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의 사랑 (엡 3:14-21)

  • 잡초 잡초
  • 782
  • 0

첨부 1


그리스도의 사랑 (엡 3:14-21)


영국에 Julian Ellis Morris 라는 이름의 괴팍한 부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미아가 되어 걸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청년이 된 어느 날 그가 부자의 아들인 것으로 발견되어 아버지 부자의 거대한 부를 상속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괴팍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도 걸인의 삶을 계속합니다. 아침에 날이 밝으면 걸인의 옷 차림을 하고 역을 중심으로 한 거리에서 구걸 행각을 하고 기분이 좋은 날이면 면도날, 비누, 샴푸를 팔러 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달에 꼭 한번 근사한 옷 차림을 하고 리무진을 타고 런던 최고급 레스트랑에 가서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일년에 한번은 파리를 위시한 유럽의 여러 도시로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최고급 럭슈리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이튿날이면 그는 다시 영락없는 거지 옷, 남루하게 헤어진 옷을 입고 초점잃은 눈동자로 구걸 행각을 나섭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믿는 순간 왕중의 왕의 자녀가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순간만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고 기뻐하고 감격합니다. 또 일년에 한 두번 특별힌 집회에 참여할 때는 은혜를 받고 내가 왕의 자녀인 것을 눈물이 나도록 감격해 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집회를 마치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서는 우리는 다시 영락없는 거지꼴을 하고 황금과 명예를 찾아 구걸 행각에 나서는 모습이 아닌가요? 

우리들의 무력한 생존만 하는 하숙집과 다름 없는 가정생활, 그리고 무력하기 짝이 없이 의미도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직장 생활이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요? 왕의 자녀들이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바울은 이 편지를 씁니다. 에베소서를 가득히 채우는 중요한 단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충만’이고 또 하나는 ‘풍성’입니다. 충만하고도 풍성한 삶-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이 충만하고도 풍성한 삶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열쇠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비밀을 알고 깨우치도록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 깨우치면 그들은 왕의 자녀된 놀라운 삶의 자리에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그런 그리스도와의 사랑속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1.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전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도 그 사랑을 받을 준비기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랑을 액면 그대로 받지 못하는 모습들을 목격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랑을 받는 그릇입니다. 여러분은 보석을 종이 그릇이나 비닐 그릇에 담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할 분이 계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에베소 성도들의 ‘속 사람’을 위해서 먼저 기도합니다. 

16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지금 이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아버지께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선행하는 본문 15절에서“-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하지 않았습니까? 왕의 자녀들을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인생의 노년을 앞두고 “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속 사람이 우리의 세월과 상관없이 새로워 질수 있단 말입니까?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엡5:16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고 엡5:18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충만하면 속 사람이 새로워 집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고 인생이 세월 더 할수록 더 놀라운 감격과 감사의 삶으로 다가옵니다. 모세는 120세에도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고 증언합니다. 그는 죽어도 건강하게 죽은 것입니다. 그가 거룩한 영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고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체험-으로 시작됩니다.

자, 우리의 속사람의 그릇이 준비 되었으면 이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 삶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삶의 문제는 예수를 구주로는 믿었지만 예수가 아직도 그들의 삶의 주인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비극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여기 ‘계신다’는 단어는 그리스도가 단순히 우리 마음에 존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왕좌에 자리잡고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원문에 ‘카토이케오’(katoikeo)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와 유사하게 사용되는 단어에 ‘파로이케오’(paroikeo)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꼭 같이 “계신다, 거한다”는 단어로 번역될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파로이케오’는 주로 ‘손님/나그네로 거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함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거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반면에 ‘카토이케오’는 ‘주인으로 거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주인으로 거함은 의미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는 온전히 자유롭게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거함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가 주인되어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가 사랑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17절)고 말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깊을 때 열매를 맺고, 건물은 터가 견고할 때 높이 빌딩을 세울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열매가 없고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아직도 주님의 사랑안에 우리의 삶이 뿌리박지 못하고 터를 자리 잡지 못한 까닭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온전히 그에게 순복하셔야 합니다.

로버트 멍어가 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의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우리 마음에 모셨다면 그분을 손님 취급하지 마십시오. 그분에게 우리 인생의 집 열쇠 뭉치를 내어드리십시오. 그가 우리 마음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분을 진실로 주인되게 하십시오. 그가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다스려지게 하십시오. 그때 우리의 삶은 그분의 사랑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믿음의 건물을 높이 세워갈 것입니다. 그분을 99가 아닌 100 신뢰하십시오. 그것이 믿음으로 그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3.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성숙-을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진실로 주님의 사랑안에서 세워져 가려면 그분의 변함없고 진실하신 그 사랑을 온전하게 깨달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18절)고 권면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젊은 청년들이 사랑에 빠지면서 인생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인간의 사랑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최대의 사랑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그 사랑은 세상 전체를 끌어안을수 있을 만한 넓은 사랑이 아닙니까. 존 스토트는 그의 사랑은 서로를 원앙(원수+앙숙)으로 대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품에 안을 만큼 넓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랑의 길이는? 성경은 그의 사랑이 영원까지 이어갈수 있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은 결코 멈출수 없는 사랑, 변질될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의 깊이는? 저 무저갱의 심연에 던져질만큼 타락한 죄인을 위해 음부의 깊은 곳까지 자비의 손을 내미시는 사랑이십니다. 그의 사랑의 높이는 지옥에 던져 마땅한 죄인을 죄의 수렁에서 끌어올려 저 높은 하늘의 보좌앞에 죄인을 보혈로 씻어 드리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가 충만하면 아니 그의 사랑의 임재로 충만하면 우리는 아마도 아빌라의 테레사처럼 “주님, 이제 아무 것도 더 원함이 없습니다. 당신으로 족합니다. 저는 이제 충분하고 충만합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바울의 간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넘어서서 우리의 존재와 삶을 그의 충만하심으로 채우실 것이라는 찬양 곧 송영으로 말미를 장식합니다. 

20-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의 황혼에 절박한 심정으로 아들 하나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까?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할 것이라”고. 이만하면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넘치신 하나님의 사랑의 부으심이 아닙니까? 아마 아브라함은 이 쏟아지는 별들을 세다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 모래 알을 세다가 “하나님, 이만하면 됐어요. 전 하나님이면 충분해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아빌라의테레사의 고백의 본질이었습니다. 고. 

수년전 제가 불란서의 영성 공동체 떼제를 방문했을 때 저는 물질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살던 수천의 유럽청년들이 한 마음으로 이 고백을 찬양으로 부르는 모습을 보며 제 마음에도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무엇이들 청년들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가능하게 했을까?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임하신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임재로 채움 받은 그들에게 정말 더 이상 원함이 없어진 때문입니다. 우리 말로 떼제 공동체는 이 찬양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두려워 말라/걱정을 말라-주님께시니/아쉬웜없네.
두려워 말라/걱정을 말라주님 안에서”

그러나 ‘십자가의 성 요한’이 시를 쓰고 ‘아빌라의 테레사’가 애송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Nada te turbe 어느 것에도 마음 흔들리지 말라
nada te esperante 무엇에든 걱정하지 말라
todo se pase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나니
Dios no se mude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으시나니

La paciencia 인내 함으로
todo lo alcanza 모든 것에 이르라
Quien a Dios tiene 하나님을 지닌자
nuda le falta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Solo Dios basta 오직 하나님으로 만족하리로다.”

오늘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도합시다. 
(이동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