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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퍼즐(Puzzle) (에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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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Puzzle) (에 2:1~11)


한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첫 장면은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를 찾아다니는 참으로 비참한 백성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음은 그와 정 반대의 모습으로 화려한 왕궁이 보입니다. 아주 넓은 홀에 수많은 사람들이 파티를 열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니라 열 날, 스무 날, 백날이 넘는 나날들을 넘치는 음식과 호화스러운 모습으로 파티를 열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클로즈업되면서 왕의 모습이 보입니다. 왕은 거나하게 취했고 아주 흥겨워합니다. 그 흥겨운 가운데 자기의 사랑스러운 그리고 그 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왕비를 생각합니다. 그 왕비를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그 자리에 초청하려 하는데 하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정숙한 여인네들은 그런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는 관습입니다. 그러나 이 왕은 너무도 자기 아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대신들을 불러 “내가 왕비를 모시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뇨?” 라고 묻습니다. 왕의 이 물음에 대신들은 “왕께서 하신다는데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관습쯤이야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왕비를 모셔오게 합니다. 대신들이 가서 왕비를 모시려고 하자 왕비는 “관습도 법인데, 나라의 어른들이 먼저 이 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누가 이런 법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왕께서는 취하셔서 그러셨지만 저라도 앞장서서 지켜야 하겠습니다.” 라고 거절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분노합니다. ‘내가 누군데’ 라는 것입니다. 이 분노를 이기지 못한 왕은 신하들에게 “저 왕비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동안 왕비라는 실세 때문에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던 신하들은 왕비를 무섭게 비난하면서 급기야 왕비를 폐위시키자는 건의를 하게 됩니다. 술 취한 왕은 그런 건의를 받게 되자 자기 생각과는 달리 폐위시키는 것을 결정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왕비는 폐위됩니다. 

왕이 술에서 깨어납니다. 술이 깨고 난 왕은 왕비를 폐위시킨 일이 후회스러웠습니다. 왕이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신하들은 난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앞장서서 왕비를 폐위시켰으므로 왕비가 복위되어 자기네들이 한 소행을 알게 된다면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이시여, 왕비만 예쁜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는 예쁜 처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방만 붙인다면 수많은 아름다운 미녀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 중에서 좋은 처녀 한 사람을 골라 후임 왕비를 세우면 됩니다..” 라고 건의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저런 생각이 많던 왕인지라 신하들의 이 건의에 넘어가서 공고를 하였고, 수많은 후보자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후보자들 중에 에스더라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유대사람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딸,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던 에스더라는 사람이 무슨 연유인지 왕비 후보자에 지원하였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꼭 강제로 끌려간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문 11절은 에스더를 딸처럼 키운 모르드개가 에스더가 왕비 후보가 된 후의 모습을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지를 알고자 하였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우연한 일이 생깁니다. 에스더의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우연히 왕에 대한 암살, 반역 음모를 알게 되어 사촌 누이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보고를 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조사했더니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적모의한 사람들을 다 처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귀하고 놀라운 공로를 세운 모르드개에게 특별한 상이 없이 그저 그 사실을 궁중일기에 기록한 것으로 이 일은 일단락됩니다. 

여기까지 진행된 영화에 대해서 지금 영화관에 앉아있는 관객들은 저마다 나름의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왕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저렇게 힘들고 비참하게 살고 있는데, 이들을 돌보아야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왕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가? 잔치를 벌이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화려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무책임한 최고의 지도자를 가진 저 나라 백성들은 얼마나 불행한 백성들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왕비에 대한 처사에 대해서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왕비는 그래도 나라의 관습을 지키려고 하는데, 왕이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런 일로 폐위시키는가? 라고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술이 깨고 난 후 후회했을 때, 빨리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돌이켜야 하는데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고 신하들의 말에 넘어가서 바르게 되돌리려고 했던 것을 포기하는 왕을 보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왕, 어떤 일에 있어서 바른 것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왕이라고 비난하고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객들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을 알고 여러분들이 관객 입장에서 보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신하들에 대해서 분개하는 관객들이 있을 것입니다. 신하들은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라는, 국민들은 세금을 모아 그들에게 많은 봉급을 줍니다. 그렇게 많은 봉급을 주고 그들을 그 자리에 앉힌 연유가 있습니다. 왕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잘못 판단할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왕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신하의 자리에 앉히고 그런 권력과 부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왕의 눈치를 보기에만 급급하고,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네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기적인 국가 관리들의 이해타산만 하는 모습에 대해서 분개할 수가 있습니다. 

