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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들로부터 온 사랑의 편지 (빌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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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들로부터 온 사랑의 편지 (빌 1:1-2)


여러분, 이 노래를 아시지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보내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시인이신 고은 선생님이 쓰신 <가을편지>라는 시에 김민기씨가 곡을 붙인 유명한 노래입니다. 

아직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오늘이 팔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우리는 가을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맑고 높은 하늘, 그리고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단풍,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고개를 드는 추억들... 그리고 앞의 노래처럼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편지라고 생각됩니다. 

성도 여러분, 근래 들어 편지를 받거나 써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요즘은 전화나 메일로 모든 것을 해결하다보니 편지가 점차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저는 최근에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 통은 특수 사역을 하시는 분이 우리 교회와 연결하여 사역을 하고 싶다는 사연이었습니다. 감동적인 것은 프린터로 출력한 편지가 아니라, 친필로 쓰신 편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극동방송 부산 지사장을 지내신 한기붕 장로님께서도 친필 편지를 보내 주셨는데, 안부와 함께 서울 극동방송에서 내보내고 싶다면서 설교 몇 편을 골라서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가을에 소중한 분들에게 친필편지 한 통 써 보는 것, 어떻겠습니까? 

가을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서 저는 앞으로 몇 주간 동안 교우님들과 함께 편지 한 통을 읽고자 합니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빌립보서>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 사도께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아멘.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당시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바울 단독으로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디모데와 함께 공동으로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바울은 디모데의 이름을 함께 적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디모데는 바울의 아들 같은 사람이었고, 바울 자신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디모데를 통해 빌립보 교회와의 연락을 취하길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2장 19-20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로서 복음을 위해 수고한 일군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2장 22절을 보면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아들 같은 존재요, 동료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소중한 사람들이 많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좋은 믿음의 동료, 인생의 동반자가 많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자신들을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빌립보서는 <종들이 보낸 편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를 종이라고 부른 것일까요? 바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들을 <주님에 대해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종이란 단어는 매우 기분 나쁜 단어입니다.  종을 헬라어로 <둘로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데오>란 말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데오>란 <묶다, 동이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종이란 <묶인 사람들, 묶여서 끌려가는 사람들, 팔려 가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종, 혹은 노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거나, 경제적인 빚 때문에 종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물건처럼 매매의 대상이 되었고, 조금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한 발만 앞으로 내어 디뎌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법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치명적인 단어를 자신에게 붙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억지로 되는 종>입니다. 그는 종이 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도망을 치려고 생각합니다. 로마 당시에 도망치다 붙잡힌 종들은 가차 없이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억지로 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되는 종>이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소설 <쿼바디스>에 나오는 페트로니우스의 여종 에우니케가 그런 경우입니다. 에우니케는 자신이 페트로니우스의 종이 된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에 네로 황제를 피하여 페트로니우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그의 마지막 길에 동행자가 되어 함께 손목의 동맥을 끊습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나머지 죽음도 함께 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녀는 종이라는 단어를 조금도 혐오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을 종이라고 부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된 것을 너무도 기뻐했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감옥에서 기록한 편지인데, 그 편지에서 그는 기쁨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4장 4절에서 말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서 기쁨을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감옥에서도 기뻐할 정도로, 남에게도 기뻐하라고 말할 정도로 기쁨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주의 종이 된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억지로 된 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일이 억지로 되지 않길 원합니다. 주일이면 이 자리에 오시는 것이 기쁨이어야 합니다. 헌신과 섬김이 모두 기쁨이어야 합니다. 

저는 가정의 일로 지난주간 며칠 동안 출타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요일 저녁 늦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때론 좀 더 많은 시간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오늘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돌아올 때 조금도 억지로 오지 않았습니다. 기쁨으로 왔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고 설교하는 일이 주님께 매인 일인데, 그러나 고통이 아니라 가장 큰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이 마음을 사역이 끝나는 그 날까지 더욱 풍성히 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기쁨으로 주님의 종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까?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동일한 원리를 따라 주님의 종이 됩니다. 로마서 6장 17-1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할렐루야! 

