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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신 9:5-6, 엡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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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신 9:5-6, 엡 2:8-9)


오래전 이집트의 사막의 수도원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수도사가 된지 53년이 되었다는 84세가 된 수도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수도사는 저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줘야지 어째서 나에게 기도해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분을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은 매일 끊임없이 밀려오는 죄 때문에 견딜 수 없으니 죄를 극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조금 짓궂은 생각이 들어 여기는 여자도 없고, 재물도 없는데 무슨 죄를 짓느냐고 했습니다. 그 분은 마음속에 악한 생각들, 그릇된 상상들이 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온갖 허망한 생각들이 매일 자신을 번민케 합니다.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마귀는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마귀는 착한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마귀는 예수 믿는 사람을 유혹 당하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자신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해도 죄가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의롭게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탐심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8-9에서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고백합니다. 
  
때 묻지 않는 삶이 있습니까? 종일 나와 있으면 셔츠도 까맣게 변하고 금방 몸이 더러워집니다. 아침에 세수하고 나오지만 저녁에는 또 더러워집니다. 결벽주의자들은 잡 밖에서 더러운 것을 만질까 두려워합니다. 이런 것을 강박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밖에 나와 있으면 더러운 것을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 안이라고 다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노아의 경우를 보세요. 당시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악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악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악한 모습으로 살 때 노아만은 의롭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합니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양 편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한 편의 강도는 평생 의롭게 살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강도가 제사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십일조를 드렸겠습니까? 구제를 했겠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도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도덕은 행위입니다. 질서를 지키면 도덕적이 되고, 욕을 안 하면 도덕적이 됩니다. 도덕주의자들에게는 마음으로 어떤 죄를 짓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타나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선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는 상반된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방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설교나, 말을 할 때는 은혜주의자이지만 모임과 회의를 할 때는 삶에서는 도덕주의자로 돌변해버립니다. 인간은 은혜를 말하면서도 도덕적 노력을 주장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 6절에는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주신 것의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한 것은 그들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삶 모두가 의가 아닌 은혜인 것입니다. 

첫째, 우리 의가 아니라 다른 이의 악 때문입니다. 

5절에는 “이 민족들의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이 이긴 것이 아니라 가나안 민족이 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능동적 수동태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내가 이겼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얻었다’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 ‘내가 가졌다’고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잘 한 것이 아니라 남이 못한 것입니다. 내가 선한 것이 아니라 남이 악한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 했다고, 선하다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야고보서 4:16에는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데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참 군인은 갑옷을 입을 때에 자랑하지 아니하고 갑옷을 벗을 때에 자랑하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자리를 얻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갑옷을 벗고 나야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때로는 우리의 자리 자랑도 다 헛것이고 오히려 그 자리가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대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자칭 가장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문자적으로는 율법을 어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만 자기 속에는 더러움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복을 받고 살고 잘 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선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악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좇았기 때문에 선악의 기준이 그들의 삶에 들어왔습니다. 인류는 이날부터 도덕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가치를 지나치게 앞세우는 도덕주의는 종교를 망칩니다. 도덕규범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것입니다. 
  
