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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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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창 12:1-9)


어떤 한 남자가 네 번째 이혼을 당하고 실의에 빠져서 부산 해운대 바닷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쓸쓸한 남자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이 남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남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너는 신실했으니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
이때 이 남자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 하와이에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는 것은 무서우니까 하와이까지 바다 위로 다리를 놓아주세요."
하나님께서 그것은 불가능하니까 다른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생각한 후에 이 남자가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저는 네 번 이혼을 했는데 전 부인들이 모두가 하는 말이 제가 너무 민감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소원은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여자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또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알게 해 주세요."
긴 침묵 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리를 2차선으로 놓아줄까, 4차선으로 놓아줄까?"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먼저 앞서 가셔서 승리의 길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접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절대로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낙담하고 절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 가셔서 모든 골짜기가 메워질 것이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굽은 길을 곧게 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험한 길은 평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장은 꿈을 이룰만한 어떤 환경과 여건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앞에서 적절한 사람과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적절한 해결책과 기회를 계획해 놓고 계십니다.  그 꿈을 이룰만한 가장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계십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홍해 앞에 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던 그들 앞에는 홍해 바다가 놓여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놓였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심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부둥켜안고 울면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실 가장 확실한 환경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언제 뒤로 처지게 될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더 좋은 길을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기 전에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 여러분보다 앞서 가셔서 여러분의 삶의 다음 장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더 나은 장이 나올 것입니다.  더 큰 승리와 성취의 장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원리를 안다면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싸우거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여러분 편에 서서 여러분을 위해 싸우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알고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것입니다.  비록 폭풍 가운데 서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것입니다.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 할 때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뒤집힐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때 절망 가운데 빠진 제자들은 예수를 깨우면서 외쳤습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환경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분명하다면 거친 파도가 나를 덮쳐올지라도 나는 주님과 함께 더 높은 꿈을 안고 날아오를 것입니다.  폭풍 가운데서도 나의 영혼은 잠잠히 주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붙잡고 계속해서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의 손이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일어나 우리를 향하여 손길을 펴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옳지 않는 사람들은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의로 보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마땅한 것으로 잃었던 시간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자신의 상황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아침에 현관에 닫혀 있던 커튼이 젖혀지면 보이지 않았던 아름다운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때가 되면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상황을 정리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문을 준비하고 계시고, 문을 열면 어떤 사람을 만나 정확히 필요한 기회를 얻도록 계획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이런 새로운 마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위하여 좋은 일을 준비하고 계시리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먼저 가셔서 모든 골짜기를 메워주실 것입니다.  모든 산과 언덕을 낮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굽은 길은 곧게 펴주실 것입니다.  험한 길은 평탄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낭패와 실망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부당한 상황 앞에서 억울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주저 않지 마십시오.  자기 연민에 빠져있지 마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미래에 이미 새로운 출발과 친구와 환경과 기회를 연결해 놓으셨습니다.

보십시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가나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갈 때에는 정말로 억울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자리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리에 처해진 것은 정말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충분히 자기 연민에 빠질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앞서 가셔서 굽은 길을 곧게 펴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길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가장 멋지게 일을 할 수 있도록 가장 확실한 환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제는 좌절을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도 같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마십시오.  주 안에서 새로운 비전을 가지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날은 새로운 날입니다.  어제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어도 기억하십시오.  내일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앞으로 밀어붙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폭발적인 성장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어제는 비록 좋지 않았어도 우리는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사막에 물을 내시고 나를 번영케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의 건강진단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진단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건강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미 제 앞날에, 그리고 여러분의 앞날에 치유와 건강과 승리를 나타내셨다고 믿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의 형편이 별로 나아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절대 바른 믿음의 생활로 돌아올 것 같지 않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는 길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이의 앞날에 먼저 가셔서 거친 골짜기를 메우시고 굽은 길은 곧게 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확실한 자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여기에는 정말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보통 복이 아닌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잘 믿었으면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나님을 잘 믿은 다윗은 정말로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정말로 잘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입과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학자였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그 당시에 가장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입과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기에 딱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실천적인 열정을 가지고 온 몸으로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성경적인 논리는 그의 머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몸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바울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다윗 못지 않은 복을 받았습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참으로 많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 평안, 감사와 같은 단어들입니다.  평범한 말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는 천국적인 축복들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바울의 삶은 그다지 부럽지 않습니다.  그가 고백한 것과 같이 많은 고난과 고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과 고생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 때문에 목이 잘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는 정말 잘 산 사람이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기뻤고 언제나 감사했고 늘 평안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었는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워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느닷없이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책도 없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왜 떠나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떠나면 어떻게 해 주실 것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냥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이 믿어 졌습니다.  그러니 궁금하지도 않았고 불안하지도 않았습니다.  떠나라 하시니 그냥 떠났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 있는 행동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100살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저는 31살에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31살에 낳은 아이도 너무 좋고 귀해서 아이를 볼 때마다 입으로 빨았습니다.  아이를 볼 때마다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31살이 아니라 100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을까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다가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75세 때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저항과 거절을 관두고라도 질문이라도 했어야 했었습니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자식을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는 이방신들과 똑같이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는 따지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이 땅에 충만해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죽이면 그 축복의 언약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것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

이삭이 모리아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 대신해서 양을 준비해 놓으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은 알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믿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알고서 대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알아야 순종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영원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섭리를 믿을 수는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그 믿음으로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셔야 합니다.