우리는 본래 모두가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를 지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 법규를 위반하여 범칙금 통지서를 받으면 이미 그 지배를 받는 종이 된 것입니다. 범칙금을 내지 않는 한 평생 우리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또 우리는 언제 다시 교통 법규를 위반할지 모르는 존재로서 그 종입니다. 사거리에서 아무리 천천히 가도 갑자기 신호등이 바뀌면 신호 위반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늘 불안하고 조심스럽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죄의 종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종이요, 죄를 지을 위험성 앞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종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는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범칙금을 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한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또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거나, 죄를 짓게 만드는 사단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 당신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저를 사셨고, 이제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저의 행복입니다>란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이란 말은 사람이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어떤 사람을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저 분은 주의 종이래!>라는 표현은 잘못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는데, 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이 말을 <주님,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할 때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도 에바브라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종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 7절을 보면 에바브라에 대해서는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그를 동역자란 차원에서 그렇게 부른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주의 종>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또 그렇게 부르기 미안하니까, 생각해서 높여준다고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종에게 무슨 <님>자를 붙이겠습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어법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자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을 주님께 종으로 드리길 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도중앙교회 모든 교우님들이 스스로를 <주님의 종>으로 자처하고 겸손히 주님을 섬기길 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 사도가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은 종이라고 불렀지만,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종이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1절 후반부를 보면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에 사는 주의 종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지 않고, 그 분들을 성도, 감독들, 집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의 직분을 불러주었습니다. 

자신은 종이라 하면서 남들은 성도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대방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난 종이지만, 당신들은 존귀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주님의 종이고, 당신들의 주님의 사람들이니, 내가 섬겨드리겠습니다.>란 의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이런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교우들이 자신은 언제나 주님께 종으로 드리고, 다른 사람들은 높여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종이 되어 준다면, 그러면서 상대방을 높여준다면 얼마나 예절바르고, 따스한 교회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자신은 주인이 되고, 다른 사람은 종처럼 취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늘 다른 사람에게 종처럼 섬기길 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을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종처럼 섬겨 주었습니다. 

오늘날도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병원에서 호스피스 사역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냄새나는 환자를 씻깁니다. 머리를 감겨줍니다. 대소변을 받아 줍니다. 그 곁에서 함께 있어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해주고, 말동무가 되어 줍니다. 우리 교회도 천국에 가신 제영준 장로님이 호스피스 사역을 먼저 시작하신 이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합니까?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고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께 빚진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종이 되어 섬겨주겠다>는 마음, 이게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마음은 행복한 교회 생활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두 가지가 임하길 기원하였습니다. 그 두 가지는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본문 2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저도 영도중앙교회 모든 교우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은혜와 평강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은혜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났고, 변화되어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에게 임한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란 죄인을 건져 구원해 주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건 하나의 사건처럼 순간적으로 임합니다. 마치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 하나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평강>입니다. 평강이란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돌봄과 인도를 말합니다. 고아원에서 데리고 오는 것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사건이지만, 그 후에는 아들로 삼고 계속 돌보고 사랑해줍니다. 이게 평강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당신의 사람을 삼으신 후에 지속적으로 그를 인도하시고 돌보셨습니다.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평강이 어떤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빌립보에 처음 전도하러 와서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실라와 함께 채찍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밤중에 일어나 찬송을 불렀습니다. 채찍도, 손발을 묶은 쇠사슬도, 감옥의 높은 담장도,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도 찬송했습니다. 이게 바로 그 평강이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불러서 구원하신 은혜를 베푸신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를 돌보셨습니다. 그에게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도 이 평강이 임하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정말 빌립보 교우들이 평강하길 원했습니다. 이에는 조금의 가식도 없었습니다.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회에 이런 마음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단은 우리 가운데 사랑이 식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목회자들이 교우들이 잘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목회하지 않는다면, 그 속에 무슨 이중적 계산이 깔려 있다면, 이미 목회자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교우들이 목회자들이 진심으로 평강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일 것입니다. 교인들 상호간에도 상대방이 정말 은혜와 평강의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는 정말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상대방에게 은혜와 평강이 임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자체로서 이미 천국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우리 교회가 서로 간에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훌륭한 교회를 평가하는 많은 기준이 있고, 우리 교회는 그것들에 많이 모자라지만, 저는 목사로서 우리 교회가 적어도 서로에 대해 은혜와 평강이 임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한 두 달 짧은 기간 우리 교회에 머물러도 그 기억을 평생에 간직할 수 있는 교회, 어쩔 수 없는 사유로 멀리 떠나도 평생 우리교회에 머물던 시간을 기억하는 교회, 늘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소식듣기를 원하는 교회, 시집을 가서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명절마다 다시 찾아오는 교회, 이 교회 예배 자리에 앉아 있었던 순간을 복되게 생각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일로 불편한 관계였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미워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은혜와 평강이 임하길 기도해 주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서 나누었던 말씀, 성도간의 인사, 함께 드렸던 기도들, 이 모든 것들을 평생 기억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 오신 교우들, 아직 우리 교회가 낯설게 여겨지는 분들도 속히 이런 마음으로 하나가 되길 원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으로 가을편지를 읽는 마음으로 앞으로 빌립보서를 함께 묵상하길 원합니다. 다시 한 번 은혜와 평강이 교우님들의 마음과 가정에, 우리 교회에 가득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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