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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되도다,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여! (시 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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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도다,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여! (시 32:1-7)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를 기억하기를 싫어합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있는 부끄러움과 허물을 주님 앞에 회개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들여다보기를 꺼려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의사는 종종 환자의 건강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대소변의 색을 분별해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보기 싫어서 빨리 물을 내려버립니다. 이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만 해도 싫습니다.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부끄럽다 못해 역겹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는 끊임없이 우리가 죄인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스스로가 죄인인 것을 끊임없이 고백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질문합니다. ‘무엇이 그리 참회할 것이 많이 있는가? 굳이 매 주일마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살 필요가 있는가?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한 처방전으로 죄의 용서를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는 죄책감을 조장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정말 죄책감을 조장하는 종교일까요? 기독교의 죄의식은 심리학적인 죄책감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상담학자들은 가능하면 심리학적 죄책감은 갖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죄책감들은 실제가 아닐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죄책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회적 가치관이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것도 아니면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가 내 몸 깊은 곳에 들어와 있어서 그것만 생각하면 죄책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리적인 죄책감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종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기독교 가정에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신앙인은 착해야 한다!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한다! 남이 어려우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는 내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깊이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용합니다. 우리의 왼편 뺨을 때리고 오른편 뺨도 내놓으라고 강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돈도 잘 꾸어준다더라!’ 꾼 돈을 다시 갚으라고 하면 ‘예수를 믿으면서 왜 그렇게 치사하게 구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거꾸로 우리를 향해서 욕보이기까지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교회 예산의 상당 부분이 구제와 장학 등 이웃과 세상을 향해서 사용됩니다. 이것은 가능하면 더 확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이웃봉사가 아닙니다. 세상은 이것을 가지고 기독교를 조종하려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본성을 바꾸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가치관을 바꾸고,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혁명적인 종교입니다. 단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죄의식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심리학적인 죄책감은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죄의식은 보다 근본적인 객관적 사실에 기초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사람이 연애할 때 왜 기쁩니까? 상대방을 마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별하면 왜 슬픕니까?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슴이 아픕니다. 

성경이 말한 죄란 무엇일까요? 나를 사랑하는 분, 내가 사랑해야 할 분인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이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성에 대한 실제이고 현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감추려했습니다

본문은 죄의식을 어찌해서든지 감추어보려고 했던 인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의식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기 싫어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보여주기 싫어서 감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이 쓰리고 몸이 아파오기 시작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시편 말씀은 그의 연약한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시편 32:3~4)

뼈마디는 쑤셔대고 부러질 것 같습니다. 내 속의 체액은 마치 가뭄이 들어 갈라진 논바닥처럼 다 말라비틀어진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고통을 당하게 되면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생깁니다. 자기가 잘못하고도 마음에 또 다른 노여움이 발생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자기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죄가 하나님께 들킨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노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죄를 지적한 것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분노의 발자취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미워합니까? 무엇 때문에 분노합니까? 무엇 때문에 내 속에 맺힌 것이 풀리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타인을 향한 시기와 질투의 못된 마음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잘못한 저 사람은 왜 이렇게 멀쩡하지?’ 그리고 그 분노와 시기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을 향해서 화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다른 사람은 들키지도 않고 잘 지내는데 왜 나는 조금 실수했다고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십니까?’ 그러면서 어느 날 갑자기 입을 닫고 침묵합니다.

내 안의 문제들은 침묵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침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돌아볼 때 하는 침묵입니다. 또 하나의 침묵이 있습니다. 화가 나지만 상대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기회를 보며 준비하는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은 언제 그 응어리가 터져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참습니다. 이러한 내면의 고통은 점점 육체적인 질병으로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편의 저자 다윗이 그랬습니다. 양심을 닫으니까 육체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뼈마디가 쑤시고 모든 것이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 내 안에서 나를 억누르는 것들, 세상에 밝히고 싶지 않은 내 속의 연약한 문제들은 내가 망각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한 치유를 받아 영혼이 자유해지기 위해서는 망각으로 그것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내 기억 속으로 끌고 와야 합니다.

죄는 마치 몸에 가시를 박아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죄가 쌓이면 가시가 점점 많아지고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 가시는 내 옆에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나와 함께 동역하는 친구들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엄청나게 자란 가시에 나 자신도 망가져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남의 탓만 합니다. 내 가시는 빼지 않은 채, 누군가가 어쩌다가 내 가시를 건드리면 오히려 욕하고 비난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일찍 화를 내십니까? 사람을 만날 때 비난하기 시작하십니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남의 탓을 하십니까?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 앞에 내놓지 못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영혼의 편안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하나님께 토해내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의 입을 통해서 죄의식의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시편 기자는 죄와 허물이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문제들도 많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혼자서 끙끙 앓지 마라. 그 모든 것을 내 앞에서 토해내라. 그러면 내가 용서해주겠다. 네가 내 앞에서 모든 죄악을 토해내고 용서받을 때 너에게 복이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때로 도덕적인 완벽주의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나도 용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용서 못하는 자기가 만든 죄의식의 틀 속에 깊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곳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십니다. “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라! 너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라! 너를 자녀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총 앞에 나아와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기에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가 부끄러울 때마다, 우리의 내면세계가 흐트러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이것을 토해낼 수 있기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나를 맡기고 회개하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확인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를 정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기를 정죄하기 시작하면 철저하게 자기 방어적이 됩니다. 그래서 남을 향해 적개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나를 열어놓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두 인물의 차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면서 정죄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회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자기 정죄였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낙심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에 자기를 개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개방합니다. 그러나 악령에 씌워진 사람들은 자기를 얽어매는 사탄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회개할 때 나를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지, 아니면 사탄에게 맡기는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 용서를 베푸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영적인 기쁨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회개할 때에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정죄하고 몰아붙입니다. 우리의 약점을 붙잡아서 사탄의 종이 되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향해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에게 우리의 죄를 말하면서 다시 기회를 주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둠 속에 계속 있게 하라고 말합니다. 욥기에 나타난 사탄이 바로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하수인으로 부리며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할 때 성령님은 우리들을 죄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예수를 믿는 축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나를 얽어매고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 앞에 토해내십시오. 여러 번 반복되어도 괜찮습니다. 또 토하십시오. 한 번하고, 두 번하고, 백 번하고, 천 번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모습과 성품과 언어가 바뀐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는 영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토해내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시편 32:5)

다윗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토해냈을 때, 다윗은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허물을 주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 자유자가 되십시오.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과 더불어, 성령님과 더불어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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