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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의 동산 (창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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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동산 (창 3:1-10)


어떤 교인이 어른 한 분을 모시고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찬양대가 찬양을 하자, 찬양을 듣고 계시던 옆의 어른이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데, 아주 눈에 띄게 고개를 끄덕이고 찬양대가 하는 찬양을 따라 부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만 손으로 눈을 가리셨습니다. 울고 계셨습니다. 

이 분은 그 어른이 겪었던 어려움과 힘들었던 삶의 여정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순간 이 어른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잘 견디신 힘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바로 이 찬양을 들으시면서, 이 찬양을 생각하시면서 이겨내셨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곳, 싸움도 없고 풍파도 갈등도 고민도 없는 그곳, 불안도 근심도 없는 그곳, 천사의 아름다운 노래가 넘치는 그곳, 아무 풍파가 일지 않는 그곳, 평화의 그곳을 생각하시면서 이 어른이 견디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찬양대의 찬양은 계속 흘렀습니다. 

아름답다 저 동산 우리 다 같이 가보세 
무궁 세월 흐르는 풍파가 일지 않는 곳 
평화의 동산 백합화 피고 공기는 신선 
아 저 아름다운 저 동산 
저 아름다운 저 기묘한 음악 천군천사 화답함이라
아름답다 저 동산 우리 다 같이 가보세 
무궁 세월 흐르는 풍파가 일지 않는 곳 
저 아름다운 동산은 주님이 계신 곳이로다 

주님의 동산 아름다운 산
주님의 집은 아름답고 좋도다
영원무궁 변함없는 우리들의 집이라
평화의 동산 고요한 미풍
천사의 노래 곱게 곱게 들린다 
사면으로 사면으로 이리저리 퍼진다

평화의 동산 백합화 피고 공기는 신선 
아 저 아름다운 저 동산 
저 아름다운 저 기묘한 음악 
천군천사 화답함이라
아름다운 곳 주의 동산에 주의 동산에 가보세. 

천사의 노래가 아름답게 들린다
아름답다 저 동산 우리 다같이 가보세 
무궁세월 흐르는 화려한 곳으로 
백합화 피는 곳 평화의 동산에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이 계신 곳 
평화의 동산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W. Tompson 이 쓴 ‘주의 동산’입니다. 이 노래는 저도 참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저는 이 찬양을 들을 때면 옛날 어렸을 때 찬양대의 찬양을 듣던 생각을 하게 되고, 지금도 이 노래를 들을 때는 찬양대가 잘 보이지 않고 ‘평화의 동산’ 그림이 그려집니다. 

모든 사람들,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꿈에 그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믿지 않는 사람도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너무도 좋아하는 곳입니다. ‘평화의 동산’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풍파가 없는 곳, 힘들고 괴롭고 고민하고 근심하고 애달플 것도 서러울 것도 없는 그 평화의 동산을 동경합니다. 그 곳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성경은 틈틈이 그 광경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몇 군데를 보겠습니다. 

옛날에 우리 처음 조상들이 얻었다가 쫓겨난 동산, 언젠가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돌아갈 에덴동산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성경은 이사야 11장 6절-9절에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곳,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 곳,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는 곳, 험악한 짐승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끌리는 곳, 암소와 곰이 함께 먹는 곳,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곳,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치는 곳, 젖 뗀 어린 아이가 굴에 손을 넣어도 걱정을 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계시록 7장에서는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7:16-17).. 다시는 굶는 것도 목마른 것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우리 사람들을 해칠 수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계시록 2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고달프고 서럽고 슬퍼서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시는 곳이 바로 평화의 동산, 하나님의 세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은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18절에서 20절은 우리 인간들이 가장 이해하기 좋은 말로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좋아하는 온갖 좋은 모습을 다 끌어 모았습니다. 열두 문이 있는데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있고, 그 큰 문 하나하나가 진주 하나로 되어있으며, 그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다 깔려있다고 에덴동산 즉 평화의 동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는 뜻인데, 실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서는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그러기에 병든 사람 아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 바로 에덴동산, 평화의 동산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좋은 동산, 참으로 아름다운 그 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우리는 쫓겨났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선악과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선악과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 좋은 곳에 선악과를 두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왜 그 좋은 곳에 그것을 두셔서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이렇게 험하고 힘든 세상을 살게 하셨을까요?

요즘 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기우겠지만 걱정이 참 많습니다. 아이들이 힘들게 공부하는 모습들을 보고 저들은 자라나도 그렇게 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들을 볼 때면 힘들게 공부해도 안정된 직장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언제까지나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므로 참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사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다 하더라도 가정이 다 평화롭고 안정되고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 것도 너무너무 많이 봅니다. 참으로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당사자는 물론이고 우리 어른들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정말로 힘든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왜 평화의 동산에서 쫓겨나서 힘든 인생을 살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보고 싶으신 것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챙겨주셨다면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는데,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 한 번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먹지마라’ 라고 하시면, 이렇게 챙겨주시는 당신께서 말씀하시니 어련하시겠는가를 생각하면서 믿고 순종할 것이라고 기대하셨습니다. 이것을 기대하시고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두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생이란 그런 한계가 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앞에 천사를 지키게 하지도 아니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한다는 한계를 아는 것을 가르치려고 선악과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순종하면서 자기 자신을 한계가 있는 존재로 알게 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기어이 먹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왜 먹었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뱀이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유혹했다고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눈이 밝아지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소유했는데 하나 더 눈까지 밝아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만큼 눈이 밝아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거기다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 때문에 그것만 더 가지면 더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결과는 선악과를 먹자 뱀이 말한 대로 과연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밝아진 눈이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눈이 밝아서 아담과 하와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네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의 부끄러운 곳을 힘들게 가려야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숨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극기야 그 아름다운 동산, 평화의 동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너무도 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 천 년 전, 우리 믿음의,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그렇게 죄를 짓고 잘못하여 그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앞으로 얼마든지 에덴동산, 평화의 동산을 소유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그런대로 그럭저럭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게 되면 이미 누리고 있는 작은 평화마저도 에덴동산을 잊어버리듯이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잃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젠가 영원한 평화의 동산을 주실 때는 온전히 받아서 누릴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정도가 아니라 더 악하고 더 추하고 더 모자라는 곳으로 또 쫓겨날 우려가 있다는 하나님의 걱정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평화의 동산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좋은 행복을 계속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부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눈이 밝아서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는 사람, 일을 잘하여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해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 이런 사람이 더 똑똑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보다 모르는 것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고 아담과 하와를 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예가 이스라엘의 엘리사 시대 때 있습니다. 엘리사 시대 때 엘리사가 나아만이라는 외국 장군의 문둥병을 치료해주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웠던 나아만은 그 고마운 인사로 선물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갔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종을 우습게 보았는데, 하나님의 종이라는 엘리사가 불치의 병인 자기의 문둥병을 치료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서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나는 이제 당신의 종입니다. 이 종이 주인님께 바치는 예물을 받아주십시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받았으면 될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바 나는 받지 아니하겠소.” 라고 강하에 이야기했습니다.

