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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의 요셉 (창 41: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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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요셉 (창 41:37-45) 


얼마 전에 마친 ‘2010 남아공 월드컵 축구대회’에 온 국민의 관심이 축구중계방송에 집중되었었습니다.
그 당시 축구는 모든 대화 속의 단골 메뉴가 되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그저 축구이야기입니다. 월드컵 축구대회에 관한 소식을 모르고서는 상대방과의 대화에 끼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지난 번 우리 대표팀이 그리스를 2대 0으로 이겼을 때에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모두 축구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안방에서도 “대~한민국”, 운동장에서도 “대~한민국”, 거리에서도 “대~한민국” 그저 여기저기서 우리 대표팀을 응원하는 응원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밤 우리 대표팀이 비록 축구의 강호 아르헨티나에게 1대 4로 패하고 말았습니다마는 그래도 우리 대표팀을 응원하는 응원의 함성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축구 경기는 전반전이 45분이요, 후반전이 45분입니다. 이 경기를 세 명의 심판들이 주심, 부심으로 나뉘어져 경기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시킵니다. 만약 선수 중에 경기 룰을 지키지 않고, 거칠게 태클하고, 위험한 플레이를 한다면 그 선수는 경고를 받게 되고, 이러한 경고를 한 경기에서 두 번 받게 되면 그 선수는 퇴장 당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경기장에서 강제로 쫓아냅니다. 그래서 심판은 선수들로 하여금 경기 룰에 따라 화인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축구 경기를 놓고, 우리 인생을 생각해 볼 때 인생이 마치 축구 경기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축구 경기에 전후반이 있듯이 우리 인생도 전후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이 50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인생의 전반기로, 그 이후를 후반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은퇴를 기준으로 그 이전을 인생의 전반기로, 은퇴 이후를 인생의 후반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전반전에 선제골을 내주고, 상대 팀에 끌려가는 경기를 했다면 후반전에서는 선수를 대폭 교체하고, 작전을 새롭게 수립하여 전반전에 잃은 점수를 후반전에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고, 오히려 역전승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인생의 전반기에 하나님을 떠나 실패한 삶을 살았어도 후반기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나님을 찾아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성공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생의 전반기가 아니라 후반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전반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반기보다 후반기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축구 경기에 있어서 반칙을 많이 하다보면 프리킥, 코너킥, 페널티킥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점수를 잃게 되기도 하고, 또 경고를 받고, 그 경고가 반복되면 마침내 경기장에서 퇴장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을 누리고, 복된 삶을 살도록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규칙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됩니다. 이 말씀 따라 살아야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 따라 살아야 주님께서 주시는 수(壽)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이 말씀을 떠나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사는 사람이 있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사는 사람, 유행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는 인생의 전반기에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되는 경고를 받고도 그 경고를 무시하다가 실컷 얻어맞고 이런저런 고생을 하거나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인생에서 완전히 아웃(out) 당하여 일찍이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인생을 만회할 기회를 갖지도 못하고, 그대로 죽은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인생의 전반기에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로 돌아와 복된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2개월 전, <신학 심포지엄>이 강원도 원주에 있는 한솔 오크밸리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수 겸 뮤지컬 배우인 이재영 씨가 초청받아 와서 간증 및 찬양을 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맘마미아>라는 뮤지컬을 보신 분이 있으십니까? 오늘 소개해 드리는 이재영 씨가 바로 이 맘마미아의 주인공역을 맡은 주연 배우입니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유혹> <사랑은 유행이 아니야> <집시> <대단한 너> 등이 있으며 뮤지컬 출연 작품으로는 <맘마미아> <브로드웨이 42번가> 등이 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 다니다가 그 후로 교회를 떠나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성인이 되어 가수로 한참 활동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이 끝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뻥 뚫린 것 같고,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을 활동하다가 마침내 병원에 1년간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 병원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되찾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이 <맘마미아>라는 뮤지컬의 주연 배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연을 삼일 앞두고, 허리가 아파 꼼짝 할 수 없어서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보니 5주간은 꼼짝 말고 쉬어야 한다는 진찰 결과가 나왔지만 그렇다고 의사의 말대로 5주간을 편히 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어 달려 간절히 기도했는데 삼일 만에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 공연을 할 수 있었고, 또 공연하다가 다리의 근육이 파열되는 바람에 걷기도 힘든 상황이 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밤에 기도하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아픈 다리에 진동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피곤해서 그냥 잤다고 합니다. 그 이튼 날 일어나 보니 어느 다리가 아픈 다리인지 모를 정도로 깨끗이 나아 있었다고 합니다. 자, 보라. 이재영 문화선교사는 아직도 인생의 전반기를 사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경고에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로 돌아와 새로운 인생,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보니 그의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부와 명예와 건강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황금 같은 인생의 전반기에 자신의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일했고,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어 감방생활도 했습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무려 13년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정과 애굽이라는 나라를 기근 가운데서 구하는 애굽의 위대한 총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 당시 애굽이라는 강대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 첫째, 그는 꿈(비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꿈은 스스로 가진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었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형들과 함께 밭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는데 요셉이 묶은 단은 일어서고, 형들이 묶은 단은 요셉이 묶은 단을 죽 둘러서더니 그 앞에서 넙죽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꿈이 보통 꿈이 아닙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 역시 보통 꿈이 아닙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꿈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언젠가는 이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아버지의 명을 받고 형들의 안부를 알기위해 집을 나섰다가 그만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애굽의 보디발 장군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도 그는 이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주인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 나와 동침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악을 행할 수 없노라고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에 화가 난 주인의 아내가 오히려 요셉을 모함하며 뒤집어씌우지 않습니까? “그가 동침하자고 내게로 왔었노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래서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주인에 의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이 꾼 꿈,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자꾸만 치닫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꿈을 포기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꿈이 누가 주신 꿈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아닙니까? 그러니 어떻게 그 꿈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포기해도 요셉은 하나님을 믿기에 그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었습니다. 

