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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눅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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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눅 13:1-9)


자연재해와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지구가 깊은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진과 해일, 홍수, 자연재해가 곳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이티에서는 지진으로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이티 때보다 1000배의 강도가 넘는 강진이 칠레에서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대만에서도 지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쓰촨성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남아시아에서는 쓰나미가 발생했고, 터키에서도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생태학적인 위기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신종인플루엔자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이 발생하여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런 자연재해만이 결코 아닙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인간의 완악함이 만들어내고 있는 재앙들입니다. 정치적인 독재자들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 없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숙청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이념의 차이로 테러와 내전,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죄 없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극적인 6.25의 참상이 있었고, 지금도 북녘에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를 되돌아보면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숫자가 수억 명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고난은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인간이 만들어냈던 재앙과 자연적인 재앙이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재해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던 것입니다. 당시 총독인 빌라도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유대순례자들과 함께 갈릴리인들을 정치적인 반란죄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은 예루살렘의 남동쪽에 있던 실로암의 망대가 갑자기 무너진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지진 때문에 무너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을 바라본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더 나쁜 자들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징계를 하신 것이 아닙니까? 살아남은 우리들은 저들보다 낫기 때문이 아닌가요?”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재난으로 죽은 사람들은 훨씬 죄가 많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고난이 죄의 대가요, 특별히 재난으로 인한 죽음은 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결과라고 단순히 도식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거절하시고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난과 고통의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난의 자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자리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3)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두 번 연속해서 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난합니다. 마치 2,000년 전의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그들이 나쁘고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려고 어려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비난하지 말라. 남을 탓하지 말라. 남을 조롱하지 말라.” 

우리에게 거대한 재난을 겪은 경험은 없을지 모르지만, 각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통과 아픔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런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남을 탓하려는 생각과 이 모든 것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통속적인 마음의 본성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러한 이기적인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것들은 죄다 이렇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습니다. 주위 사람이 불행에 빠지면 크게 웃으며 기뻐하고, 무서운 불길이 솟구치면 모두 뛰쳐나갑니다. 가엾고 불쌍한 죄인이 사형장으로 끌려간다고 하면, 구경하자고 길거리로 몰려나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죄 없는 피난민의 가엾은 모습을 보기위해, 나들이 가듯 저들은 집을 나섭니다. 금방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운명이 자신들에게도 찾아오리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천성입니다.”

괴테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존재이며, 자신의 문제가 아닐 때는 구경하고 즐기려는 방관자적 존재인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재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리는 남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자리가 아니다.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방관자가 되지 말라. 구경꾼이 되지 말라. 남의 고난을 즐기는 못된 마음을 갖지 말라.”

예수님은 오히려 비판하는 방향을 자기 자신을 향하여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비판할 줄 아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을 비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판할 줄 알고 자기 문제를 직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 속에 악이 있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못된 성품이 있습니다.” 하며 참회의 기도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말씀의 지혜를 받기 위해서, 내 문제를 직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바로 참회의 기도이며 회개입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못난 점, 문제점, 연약한 점, 완악한 모습을 향해서 스스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회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스스로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자기비판은 지금의 나에 대하여 만족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존재로 승격하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기 전에 거울을 보고 확인합니다. ‘내 모습이 어떠한가? 내 눈에 눈곱은 없는가? 내 얼굴에 뭐가 묻어 있지는 않은가? 내 모습이 괜찮고 깨끗한가?’ 그리고 우리는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볼 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거울이신 말씀 속에 제가 있군요.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 다윗의 모습 속에, 베드로의 모습 속에 제 모습이 들어 있군요!’ 그리고는 내 안에 있는 연약함과 죄악 된 모습들을 주님 앞에 토해내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치사한 존재이며 불평이 많은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남을 잘 속이는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 존재인지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기시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자기비판은 심리학자가 말하는 자기연민과는 다릅니다. 자기연민은 자기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의 연약함 속에 매몰되어갑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자기비판은 자신을 향한 격려와 함께 합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격려할 줄 알아야 자기를 비판할 수 있고, 자기를 비판할 줄 알아야 자기를 격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부끄러움 속에 이토록 오래 머물러도 괜찮으냐? 네가 이런 악을 행하면서 그렇게 뻔뻔하게 있어도 괜찮으냐?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이렇게 절망하고 탄식하며 주저 앉아있어도 되느냐? 네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시간과 세월을 낭비해도 되겠느냐?” 

자기비판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판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면서 예수님의 품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 격려요 자기 위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사람의 고난 속에서, 내게 다가오는 아픔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재난들을 말씀하시면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인 하나님께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기 위해 3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으면 성장하기까지 약 3~4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또 여러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7~8년, 어쩌면 그 이상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 나무를 심판하기로 결정합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누가복음 13:7) 

열매가 없는 나무를 찍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종결할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 없는 모습, 성장하지 않는 모습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입술의 모양, 외모의 모양만 있고 열매와 내용이 없는 우리의 삶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악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옆에서 말씀을 듣고 있던 포도원지기가 주인 앞에 다가섭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듯이 주인을 향해서 말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3:8~9) 

이 시대에 누군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향한 기다림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재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릴 수 있지만 끝내지 않으시고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다림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기간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고통과 고난의 자리를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하지 않고 현상유지로 만족하려 합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성숙과 변화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성숙과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게으르게 사는 것입니다. 전통주의 때문에 익숙한 것만 하려하고 새로운 것을 향해서는 도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과 더불어 인생을 강하고 담대하게, 기쁘고 감사하게 살지 않는 모든 것이 죄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자물쇠를 닫아걸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두려워서 땅 속에 깊이 파묻어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주인이 돌아올 때에 받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드리려고 하십니까? 그 때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악한 종아! 게으른 종아!” 

예수를 믿는 것이 왜 축복입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왜 감사한 것입니까? 우리의 나이가 오십이 되어도, 칠십이 되어도, 팔십이 되어도 예수를 믿으면 계속해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자라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매일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네 인생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다가 끝낼 것이냐? 네 인생을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살다가 끝낼 것이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달려가라!” 그러나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네 옆에 땅을 파겠다. 거기다 거름을 주겠다. 내가 네 손을 붙잡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네게 준 약속을 믿고 남은 인생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서 살아보지 않겠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께 예배드리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주님과 더불어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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