그 옆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있었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줄 선물을 싼 짐을 가지고 왔을 때 기뻤는데, 주인이 거절하자 속이 상했습니다. 그는 엘리사를 보면서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고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이 가지고 온 것을 다 받을 뿐 아니라 더 가지고 오라고 해서 불쌍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되는데 왜 그렇게 바보 같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게하시는 자기 주인이 했던 맹세와 똑같은 소리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쫓아가서 무언가를 받아와야겠다.’ 라고 하고, 쫓아가서 나아만에게 “장군님, 우리 주인님이 장군님이 떠나시고 난 뒤 무언가 필요해서 조금만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너무 좋아 이것저것 마구 챙겨주었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이 준 것을 다 가지고 왔습니다. 아마 이때 게하시는 주인인 엘리사가 바보같고 자기는 똑똑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진짜 똑똑한 사람인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엘리사를 모자라고 물정을 모르는 바보 같다고 생각한 게하시는 그 자리에서 문둥병이 감염되어 하얗게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게하시에게 ‘네가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고, 엘리사가 정말로 바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잘하고 똑똑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행복할 것 같고, 저렇게 하면 평화를 누릴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과 평화는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정말로 많이 실패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똑똑한 사람은 누구이며, 정말로 평화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먼저 말씀하시는 바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먹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그냥 먹지 않는 것입니다. 좀 바보같을 수 있습니다. ‘왜 먹으면 안 될까?’ ‘왜 그렇게 하면 안 될까?’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 않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아야합니다. 여기서는 조금 바보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들이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는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제란 불에 태워서 제사드리는 것입니다. 아들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말이 됩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고 귀신이고 마귀이고 사탄이라고 생각되면 좋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 말씀이 틀림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이것 저것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하나님 음성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성경은 그 다음을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발해야할 첫 시간 이전까지 하나님 앞에 이런 저런 대들고 싶은 마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되자 아무 말 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 출발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가장 똑똑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그 사람이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고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분명하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복을 받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머리로 한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은 하지 말라고 나에게 한계를 주시면 그것을 나의 한계로 아는 사람이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사랑하셨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천막 속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것이 너무 속상해서 건축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승낙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아, 너는 건축을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한 번 생각해봅니다. 다윗이 건축하는 것이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고, 건축 비용 거의 대부분 자기의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자기가 좋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에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꼭 해야겠습니다. 제가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끝냈습니다.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하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입을 닫았습니다. 어쩌면 다윗이 많이 서운했을지 모릅니다. 무언가 내가 잘못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지 않았습니다. 군소리 없이 말 많이 붙이지 않고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습니까? 꼭 제가 하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이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너무도 쓸데없이 똑똑합니다. 쓸데없이 똑똑해서 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내가 속한 곳의 평화를 깨뜨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나서 그렇습니다. 똑똑해서 그렇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좀 바보가 되고, 좀 못난 사람이 되면 되는데 이것을 수납하지 않습니다. . 할 말은 끝까지 다해야하고 내 주장을 끝까지 해야 하는 것만 있지, 내가 숙이고 내가 꺾어지고 내가 모자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수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형태이든지 말씀하셨으면 “알았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고,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행복을 오래오래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원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봅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런저런 소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묻겠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원을 꼭 이루어야 되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원이 이루어져야지 행복하고 좋을 것 같습니까? 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깊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눈이 밝아지면 더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 열매를 먹게 되면 정말로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했습니까? 여러분,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픔과 쫓겨나는 설움밖에 없었습니다.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원을 이루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소원을 제대로 들어주시지도 않고, 우리가 정말로 들어달라고 엎드려서 빌어야 주시는 분인가? 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억지로 힘써서 애써서 쟁취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소원을 안 들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귀히 여기는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소원을 말하지 않아도 안타까운 것을 다 아십니다. 힘들고 서러운 것도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이 계셔서 잠시 설움, 고통을 주실 뿐입니다. 여러분, 부디 하나님을 잘 아십시오. 내가 경배하는 하나님, 내가 신앙하는 하나님,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잘 아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의 복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참고 견디라는 말씀입니까? 굶으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지 아니한가?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훨씬 더 귀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하여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주 괴상한 분이시라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먹어도 되는 것을 먹이지 않겠습니까? 내 소원을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내어놓고 싹싹 빌어야 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평화의 동산, 행복은 눈이 밝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전리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나 차지하고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 바로 평화이고 참된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뜻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면 자동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넘치는 평화와 행복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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