 없고, 부활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로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법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사두개인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부활하셨다고 하니 사도들을 결박하고 위협하여 다시는 부활을 말하지 말라고 억압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3천명이 믿고, 다시 사도들 앞에 모이는데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두 사도를 잡아 결박하여, 다음날 심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가 다 모여 두 사도를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  이에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1-12)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로지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뿐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요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옆에는 걷지 못하던 장애인이 함께 서 있었고, 병을 고쳐준 일에 대하여 비난할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죽어도 못하는 일인데, 평생을 걷어보지 못한 사람을 고쳐준 일이라고 하면 잘했다고 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교권자들은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의회에서 나가게 한 뒤에 서로 의논하여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행4:19-20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담대한 말씀이요, 확신에 넘치는 선언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보았고, 우리가 들었던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지금 한 영혼이 살고 죽는 문제, 우리의 죄를 사함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아니면 지옥의 죽음에 처하게 되느냐 하는 생사의 문제를 놓고 위협한다고 하면 말하지 않고, 덮어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교권자들은 두 사도의 답변에 깜작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벌벌 떨면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살려만 주세요.”라고 호소할 줄 알았는데 아주 세게 나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란 사람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 분명하고, 걷지 못하던 거지가 옆에 서 있으니 아니라,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고,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19절을 다시 한 번 주목해 주십시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베드로가 무엇이라 담대하게 외치고 있습니까?  

세상의 말에는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는 명령하는 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사람의 말은 진리를 알지만, 진리를 보고 들었어도 진리를 말하지 말고 진리대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보았어도 입 다물고, 말하지도 말고 잠잠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비겁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요구하는 인간의 말, 사람의 말입니다.

오늘도 사람의 말이 들려옵니다.  “너희가 진리를 들었고, 보았어도 모른척하고 살아라. 입 다물고 살아라.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너 한 사람 혼자 예수의 이름을 믿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겠다.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전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아라,”고 합니다. 사람의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 순종해야 할 사람입니다. 절대로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베드로를 본받아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하고, 우리도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벧전3: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심령속에는 영원한 소망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인생이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도 담대하십니까? 무엇이라도 믿는 구석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여야 하는데, 온유한 마음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해야 합니다.  

복음을 가장 바르고 알아듣기 쉽게 요약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제시에 능하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잘 제시할 수 있도록 요약된 말씀을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해피데이 전도에서는 예수 피 묻은 원색적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조금도 가감하지 않은 피의 복음입니다.

요일1:1에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말씀, 태초로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란 누구입니까?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우리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요일1:3에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보고 들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사귐이 이루어진 것처럼 세상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사귐이 이루어져야 그들도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정말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을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정말 엄청난 가치가 있고, 영원한 생명이기에 우리도 보고 들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시시한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이기에, 지금 조금 잘 살고 못 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를 주셨기에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으로 치닫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렘20:9에서“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불붙는 것과 같은 뜨거운 열정과 골수에 사무치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불붙는 열정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정말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하십니까?  먼저 성령이 충만해야 하고, 성령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전도계획을 잘 살펴보면 선택으로 시작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전도방법은 그 첫째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안드레와 요한을 찾아내셨습니다.   안드레는 형님 시몬 베드로를 데려왔고, 요한은 형 야고보를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길가시다가 빌립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바돌로매 즉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마태를 찾아내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12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나실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아, 길게 길렀고, 그들은 죽은 자를 만지지 않았으며,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그들의 하루 일과였고, 일생 감당할 일이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한 나실인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 한번 제대로 예수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목사가 되라는 말도 아니고, 장로가 되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 잘 믿어보자는 말입니다.  

여러분, 잘 살고 싶습니까?  물론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이제는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잘 살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잘 먹고 여유 있게 살고보니 무엇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셨습니까?     지금보다도 더 잘 살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잘 사는 것이 또 무엇입니까?   일생에 최선을 다하여,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고 싶은 일들도 많습니다.  잘 살고 싶은 욕망, 무자로 살고 싶은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잘 살아야 합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싶습니다.  물론 공부 많이 해야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공부해야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습니까?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천국을 예약해놓고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확신이란 엄청난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나는 이렇게 예수 믿게 되었고, 예수 믿어 구원받았고, 천국에서 산다고 증거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아야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 보고 들을 것을 그대로 전해야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만나면 “목사님, 저 같은 사람도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 죽은 예수님을 믿어지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간증하시는 이들이 있습니다. 믿어지는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받은 선물이 하도 귀하기에 이 선물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나는 당신 때문에 횡재한 사람입니다.    당신 따라 교회에 나온 것이 이렇게 구원받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을 주십니다.  우리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을 증거하여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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