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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곤 속의 풍요 (창 41: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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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속의 풍요 (창 41:46-57)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는데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다고 말한다고. 전자는 비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고 후자는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컵에 물이 반이라도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 컵에 물이 없으면 낙관주의든 비관주의든 할 수 있는 말은 컵에 물이 없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낙관주의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사람을 낙관주의적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낙관주의가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천성이나 성향이나 이런 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천성적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람이었고 도마와 같은 사람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빌립 같은 사람은 계산적인 사람이었고 바울 같은 사람은 자기의 일에 있어서 실패라는 것을 싫어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니까 다 하나같이 믿음의 사람이 되고 예수님의 종이 되고 큰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그의 타고난 천성이든 그의 성격이든 성향을 초월하는 새로운 면이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낙관주의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격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까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를 때 없었던 것이 있어지는 그런 변화가 가능한 것이고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사회가 풍요로워질수록 그 속에 빈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풍요 속에 빈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빈곤함 속에 풍요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빈곤 속에 풍요가 있다는 사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평강, 구원, 축복 이런 모든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평화는 평화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게 아니고 환난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 예수님이 배의 고물에 베개를 하고 주무시는 것과 같은 그게 바로 천국의 평강이에요. 모든 환경이 평안할 수 있는 가운데 평안함을 누리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 속에서 그 마음이 지극히 평안한 것은 이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구원은 모두가 구원을 받는데 나도 덩달아 구원받는 게 아니고 멸망과 심판 속에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홍수위에 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홍수 물속에 빠져죽는데 방주 안에 있음으로 홍수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모두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몇몇 사람을 건져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성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 사람들이 궁핍하냐, 왜 사람들이 마음에 번민이 있느냐, 왜 사람들이 멸망하느냐, 그걸 보고 동요하기 보다는 왜 다른 사람들은 다 번민하는데 누구는 마음에 평강을 누리느냐, 왜 세상에 궁핍함이 있는데 누구는 풍요할 수 있느냐, 왜 모두가 멸망하는데 누구는 구원을 받느냐,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데 몇몇 사람이 지옥 간다면 그렇다면 그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지옥 갈 수밖에 없는데 그중의 몇몇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생존자를 찾고 생존자를 발견하지요. 그때 생존자가 구조될 때마다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지 않았어요. 왜 다 죽었는데 저 사람은 살았느냐고 말하지 않고 기적이다! 놀랍다!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119구조대와 같이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미 무너져버린 백화점과 같습니다. 

인간은 우물에 빠진 양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우물에 빠진 짐승에 비유했습니다. ‘안식일이라도 사람이 자기 양이나 소를 건져내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원래 하나님이 육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날이 아닙니까. 그래서 안식일 제정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다는 말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쉬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도 쉬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쉬신다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쉬지 않고 깨어서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의 출입을 지키시고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지요. 

제가 어제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미국인가 어디에서 어떤 사람이 삼십층에서 뛰어내렸어요. 그런데 죽지 않았어요. 자동차 쿠션위에 떨어져서. 그런데 이 사람이 죽으려고 뛰어내린 것 같은데 내 다리야, 내 다리야, 그러더랍니다. 아니, 죽으려던 사람이 무슨 다리 타령을 합니까. 죽으려던 사람이 다리 아프다고. 그러니까 살려는 마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뛰어내리지 말지. 

그러니까 사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기적으로 산 것이지요. 원래는 죽어야 정상인데 어떻게 살았어요. 인간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뛰어내리면 안됩니다. 그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상황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을 줄 알았는데, 망할 줄 알았는데,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 포기해야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희한하게 안 죽고 아직 멸망치 않고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는 것이지요. 그게 불공평이 아니에요. 거기서 긍휼함 ․ 자비 ․ 소망 이런 것을 엿볼 수가 있어야 됩니다. 