왕비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사 왕이 좀 무리를 했다할지라도 왕비는 좀 더 지혜롭게 할 수 없었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총리가 바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제왕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총리가 별 힘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바뀐다고 하니 그 기사가 각 일간지의 탑으로 장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하튼 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는 왕비가 좀 더 지혜롭게 해서 나라를 혼란과 소란으로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이런 아쉬움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소신도 있었고, 생각도 있겠지만 백성들을 위해서,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조금 더 지혜롭게 할 수는 없었을까? 라는 아쉬움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래전부터 기억했던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습니다. 별로 행실이 좋지 않은 총각이 있었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고 성격도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이 총각과 결혼하기로 할 처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지혜로운 저 처녀가 저런 남자를 만나서 어떻게 살 것인가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하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사람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악하기까지 했던 그 남자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데 아주 좋게 바뀌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그렇겠지 생각하다 나중에는 ‘저럴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이 아내가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보십시오. 남편은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오고 주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정성스럽게 맞이하면서 “오늘 하루 일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이렇게 많이 드셨습니까? 술을 드시니 속이 얼마나 좋지 않습니까? 우리 가정을 위해서 이렇게 애쓰시니 고맙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내는 술 취한 남편에게 음식도 잘 챙겨주었습니다. 술 마시고 들어온 다음 날 아침에는 “어제 밤에 많이 드셨으니 힘이 드시죠? 인생이 얼마나 힘이 드십니까?” 라고 위로하였습니다. 매일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잘 바뀌지 않았습니다. 

간혹 남편이 술을 마시지 않고 들어올 때도 똑같이 정성스럽게 남편을 모셨습니다. 차를 준비하든지 과일을 정성스럽게 준비한 후 점잖고 얌전하게 한 두 마디 했습니다. “이렇게 귀하신 어른이 그렇게 귀한 몸을 시궁창으로 만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남편이 담배를 피울 때면 “이렇게 튼튼한 몸인데 그 몸을 그렇게 굴뚝으로 만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한 마디 두 마디 하다 보니 남편이 조금씩 조금씩 변했습니다. 결국 남편은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좋은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배우자가 무엇입니까? 돕는 배필입니다. 이것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모자라는 것은 아내가, 아내가 모자라면 남편이 돕는 배필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모자란다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맞추어 서로에게 좋은 사람, 좋은 가정을 만들어가고 좋은 사회, 좋은 나라를 만들어 가야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아쉬움이 참 많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비슷한 일들을 보고 아쉬움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에스더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좀 할 말이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으로 이방인들과 접촉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왕비 자리를 생각하고 나서는가? 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저런 사연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왜 그렇게 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에스더는 아주 아름다운 여성인데 그 아름다운 여인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들어가는가? 라는 아쉬움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참으로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모르드개의 공로로 죽을 뻔한 왕이 살았는데 왕은 왜 그렇게 대접했을까 라는 안타까움, 아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여기까지 보고난 뒤 어떤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도 분개하고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고 화를 낼 것 같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나름대로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를 볼 때에도 야당도 여당도 진보도 보수도 나름대로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의 의견이 있고 색깔이 있다 할지라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범위를 뛰어넘을 줄 알아야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무언가 달라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라고 색깔이 없겠습니까? 의견이 없겠습니까? 지지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선호하는 일들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달라야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지만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두 세계를 발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발로는 이 세상 나라를 딛고 또 다른 발로는 하나님 나라를 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세상 나라를 발로 딛고 사는 것 같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의 무게 중심, 인생의 중심은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 세상 나라는 짧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는 너무 깁니다. 그렇다면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며, 어떤 눈으로 보아야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영원히 살아가야할 하나님의 나라, 그 시각으로 보아야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시각으로 보아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로 기독교인 같고 기독교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각은 어떤 시각일까요?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시각으로 이 세상의 일들을 보는 것입니다. 내 일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벌어지는 나의 일이나 가정 일, 나라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극작가, 연출가, 감독 같은 하나님 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들, 누구를 비난할 수밖에 없는 일들, 저것은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들, 너무도 안타깝고 아쉬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 위에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중에서 어떤 일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입니다. 또 그 중에서 어떤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아닐지라도 그렇게 해도 좋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손아래, 하나님의 눈 아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그 모든 일들을 모아서 하나님께서 아주 위대하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 틀림없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일들, 여러분 가정의 일들에 대해서 이런 거시적인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잠시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얼른 뒤로 가서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다 모아 필경은 위대한 하나님 일을 하실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시각은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과 정의를 함께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시각을 가지고 보아야합니다.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또는 내 일이든지 세상일이든지 그런 시각으로 볼 것을 주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필경 어느 순간에는 개인적인 심판 혹은 우주적인 심판을 하시고야 맙니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심판으로, 악한 사람에게는 악한 심판으로 하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눈으로 보아야합니다. 

우리 다시 기억하십시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들처럼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오류가 없는 가장 정확한 심판을 필경은 하실 것입니다. 이 눈을 가지고 일들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일들이 우리 기대와 소망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눈으로 보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안타까워할 것이 없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분노할 것이 없습니다. 