인간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 의 때문입니다. 저도 의롭긴 하지지요. 그런데 인간의 의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누구하고 비교해보니 조금 더 의롭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의는 절대적 의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향하여 착하다고 합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에 비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이 애매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속성에는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습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는 속성이고 비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속성입니다. 의나 사랑은 공유적 속성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만의 속성이므로 영원성이나 창조성 등입니다. 그런데 공유적 속성이라도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은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절대적입니다. 인간의 속성은 상대적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다른 민족과 다른 사람이 악하기에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잘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 의롭게 사는 것은 매 한가지이다’(Living well and beautifully and justly are all one thing)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잘 사는 것은 의롭게 사는 것입니까? 사람의 눈에 볼 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이겨야 힘이 정의입니다. 많아야 돈이 무죄입니다. 높아야 자리가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죄가 많아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있는 줄 아느냐”라고 합니다. 누구나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고 살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맹세를 이루려 하심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인간의 의 때문이 아니라 조상에게 하신 맹세 때문에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약속, 맹세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조건 없이 주어집니다. 무조건적입니다. 동시에 그 약속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받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조건적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을 하셔도 우리가 믿지 않고 그 약속을 받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인류에게 독생자인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성경에는 약 36,500가지의 약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을 어김없이 다 지키십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민수기 23:19에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맹세를 지킬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사람은 변하고 잊기 쉽습니다. 손가락을 걸고 맹세합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즘 청문회하는 것 보세요. 손을 들고 맹세합니다. 서약하고 청문회를 시작하지만 손을 뒤집기 예사입니다. 말 바꾸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처음부터 지킬 의도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키고 싶어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폴레옹은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샘 마펫교수님은 평양신학교를 세운 마펫선교사의 아들입니다. 그분이 미국의 유명한 아이비리그의 어느 대학교에 총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총장의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난 전 부인과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약속했던 전 부인이 세상을 떠나서 약속을 파기할 수 없다고 하면서 총장을 자리를 버리고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참 신실한 마음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우리교회에 부임하여 장로님들을 심방하면서 고이종진장로님을 심방했습니다. 장로님께서 저에게 “목사님, 우리교회에 오시면 꼭 원로목사가 되시고 총회장이 되셔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42살이었던 저는 얼결에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제는 장로님께서 돌아가셔서 그 약속을 깰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꼭 부총회장이 돼야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구 약속을 지켜 신실하게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되던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네 자손이 무수히 많아지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100세에 이삭을 주심으로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과정에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롭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날 못 믿어? 아들 안 줘”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아마 사람 같았으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주시어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군대에서 금지된 화투치기를 하던 세 병사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 병사의 종교는 각각 달라서 기독교, 불교 그리고 한 병사는 무교였습니다. 기독교인인 병사는 “하나님께 맹세코 절대 화투치기를 안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불교도인 병사는“부처님께 맹세코 결코 화투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병사가 말했습니다. “나 혼자서는 화투치기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헛맹세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맹세를 해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엄밀하게 말하면 맹세할 자격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5:34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라고 합니다. 맹세는 땅으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머리로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사람은 맹세할 자격도 없고, 맹세할 자신도 없습니다. 
  
에스겔 17:24에는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불변하십니다. 이런 영원하신 하나님만 맹세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맹세할 수 있고, 맹세한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 의가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 미쁘심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참 좋은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약속과 맹세를 어기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결론 

요즘은 ‘착한’이란 말을 아무데나 씁니다. ‘착한 얼굴’이라고도 하고, ‘착한 초코렛복근 몸매’라고도 합니다. 가수 이승기의 ‘착한 거짓말’이란 가요도 있고 주미란이란 분이 쓴 ‘착한 거짓말’이란 책도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첫 번째 착한 거짓말은 ‘시간이 약이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착한 거짓말은 ‘내 눈엔 너만 보인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착한 거짓말은 ‘더럽게 못 생겼어요’랍니다. 네 번째 착한 거짓말은 ‘사랑에 미치다’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착한 거짓말은 ‘우리 보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열 번째까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착한 것들입니까? 죄를 지은 인간에게 착하고 선한 것은 거리가 멉니다. 나도 모르게 악하게 사는 것이 죄인의 운명입니다. 
  
우리나라에 100세 이상의 장수 어르신이 796명입니다. 최고령 어르신은 112세의 엄옥군 할머니입니다. 대전에 사시는 어르신인데 지금도 대소변 잘 가리고, 끼니 거르지 않고, 과식 않고 사신답니다. 할머니께 어떻게 하면 장수하느냐고 여쭈었더니 “잘 먹고 착하게 살면 오래 살아”라고 하셨답니다. 착하게 살 수 있습니까? 의롭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제대로 사는 것은 내 의 때문이 아닙니다. 오래 사는 것은 내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8-9에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합니다. 구원에 대하여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이 행위 대신 믿음으로 삽시다. 자랑대신 감사로 삽시다. 그리하여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잘 살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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