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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있습니까? (눅 14: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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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있습니까? (눅 14:25-33)

   
지난 주간에 한국교회의 큰 별이신 옥한흠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옥한흠목사님(1938-2010)은 사랑의 교회를 창립하시고 은퇴하여 원로목사님으로 계시다가 지난 2일 향년 72세의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2006년에 폐암 진단을 받은 뒤, 투병생활 하시다가 급성폐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누구보다도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시며, 목회자로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옥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드셨으며, 평신도를 깨우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일으키셨습니다.  옥목사님은 국제제자훈련원을 일으키시고, 한국교회 모든 목회자들의 멘토이셨으며, 스승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시며, 모두 다 훈련하여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게 하려고 힘쓰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는 목회자들을 모아 제자훈련을 전수하셨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시면서, 제자훈련으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는 광인론이라는 특강을 하셨습니다.  제자훈련에 물두한다는 말이나 열정이라는 말보다, 미쳤다는 말을 쓰셨습니다.  열정과 비전의 사람으로, 미친 사람이라 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옥목사님의 열정을 본받아 목회에 열정을 다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과 같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위기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과 같이 평화의 시대요, 경제적으로 잘 사는 시대요, 과학과 의학이 발전되어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는데, 위기는 무엇이 위기냐고 하실 것입니다.  누가 예수 믿지 말라고 하더냐, 누가 박해한다고 위기라고 진단하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좋은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위기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무한 성장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던 때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한국교회가 배가 성장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으로 넘어오면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교인 증가율은 곧 교회성장지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1950-1960년에는 25% 성장으로 대단한 성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0-70년 사이에는 무려 412%의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기하급수적인 성장이었습니다.  동리에 천막을 치고 십자가를 내어 걸기만 해도 교회가 되었습니다. 1970-1985년에는 성장이 둔화되면서 103%의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참으로 좋았습니다.     1985-1995년에는 35%의 성장으로 하향곡선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995-2005년에는 -1.6%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희한하게 14,4000명이 감소하였습니다.    그 144,000명이 감소하였다는 통계를 보면서 그들이 하늘나라로 휴거되었는가 하는 농담도 나왔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성장은 정체되었고, 교단마다 비상에 비상수단으로 전도에 열을 내고 있지만, 성장하는 교단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저성장요인도 있지만,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교회의 내적인 요인도 함께 작용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정체되고, 쇠퇴를 초래하는 보다 중요한 요인은 교회적인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가 급변하는 동안에 한국개신교회는 정체기를 지나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기윤실에서 설문조사하여 발표하는 것을 보면 1995-2005년 사이에 구교 가톨릭교회는 74%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불교는 4%의 성장을 기록할 때에 우리 개신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사회학자들이 나서서 설문조사와 함께 심층 분석으로 원인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신뢰도’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종교는 가톨릭교회이었고, 다음으로 불교요, 그 다음이 개신교회였습니다. 종교가 없는 비종교인들에 있어 종교 호감도를 보면 가톨릭교회가 1위요, 불교가 2위요, 개신교회는 가장 낮은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적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은 늘고 있습니다.  

기윤실에서 신뢰도 문제를 가지고 설문조사하였습니다.  한국교회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아주 신뢰한다: 5.2%, 조금 신뢰한다 : 13.9% 두 수치를 합하면 19.1%만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는 2-3년 전보다는 약간 회복되는 수치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사람은 국민 5명에 1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수치입니다.  그러면 60.3%의 대다수의 국민들은 향후 개신교회가 신뢰받기 위해서 해야 할 사회적인 활동이 있다면 봉사와 구제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개신교회가 신뢰성을 잃어가는 것을 보면 개인의 영적인 문제에 그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지도자들이 너무나 속성으로 양산되고 있으며, 봉사와 구제와 같은 사회적인 역할은 미미하기만 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생활하는 것보다 교세 확장에 힘을 쏟고 있기에 신뢰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오셔서 한국교회의 위기와 희망을 강의하였던 이원규박사의 최근 저서, “힘내라 한국교회”를 저자로부터 받아가지고 읽어보았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교회적인 요인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교인이 교인답지 못하다는 현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이미 기울어져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더욱 암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교인이 교인답지 못하다는 말은 결국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 모든 교인들이 교인답게 변할 수 있다면 교회도 아울러 변하는 것이기에, 결국은 우리 모든 교인들이 변해야 하고, 교인다워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제자도”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영국 성공회의 가장 유명한 목회자요 저술가요 신학자이신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으로, 목사님이 세인트 바나바 칼리지에 있는 성공회 안식관에 머물면서 마지막으로 쓰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이 88세의 나이로, 당신이 말하는 대로 마지막 책이라고 하시면서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쓰신 책이었습니다.  