‘에스더’라는 한 드라마를 보면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이 드라마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라고 자주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이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그렇게 긴 드라마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이 속에 있기 때문에 그 기간이 긴 것 같지만 아주 짧습니다. 영원한 세월 중에서 어쩌면 한 점밖에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드라마 ‘에스더’와 우리의 드라마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에스더’ 드라마는 이미 중간 중간 장면 그리고 마지막 완성될 장면이 정해져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펼쳐놓은 퍼즐 조각 하나하나가 다 뭉쳐지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나올 것인데, 그 작품도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연출가, 극작가 그리고 감독이 이미 정해져 있는 작품을 향해서 하나하나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나름대로 하나의 단편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퍼즐 뭉치라면 퍼즐 하나하나를 지금까지 만들어왔습니다. 그런 것들과 앞으로 여러분들이 만드실 인생의 조각들이 합해져서 우리 인생을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만든 인생의 퍼즐조각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만들 퍼즐조각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분명하다고 제대로 알게 되면 현재 하나 하나 만들어가는 인생의 퍼즐 조각을 참으로 정성스럽게 잘 만들 텐데, 하나 하나 인생 조각 퍼즐을 만들어 가다가도 그것이 언제 완성될지 그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기다리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만드는 것과 완성된 인생 퍼즐이 연관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더는 우리가 지금 나름대로 아름다운 퍼즐을 만들다가도 그것의 아름다운 결과가 나에게 금방 다가오지 않는다는 딜레마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야말로 아닌 퍼즐들을 만들어 가기도 하고, 정말로 그래서는 아니 될 악한 퍼즐을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금방 악한 결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무도 생각없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나중에 완성될 인생 퍼즐과 우리가 지금 만들어가는 인생 퍼즐조각들이 별개가 아닙니다. 이것들이 합해져 우리 인생의 마지막 작품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퍼즐을 만들면 인생은 반드시 악한 모습으로 마감하게 될 것이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완성된 인생 그림에 대해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완성된 작품, 완성된 그림은 누가 만드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알아야합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우리가 각각 만든 퍼즐 조각들을 하나님께서 나중에 조립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문가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퍼즐들을 조립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기술자가 아닙니다. 멋지게 만드는 예술가입니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재주를 가지신 조각가, 예술가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혹은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혹은 실수로 인생의 퍼즐 조각을 잘못 만들 수도 있습니다. 너무 슬픈 퍼즐 조각일 수 있고, 너무 흉한 퍼즐 조각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보기도 싫고 생각도 하기 싫은 인생을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완성시키는 우리 하나님은 너무도 위대하신, 너무도 기술이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더운 여름인 오늘 영화로 시작했는데, 영화 한편을 더 말씀드립니다. 1959년에 나온 아주 오래된 영화입니다. 프랑스 군대와 영국군이 스페인에서 전투를 하였습니다. 프랑스 군대의 마이클이라는 장교는 전투를 하다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기 위해서 인근 수도원에 입원을 하게 됩니다. 마이클의 간호를 맡았던 수녀는 테레사라는 수녀였습니다. 테레사는 마이클을 간호하다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마이클은 완쾌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수녀원을 떠나게 됩니다. 떠날 때 테레사는 마이클에게 사랑의 증표로 시계를 주었습니다. 

마이클이 떠났습니다. 마이클이 떠난 후 테레사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수녀원을 빠져나왔고, 마이클을 찾아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그런데 테레사가 수녀원을 떠날 때 수녀원의 마리아상 하나가 없어지는 신비한 일이 생겼습니다. 수녀원을 나선 테레사는 어느 집시 마을에서 마이클에게 준 시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물어보니 마이클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테레사는 방황을 하고 집시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스페인 귀족 청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마이클은 살아서 테레사를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이것을 모른 채 테레사는 스페인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테레사와 사랑에 빠진 귀족 청년이 투우 경기 중에 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테레사는 악몽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자기와 사랑에 빠진 남자는 모두 죽는다는 악몽이었습니다. 그러다 테레사는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마이클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고뇌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 욕심에 따라 그 남자를 계속 사랑할 것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 때문에 그 남자가 죽는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하는가? 테레사는 아주 힘든 결단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남자 마이클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을 포기하고 수녀원으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한편 마이클은 또 다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다른 병사들과 함께 적진에 뛰어 뜨는 순간 포탄이 바로 머리 위에 떨어졌습니다. 저 멀리서 마이클의 아버지가 망원경으로 쳐다보고 있다 아들 마이클의 머리 위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시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들 마이클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마이클의 아버지는 “기적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영화 ‘기적’입니다. 

여러분, 인생 조각 잘 만드십시오. 그러나 혹 여러분의 실수로 또 어떤 환경 때문에 인생의 퍼즐 조각을 잘못 만들었더라도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너무 아파하고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까지도 얼마든지 최고의 작품으로 만드실 수 있는 우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사십시오. 힘을 들이십시오.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믿으십시오. 우리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위대한 하나님, 최고의 예술가이신 우리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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