보십시오.  육체적으로 죽은 것과 같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더 깊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죽은 것과 같은 자신에게서도 자식을 주시는 하나님은 죽은 이삭을 통해서도 후사를 이어가실 것이며, 그 후손들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게 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신 보다 먼저 앞에 가셔서 거친 골짜기를 메우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 보다 먼저 앞에 가셔서 굽은 길을 곧게 펴시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끔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신앙생활에 감격이 없고 미지근한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영적인 무감각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그들의 마음에는 복음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고백하는 그 믿음에 대한 뜨거운 고백과 감격이 없습니다.  그저 관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으레히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마음은 사하라 사막과 같이 삭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바른 믿음은 복음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진정한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능력은 복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다."
사도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행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은 그의 행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 없이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대단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는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그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장로교회 교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믿음과 행함을 따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행함의 문제에 대해서는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어떤 행함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는다면 당연히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참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지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가 해야 할 일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는 자연히 맺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고 있다면 당연히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천주교가 주장하는 선행 공로주의 신앙은 거부합니다.  우리가 어떤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다면 마땅히 아름다운 행위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들음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들음은 행함이기도 합니다.  "말을 잘 듣는다"라고 할 때의 들음은 귀로 듣는 히어링(hearing)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들음은 행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를 하면서 정말로 답답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일 때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많은 교인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과 충돌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의 상식을 벗어나서 행동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과 세상은 일치하고 하나님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가끔은 충돌합니다.  가끔은 갈등합니다.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일치하고 상식과 충돌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과 충돌하고 상식과 갈등하고 더구나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과 배치될 때에는 서슴없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믿습니다.  상식을 믿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을 경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축복을 이 땅에서 누려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전을 하다보면 방향 감각이 뒤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대로 운전하지 않습니다.  꼭 거꾸로 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도 표지판대로 운전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표지판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표지판과 나의 경험과 느낌과 상식이 충돌하면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표지판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은 교통표지판만도 못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충돌하면, 말씀과 상식이 충돌하면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의 경험과 상식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을 운전합니다.  그래서 밤낮 돌아다닙니다.  엉뚱한 대로 돌아다닙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짓을 하며 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장로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당회입니다.  당회는 교회의 정책을 결정하고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정책과 방향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장로 선거를 할 때에 교인들은 대개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이 선출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은 좋은데 믿음은 썩 좋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골치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장로뿐만 아니라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당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어떤 일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면 누구보다도 그 교회의 목사와 장로가 예수를 잘 믿어야만 합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결정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상식과 경험이 믿음을 넘지 못하는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그 교회는 결코 희망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상식 안에서만 일을 하려고 하는 교회와 교인들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능력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경험과 상식 안에서 복음을 가두어두려고 하지 마십시오.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한 감격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제한이 없는 복음의 능력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세상이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을 때에는 세상의 작은 일들 앞에서도 금방 쓰러지고 넘어지는 나약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그래야 이 다양한 시대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샤머니즘에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힌두교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에서 보면 기독교는 독선이요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 현대인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현대인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내 아버지가 한 분이요, 내 어머니가 한 분이듯 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구원의 길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만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상대적인 믿음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신부가 목탁 두드리는데 가서 앉아 있으면 통큰 사람처럼 보입니다.  승려가 성당미사에 앉아 있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언론들이 저마다 폭넓은 종교로 칭찬을 합니다.  멋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의 눈으로 보면, 거룩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들입니다.  바른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끝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다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엄마가 복잡한 길에 나아갔다가 어린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길 잃은 아이는 "엄마, 엄마" 엄마를 찾아서 울고 있습니다.  이 아이를 찾는 어머니는 헝클어진 복장에다 소지품이 어디 갔는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동분서주 허겁지겁 뛰어다닙니다.  "철수야∼ 순희야∼"

사랑하는 여러분, 길을 잃어버린 아이의 마음이 불안할까요, 아니면 이 아이를 찾는 어머니의 마음이 더 불안할까요?  내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에,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갈 때에 아버지 하나님은 그 마음이 너무 아파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분을 죽이시고 피 흘리게 만드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돌아오기만 하면 나를 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사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위에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내 경험과 충돌할 때에는 그 열심도 식어집니다.  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내 감정과 충돌할 때에는 그 봉사도 그만두게 됩니다.  우리가 주여, 주여 소리는 잘 지르지만 정말 중요한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식과 지식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을 생각하면서 그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 위에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식으로, 상식으로, 경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사십시오.  믿음으로 살면 하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어떤 일을 만나도 만사가 형통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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