빅토르 휴고가 쓴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이 있지요. 레미제라블이라는 말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미저리 라는 말이 나왔지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전과자입니다. 그가 딸로 데려다 키우는 아이는 고아이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불쌍한 사람들인데 그 스토리에는 뭔가 힘이 있어요. 그 스토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봐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한가. 이걸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사람의 과거는 가난하고 불행하였을지라도 그럼에도 사랑의 힘, 인간의 변화의 가능성 그리고 인간의 구원의 소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정신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들을 소재로 했지만 그들의 불쌍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 이외 뭔가 변화와 구원과 사랑과 미래에 대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데 성경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죄인이고 소외되고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의 불행 ․ 불쌍함에 초점을 맞추는 구절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봐라,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니 너희는 행복한 줄 알아라, 감사한줄 알아라, 이런 메시지가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봐도 그렇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살다가 거지로 죽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얼마나 불쌍하냐 이런 말씀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장면을 기록한 구절도 마찬가지에요. 생각해보면 얼마나 슬픈 장면입니까. 죄 없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장면.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심파극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오랫동안 아파하시고 오호라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고 아파서 외치셨도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순간을 일부러 슬프게 서술하지 않았어요. 단 한마디로 요약했어요. ‘예수님이 고개를 숙이시고 운명하시더라’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비극 ․ 슬픔 ․ 괴로움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후에 부활하실 것이고 죽음을 이기실 것이고 이 세상에서의 환란은 잠시요 그 이후의 영광은 영원한 것이요 그것을 우리가 믿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는 정이 많고 약한 자를 아끼고 이런 면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정서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제가 청소년을 위한 동화전집, 방정환 선생으로부터 여러 동화를 묶어놓은 책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그걸 읽으면서 느낀 것은 거의 대부분의 동화가 가난, 외로움, 이별, 슬픔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같이 이런 이야기일까. 전부 다 가난하고 누가 죽고, 누가 병들고, 외롭고, 이별 이런 이야기 천지에요. 그 중의 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면 아빠, 아들, 딸이 사는 가정인데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일용직으로 그날그날 생활합니다. 어느 날 저녁에 아빠가 떡 네 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아빠와 아들과 딸이 하나씩 떡을 먹었어요. 그리고 엄마가 살아계셨더라면 하나는 엄마 몫이었을 것이다 하면서 끝납니다. 얼마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스토리입니까. 그러나 너무 비극적이에요. 너무 비극적이고 절망적이고 슬픔에 파묻히고 소망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업습니다. 이걸 전형적인 소박함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요즘 TV에 나오는 르포도 거의 비슷한 이야기들입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옛날부터 부르는 이런 노래가 있지요.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 이일 저일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세상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찾아가면 되지 왜 누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아무도 안 찾아와서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까. 언제까지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찾아오지 않으면 찾아가면 되고 이 일, 저 일을 생각하지 말고 찬송을 부르세요.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면 눈물밖에 흐를 게 없어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는 자는 기도할지니라, 병든 자는 교회 장로를 청하여 교회 이름으로 기도할지니라, 기뻐하는 자는 찬양 할지니라’ 기쁠 때든 슬플 때든, 괴로울 때든 병들 때든, 부할 때든 가난할 때든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믿음으로 살고 예배로 모이고 주님을 의지해서 사는 것이지 어느 그리스도인이 자기 팔자타령하면서 눈물을 흘릴 시간이 있습니까. 그건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 모습이었을 수 있지만 이제 믿음 안에 있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할을 배제하면 우리 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배제되면 사람은 외롭고 가난하고 병들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배제하면 그래요. 예수님이 찾아가신 처음 만난 사람들은 다 그랬어요. 예수님이 찾아올 때까지는 그랬어요.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난을 공감하실 때 그 공감이 치유로 이어졌어요. 그걸 알아야 되요. 삼십 팔년 된 병자를 예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의 병이 오래된 것을 아시고 그리고 그에게 뭐라고 물어보셨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사람의 아픔을 예수님이 공감하시는 것은 치유의 의지로 이어졌지 그저 그 사람과 같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그리고 끝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의 삶에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배제됐을 때는 그랬지만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는 인간의 아픔이든 병이든 죄든 그들의 상황을 공감하는 것은 치유의 의지를 낳고 구원의 의지를 낳고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을지어다’ 민망함. 적어도 예수님의 차원에서 인간의 고난에 대한 민망함은 깨끗하게 하려는 의지를 낳았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러므로 성경이 구약 신약을 통틀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근 중에도 풍요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심판 중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54절 ‘요셉의 말과 같이 일 곱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이 구절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각국 모든 곳에는 기근이 있고 애굽에도 기근이 있더라’가 아니고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이걸 주목해야 됩니다. 

세상에 왜 기근이 있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세상에 기근이 있는데 어떻게 요셉이 있는 곳에는 먹을 식물이 있느냐. 그래서 그도 먹고 그 민족도 먹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줄 수 있느냐 이걸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해야 됩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의 역발상, 세상은 풍년을 만나서 흥청망청 먹고 마실 때 요셉은 앞으로 올 흉년을 내다보고 준비했어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칠년을 내다보고 십 사년을 내다보고 사십년을 내다보고 또 다음 세대를 내다보고 내가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장차 누군가가 갈 땅 끝을 내다보고 준비하는 사람이에요. 요셉은 칠년 후를 내다보고 십 사년 후를 내다봤어요. 그리고 준비했어요. 그래서 바로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가 55절에 말하기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요셉은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래서 모친 마리아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하인들에게 ‘그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랬더니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예수님의 말씀.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여기에 살 길이 있고 함께 살 길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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