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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사 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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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사 57:15)


(사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양한 칭호를 사용하여  이 피조 세계로부터 완전히 초월해 계시는 신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지극히 존귀하며(람 웨닛사)는 사실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두 단어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공간적 측면에서의 초욀성을 나타냅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경험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기록한 사6:I에서 그의 ‘높이 들린’보좌를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된 문구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매우 높은 상태와 높이 들려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으로서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모든 사건을 주권적으로 작정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히 거하시며’(쇼켄 아드)는 하나님이 시간적 측면에서 그의 언약 백성 사이에서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문구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그의 백성 사이에서 거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데 성경에서 여러 차례 사용되었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도 사용되어,하나님이 높고 거룩한 곳과 자신을 진실로 의지하는 자와 함께 거주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거주가 모든 존재와 차별되게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카도쉬 쉐모)는 문자적으로 ‘그의 이름이 거룩하다(His name is holy)’는 의미 합니다. 
히브리 사회에서 이름은 그 이름으로 불리우는 존재 자체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본성과 인격이 거룩하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거룩 그 자체이며 인격적으로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성결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거룩이라는 뜻은 '불의와 부정에서 분리된 상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죄와는 관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윤리, 도덕적인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며 적극적인 의미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신의 속성'을 지니신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 합니다
(레 11: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성자 예수님이 거룩 하시다 합니다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성령 하나님도 거룩하게ㅔ 하는 일을 하신다 합니다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러한 말씀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있는 사물이나 사건, 그리고 인간(성도)도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세상 만물과 존재적으로 구별됩니다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거룩'함으로는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피조물인 만물과 인생들과 '구별'된 '창조주'요 '섭리주'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과 '곤충'과는 엄연히 '존재적'으로 구별되듯이 하나님은 절대적인 거룩한 '신'으로서 우리 인생들과 구별된 분이심을 뜻합니다.
  
또한 완전무흠하십니다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천사들이 거룩하다고 찬양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 무흠'하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아무리 의로운 인생일지라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삶에서 도덕적으로 '흠집'이 없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민족의 불의와 부정에 비분 강개한 '이사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달리 존재적으로는 '신'이시요 윤리 도덕적으로는 '완전 무흠'하신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인간과 인간 세계와는 '분리되신'분으로 계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특성은 죄악을 행치 않으십니다

(욥 34: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인생들이나 창조하신 만물들에게 결코 '악이나 불의'를 행치 않으십니다.
'죄악'을 불인정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시험받을 때에…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약1:13)고 원망 불평하지 말 것을 주의 시켰습니다.
   
나아가 거룩하심을 요구하십니다

소극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악을 원치 않으시고 적극적인 면으로는 인생들의 '거룩한 행위'를 기뻐하십니다

(레 20: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잠 15: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또한 필연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아 '거룩함에 이르라'고 요구하십니다

(레 11: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리고 거룩한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온전히 계시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이요, 십자가의 대속 사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처는 거룩한 곳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보셨으니  (시 102:19)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거니셨으며, 인간과 만나셨습니다(창 3:8).
그런데 한 순간 하나님은 인간과 거처를 분리하셨습니다. 

바로 아담이 범죄한 순간입니다. 죄는 더러움입니다. 죄는 자체만이 더러울 뿐만 아니라 주위를 오염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아담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나님과 완전히 격리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분리는 역사의 흐름을 타고 전 인류에게까지 그대로 연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분리는 그 자체로서 인간에게는 죽음이요,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죄와는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동이 서에서 멀 듯 하나님께서는 죄와 멀리 떨어져 계십니다.
죄인이 만일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그는 죽어야합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따라서 죄를 범한 인간의 상태는 진퇴양난의 처지입니다.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멀어져서 고통이요, 가까이하자니 죽음이 앞을 가로 막아서서 고통입니다.
이에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담을 허셨습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리고 자기의 의를 인간에게 전가하심으로써, 하나님과 가까이함으로써 인간들이 죽게 되는 것을 방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이하고 그와 교제하며, 영원한 생명 얻기를 원한다면 십자가의 보혈로 자신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보혈은 죄인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그리고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고 성소를 세우셨습니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영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겔 37:26)
  
