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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놀랍게 여기신 믿음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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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놀랍게 여기신 믿음 (마 8:5-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태8:10)

어떤 사람이 성 어거스틴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첫째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겸손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둘째는요?”  “겸손이오.” 
“그러면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그는 다시 “겸손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 라고 했고 “모든 미덕의 바구니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지식도 겸손의 바구니에 담겨져야 가치가 있고,  능력, 재물, 권력, 아름다움, 열정도 겸손의 바구니에 담겨질 때 가치 있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것은 겸손의 그릇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훌륭한 모습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11;29)


겸손의 우리의 삶에 유익함을 안겨 줍니다. 
겸손은 화목의 역사를 이룹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우리는 이 말씀에서 겸손이 화목의 요인과 자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글 가운데 통나무 다리위에서 만난 산양(山羊)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연히 강위의 통나무다리에서 두 마리의 산양이 만났습니다. 산양들은 뒤돌아나갈 수도 없고 옆으로 비켜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밀쳐서 강물에 빠질 수도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 산양에게는 나타나는 특이한 특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산양이 몸을 굽히는 것이었고 다른 한 마리의 산양이 그 등을 타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몸을 굽히는 겸손은 화목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영광스러운 명예)를 얻으리라.”(잠2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5:3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온유란 겸손이란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마치 손바닥의 안 밖과 같습니다. 겸손은 소극적이고, 온유는 적극적입니다. 예를 들면 억울하게 욕을 먹거나 모함을 받고도 잘 참고 견디면 겸손입니다. 그런데 욕을 먹거나 모함을 당하고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해롭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을 가질 때 이것은 온유입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똑똑하고 실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대개의 사람들이 친구도 별로 없고 풍성히 베풀거나 나누어주는 것 없이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겸손하지 못함으로 땅을 차지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은 땅의 기업을 받도록 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있게 합니다. 
  
성경은 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149: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3:34)

“내가(하나님께서)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4)

겸손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을 은혜롭게 합니다. 겸손은 은혜의 삶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유지시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복된 자의 신앙의 삶에 겸손함에 있습니다. 진실 되고 참된 신앙은 겸손의 그릇에 담겨있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그 겸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겸손은 어떻게 간직되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단의 백부장의 겸손을 보시고는 그 겸손을 보시면서 놀랍게 여기시면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 백부장의 겸손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하나님 체험입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주둔하면서 유대인들로부터 야훼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과 두려움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분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불렀으며, 자기 집의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하인을 고쳐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을 향한 경외감과 함께 하나님, 아들이신 주님의 절대성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체험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9절)
  
하나님 체험은 겸손함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 경외함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험은 우리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의 체험입니다.
  
사랑은 이론이나 실기가 아닌 체험이며 능력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영역 안에 있는 생명의 질과 같은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 사랑의 실재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부장은 이 사랑 안에서 그의 하인의 중풍병의 고침을 위해 예수님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눅7:4) 
  
사랑의 생명력을 체험하게 될 때에 만들어지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 겸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은 구름, 눈, 비, 바다와 강, 호수로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주장,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담기는 그릇이나 모양에 따라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세는 자기를 버리고 주님의 섭리, 주님의 뜻에 순응하며 주님 모습을 닮아가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은 겸손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며 무엇이든 자기 위 즉 물위로 띄웁니다. 그러나 물이 되지 못하고 얼음이 되었을 때는 전혀 양상이 달라집니다. 딱딱하고 날카로우며 자신보다 더 큰 그릇에 담겨야 하고 상처를 내며 고집스런 형체를 갖습니다. 어름이 녹아 물이 되듯이, 사랑의 생명력으로 우리가 녹아지는데서 겸손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섬김의 기쁨과 즐거움 체험입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가정의 표어 가운데는 “봉사하기 위하여 구원받았다”(Saved to serve)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고침 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어난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기쁨과 즐거움의 체험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체험과 함께 사랑의 생명력을 체험했고, 뿐만 아니라 섬김의 기쁨이라는 것과 섬기기 위한 희생의 즐거움을 체험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백부장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에 그들(백부장과 가까이 지내는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7:4-5)
  
백부장의 하인이 백부장과의 종이되 그 이상의 특별한 관계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한 그의 행동은, 섬김이 무엇인지 섬김의 가치와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 인지를 체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섬김의 기쁨과 즐거움을 체험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을 창조하며 드러내며 나누어주는 믿음은 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시는 큰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신 자랑스러운 믿음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골2:18)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꾸며낸 겸손이 아니라 참된 겸손입니다. 

유대교의 경전인 탈무드를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계시하실 때에 높은 산이나 큰 나무들 중에 거하지 않으시고 볼품없는 가시덤불 속에서 말씀하신 것은 교만한 자보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아는 겸손한 자 중에 거하시기를 즐겨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일제시대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님으로 섬기고 있을 때, 제자인 주기철이라는 젊은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고 보필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고당이 교편생활 당시 사랑했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저명한 민족지도자였던 고당은 늘 바쁜 몸이었고 게다가 방문객이 많아서 항상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예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 날 또 예배 시간에 몇 분 늦어 헐레벌떡 예배당에 들어서는 고당을 향하여 주 목사님은 예배를 인도하다 말고 노기 띤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 장로님은 늦었으니 자리에 앉지 마시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계세요." 
  
호령이 추상같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고당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화석처럼 서서 한 시간 반 동안을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설교를 마치고는 “서 계시는 조 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오" 하니 기도하시는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시한 죄를 용서하옵소서........"  
  
이 모습을 본 교우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예배의 장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교인들은 고당의 고매한 겸손에 감동하여 더욱 큰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높은 고지에 오른 고당의 높은 겸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8:12)
  
거짓겸손이 아닌 참된 겸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존귀한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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