보십시오. 요셉의 그 믿음이 헛된 것이었습니까? 요셉의 그 꿈이 헛된 꿈이었습니까? 요셉이 가진 희망이 헛된 것이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그 꿈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힘으로 왕의 시중을 드는 두 관원장을 만날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 주므로 훗날 그 일로 인하여 바로 왕 앞에 나아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가져야 하고, 또 그 꿈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에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아니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특히 인생의 전반기를 살아가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가져야 하고, 또,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또,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는 분들도 이제는 다 끝났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75세에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집니까?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00세가 되었을 때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인생의 후반기를 사시는 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약속은 우리에게 꿈이요, 비전이요,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꿈이 있는 삶과 꿈이 없는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소망이 있는 삶과 소망이 없는 삶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의 모든 수고와 고생도 꿈과 소망이 있을 때 참아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을 때 어떻게 인내할 수 있겠습니까? 절망하며 퍽퍽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들이 왜 절망하고 탄식하며 쓰러집니까? 내일에 대한 꿈과 소망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천국에 대한 약속, 충성한 자에게 주실 상급과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언젠가는 반드시 주어지게 될 것을 믿으며 그 때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이 시대의 요셉으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나일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일 강가에서 올라와 앞서 올라온 소들과 함께 있더니 그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먹어치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다시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한 줄기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마른 일곱 이삭이 충실한 일곱 이삭을 꿀꺽 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이 꿈 역시 보통 꿈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번민한 바로 왕이 애굽의 모든 점술가와 현인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꾼 꿈을 말하지만 누구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저들이 감히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없이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지 않으시면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하나하나 해석해 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왕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일곱 해 풍년 뒤에 일곱 해 흉년이 있을 것인데 이 일곱 해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 땅이 기근으로 망하게 될 것이니 이제 왕께서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장차 올 풍년의 때에 모든 곡물을 거두어들여 각 성읍에 쌓아두게 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시면 이 땅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7년 흉년의 대비책까지 제시합니다. 

이 일을 좋게 여긴 바로가 오늘 본문 3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이는 바로의 바른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못 되어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지혜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바로에게는 이런 지혜가 있었습니다. 어디 가서 요셉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너 외에는 장차 있을 흉년의 위기 가운데서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요셉을 힉소스 왕조의 총리로 삼고, 자신의 인장 반지를 빼어 그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게 하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태워 애굽 전국을 총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애굽을 흉년의 위기에서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까지 그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자신의 가정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나라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요셉처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정을 위기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를 위기에서, 또 자신이 경영하는 사업을 위기에서, 뿐만 아니라 이 나라가 처한 모든 현실적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가정도 직장도 나라도 든든히 서가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이 시대의 요셉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요셉은 사람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지능을 중요시하여 머리 좋은 사람을 우대했지마는 현대는 지능보다 감성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 이유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지식과 정보를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는 높은 감동의 능력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감동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성숙한 인격에서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얻게 하는 성숙한 인격이 있었습니다.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 되자면 먼저 믿음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주인의 마음에 들게 잘 처리했고, 그리고 정직하게 일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이러한 요셉을 믿고 집안의 제반 일을 다 그의 손에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셉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도 잘해냈습니다. 이는 그가 성실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갑니까? 성실한 사람이 아닙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우등상보다 개근상을 더 중요시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 줄 아십니까? 개근에는 성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꾸준히 공부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다 보면 아플 때도 있습니다. 학교에 가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가서 공부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요셉은 주인이 있든 없든 주인의 일을 내 일처럼 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요셉의 성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높은 도덕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나와 동침하자는 도덕적인 유혹을 받았을 때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기에 적당히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비록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거절의 결과를 생각지 않고, 이는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이기에 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 것입니다. 이러한 높은 도덕성이 사람의 마음을 얻게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 되자면 용서와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그리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들어가게 한 보디발의 아내에게 그 어떤 보복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힘이 있지만, 그 힘을 보복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용서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마음을 얻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용서와 포용은 일치와 화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용서와 포용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요셉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믿었고, 그 믿음으로 형들과 보디발의 아내를 용서하고 포용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요셉처럼 용서와 포용력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라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꿈(비전)이 있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으며 사람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이런 요셉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요셉은 가정에 필요한 사람이요, 나라에도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모두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될 때 가정을 위기에서, 직장을 위기에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시대의 요셉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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