그러므로 거룩하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통회하는 마음에 함께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에 자신의 거처를 삼으십니다. 통회하는 마음이란 '부수어뜨린 마음', '상한 마음'을 말합니다.
즉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고 비워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무엇이든 인간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모시더라도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신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통회하고 자복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더럽고 속된 마음을 털어 버린 후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또한 거룩하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에 함께 합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하나님께서 거처로 삼으시는 또 하나의 장소는 인간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어떠한 마음입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굳게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마음입니다. 굳게 닫힌 마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절대로 그것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기를 기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좌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기쁘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기쁘게 명령하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세속의 지혜보다 덜 귀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은 그 순간 우리에게서 떠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 마음 가운데서 영혼을 소성케 하십니다.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뎌지고 침체된 영성을 일깨우십니다. 세상일에 관심하던 우리의 영혼을 하늘 일에 관심하게 하십니다.
죄와 거룩, 불의와 의,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 짓게 하며 죄와 불의를 멀리하게 하고, 거룩함과 의를 좇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은 초여름의 수분을 머금은 풀처럼 파릇파릇해질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강하게 하십니다.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통회하는 자의 마음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내적인 면으로 오히려 강해집니다.
부드러워진 반면 어떤 유혹에도 요동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양 도둑이 있었는데 양을 훔쳐간 사람에게는 이마에 양 도둑의 약자인 S.T.(Sheep thief)라는 낙인을 찍었다 합니다. 일생 동안 다른 데 가서도 양 도둑질을 못하도록 하는 형벌인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 양 도둑질을 해서 이마에 화인을 받았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먼 곳으로 도망 다니면서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마을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가서 다 도와 주고 대신 아파해 주고 대신 매맞아 주었습니다. 죽음의 자리가 있으면 대신 처해 주고 슬픈 사람 옆에 사흘이라도 같이 있어 줍니다. 그래서 그 동네와 이웃 마을에 서는 그 사람이 없으면 살 맛이 없어질 정도로 그는 동네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친아버지처럼 존경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게 되자 양 도둑질을 하던 때 그에게 낙인을 찍었던 사람들이 다 죽고 그들의 2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만은 장수를 합니다. 2세들이 자라서 그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국민학교나 중학교 입학식 때에는 으례히 훈사를 하는 유명한 분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마에 낙인을 찍는 풍속은 없어졌습니다. 할아버지 이마에 어째서 S.T.가 붙었느냐고 묻습니다. 양 도둑의 약자와 성자(Saint)라는 말의 약자는 같아서 너무나도 그분이 거룩해서 성자라는 낙인을 찍었다고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양 도둑이 성자가 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요구를 반영해 줍니다. 그 율법안에서 인생들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는 '절대적 간격'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롬7:12-15).

그러므로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힘입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롬3:21,22; 히4:16).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롬3:25-27).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하시니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입니다.
그 안에는 악이 없으며, 죄가 없습니다. 죄나 악의 어떠한 한 요인도 없습니다.
그는 완전히 선하십니다

(마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무결하시며 무흠하십니다.

따라서 그는 죄와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요 또 인생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분으로만 머무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거룩을 행하셨으니 바로 불의한 인생들에게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선물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속죄를 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절대 불의한 인생들의 죄값을 몸소 담당하신 '희생'입니다.
이 십자가의 희생 앞에서 인생들의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적 거룩자요 우리는 항상 상대적 불완전자임을 인식합시다
나아가 항상 '겸허'한 자의식을 지니고, 늘 회개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삽시다.
    
사막을 가는 낙타는 눈썹이 길다고 합니다. 작렬하는 사막의 태양을 가려줄 수 있는 긴 눈썹이 없다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사막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낙타의 등에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혹이 불쑥 튀어 나와 있습니다. 참으로 보잘 것이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낙타는 그 혹이 있기에 신기루를 보지 않게 되고 긴 눈썹이 있기에 사막 길을 걸어갈 수 있다 합니다. 사막을 가는 낙타는 가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걸어간다 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사막길이 너무 힘이 들고 외로워 고개를 들고 울지만 그들은 그 사막을 걸어간다합니다.
모래 바람은 똑같이 어렵고 사막의 불볕더위는 똑같이 어려워도 신앙의 긴 눈썹을 가진 사람은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의 샘이 있는 사람은 뜻을 지켜 나가게 됩니다.
신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서 거룩 하심을 본 받아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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