참고로 존 스토트 목사님은 본명은 ‘존 로버트 웜즐리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이시며 1921년에 나셔서 아직 생존하시는 영국 성공회의 신부이십니다.  성공회는 개신교회에 속하는데, 사제를 목사라 하지 않고 신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42년에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런던의 올소울스교회(All Soul's Church)와 성바나바(St. Banaba Church)에 사목하였습니다.    현재는 올소올스 교회의 명예사제로 있으며, 성공회의 안식관에 들어가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재 목사님은 90세의 나이로 영국을 대표하는 목회자요 신학자이신데, 그를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일생 결혼하지 않고 오직 목회에만 전념하신 분으로, 개신교회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 분이 쓰신 “제자도”라는 책이 얼마나 감동을 주고, 좋은 책인지 저의 목회에 새로운 도전을 주었습니다. 

저의 남은 목회는 이 제자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힘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에 대하여 그의 온 지식과 경험과 비전을 담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제자도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의 일생에 그가 선포하는 대로, 그가 말하고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제자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만 앞세우고, 행함이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언행일치를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존 스토트가 이 책 제자도의 머리말에서 “제자인가,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첫째 왜 제자인가?”  그의 설명을 요약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신약성경에 3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많은 이들이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1:26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데,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11:26에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국제적인 도시였으며, 당연히 교회도 국제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바울을 재판하는 아그립바왕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벧전4:16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벧전4:16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제자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었고,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에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신 사도들도 처음에는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제자로서 훈련받아야 하고, 제자로서 일생을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지적하는 것을 보면 “보통 우리는 선택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철저한 제자도를 회피한다. 적당히 헌신할 만한 영역을 고르고, 대가를 치러야 할 듯한 영역은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우리에게 복종할 영역들을 취사선택할 권리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마데테스”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Disciple 이라고 하는데, 라틴어로는 디사이플루스(Discipulus)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배우는 자, 생도, 제자라는 말입니다. 이 제자라는 말이 복음서에서는 232회, 사도행전에 27회나 나오는데, 서신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를 때에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서신서의 자자들, 사도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제자라고 하지 않은 것은 헬라문화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기독교가 단지 철학적인 운동으로서 오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교회는 예수 믿는 자들을 제자로 불렀고, 제라라고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신 것을 보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특수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스승을 닮아가야 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스승과 묶여 있는 인격적인 위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곧 나요, 나는 선생님의 분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 변화의 삶, 새로운 가치관이 스승과 제자를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몸은 돌이키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6-27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미세오’라고 하는데, 싫어하다, 덜 사랑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에게 나아가고, 따르고 믿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형제나 자매와 같은 가족들, 나아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롬14:7-8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하면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 자기만이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사형틀입니다.  살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매달려 죽어야 하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비유가 망대의 비유입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28-30)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망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가 계획한 망대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상당히 큰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망대를 완성할 수 있는지, 그 비용을 산출해보아야 하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지 그가 치러야할 대가를 앉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가 중도에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망대를 세우는 사람에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응분의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결코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입니다.  값을 치르지 않는 역사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망대를 건축하는 것은 그 만큼 비용이 들고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한 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적은 시험에 빠지고 넘어지고 상처를 입더니,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자로 살려는 마음이나 있었습니까?  주님은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셨는데, 우리의 시간, 물질 건강을 바쳐 이제는 갚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라고 하면 목숨까지도 다 내어주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31-32절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 말씀도 동문서답하시는 것 같지만, 제자로서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수많은 생명이 죽임 당할 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은 보존되고, 죽음의 화살이 비켜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명예를 생각하거나, 소유에 대한 욕심이 있다거나 살겠다는 생각이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전투, 오로지 적을 물리치려는 열정, 목숨 걸고 싸우려는 열정만이 그를 지켜줄 것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33절에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소유 중심의 사람이 아니라, 존재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무겁다고 여기던 그 십자가가 나를 지고 주님에게로 갔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잘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까?  이제는 잘 죽기 위하여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작은 예수들이 나타나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주님처럼 죽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약함의 능력, 고난을 통한 영광, 죽음을 통한 영생 이런 것은 파라독스, 역설적인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원한 사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주님을 따르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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