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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에 서서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 16: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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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서서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 16:13-24)
  

법정 용어 중에 '최종변론'(closing argument)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검사나 변호사가 어떤 재판 건에 대한 입증들을 다 마친 후에 각각 마지막으로 결론적인 변론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배심원이나 판사의 판결이 원고 쪽이냐 아니면 피고 쪽으로 내려지느냐 하는 것은 이 최종변론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며, 특히 쌍방 간에 내놓은 증거들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에는 이것이 더욱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검사나 변호사나 이 마지막 변론 때에 그동안 법정에 제시된 모든 증거들을 자기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총정리하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자기 쪽의 주장이 옳은 것을 설파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이제 끝내고 있던 사도 바울이 마치 그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어디까지나 편지를 쓰고 있었지 재판소에서 변론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린도전서의 끝부분은 다른 여느 바울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인사말과는 좀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교회는 초대교회들 가운데서도 대표적으로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책망하고 고치고 가르치는 말로 다 채워진 것이 바로 이 고린도전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끝인사말을 쓸 부분에 와서도 그런 감정의 흐름이 사도 바울의 심령 속에는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주었지만, 이제 그 모든 가르침들을 집중적으로 총정리하여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뇌리에 꼭 박히도록 마지막 결론을 남겨 놓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 이 고린도전서의 끝부분, 오늘 우리가 펼치고 있는 본문에서는 그저 의례적인 인사말 대신에 아주 뼈 있는 내용이 함축된 인사말이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과 14절에서 "13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4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한 것이 바로 사도 바울로서는 일종의 '최후변론'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지금까지 자기가 고린도교인들에게 가르쳤던 교훈을 '믿음'과 '행함'이라는 두 단어로 총정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계속 이어지는 마지막 인사말을 통하여, 지금 그가 최종적으로 강조하는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이 고린도교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것인지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그 속한 성도들이 꼭 기억하고 지켜야 할 신앙과 생활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교회를 통하여 다른 성도와 복음 전도자들을 섬기는 '생활 운동'을 나타내야 합니다.

본문 15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에 "15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17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18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란 말은 막연한 일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아주 구체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행해야 할' 대상이란 바로 다른 성도들과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고린도전서 1장 16절에 의하면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서 사도 바울이 직접 세례를 준 몇 안 되는 가족 중에 하나였습니다.
"아가야"는 고린도와 아테네를 포함하는 헬라의 남부 행정 지역인데, 스데바나의 집안이 바로 "첫 열매" 즉 사도 바울이 그 지역에서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한 첫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이 집안사람들이 고린도교회의 교인이 된 후 곧 뚜렷이 드러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본문의 뉘앙스는 '이것이 그들이 선택한 인생이 되었다.'(this is the life they have chosen)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즉 이 스데바나의 온 집안사람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높은 사람들로 여기고서 항상 그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그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아예 온 가문의 과업으로 삼았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16절에서는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라고 했습니다.
앞의 '섬기다'라는 말이 여기서는 '일하며 수고하다'는 말로 바뀌어 있습니다.
즉 '다른 성도를 섬긴다'는 것은 무슨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미사여구가 결코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일거리'이며 '땀 흘리고 고생하는 노동'과도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자세로 다른 성도를 섬기는 것을 자신의 천직처럼 여겼던 교인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스데바나 집안사람들 외에도 있었으며, 그들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평신도 리더들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적인 경향은 원래 '남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서비스를 받는 것이 행복한 상태이며, 남을 섬긴다는 것은 하인이나 종이 하는 일이며 극단적으로는 노예의 일에 속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성도는 이런 일반적인 본성에서 완전히 탈바꿈해서 오히려 '성도 섬기는 것'을 자기 인생의 본분처럼 알고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그 스데바나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라는 교우들을 동반하고 바울을 방문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1절에 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몇 가지 신앙생활의 문제들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기 위하여 편지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 이 세 사람들이 교회 대표자들로서 그 편지를 가지고 바울을 찾아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이 고린도전서의 서신을 바울에게서 받아 고린도교회에 다시 전달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 사람의 방문을 가리켜 "너희의" 즉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한 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부족한 것'이란 말이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지는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생긴 심적인 거리감일 수도 있으며 혹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로 인하여 생기게 된 실망감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세 사람의 방문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의 그런 영적, 심적 아쉬움이 다 "보충"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큰 "기쁨"까지 넘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쁨을 두고 이어지는 18절에서는 '시원케 하다'(refresh)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청량음료를 영어로 'refreshment' 혹은 'refreshing drink'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시는 순간 '기분이 상쾌하게 새로워지는' 음료수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자동적으로 근심에 사로잡히고 무거운 생각에 눌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스데바나 일행을 만나게 되는 순간 '이런 교인들이 있는 한에는 고린도교회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무거웠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상쾌한 기분으로 싹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무더위에 지쳐 있다가 시원한 청량음료 한 잔을 쭉 들이켜 마신 것 같은 기분전환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했다"고 한 것은 그 세 사람은 비단 사도를 만날 때뿐 아니라 평소의 교회생활을 통하여서 마음네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그와 똑같은 '영적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교인이 실제로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에서 얼굴을 대하고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절로 기분이 상쾌해지는 교인들이 정말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의기소침하고 인생이 복잡할 때에 교역자의 심방을 받거나 주일에 교회 복도에서 장로님이나 권사님의 밝은 얼굴을 대하거나 혹은 어느 교인 집에 초대를 받아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내 심령이 맑고 상쾌하게, 즐겁고도 시원하게 바뀌는 체험을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성도와 교역자들을 섬기는 것을 자기 인생 전체를 통해 헌신해야 할 본분이라고 아예 작정을 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신자들이 바로 그런 청량음료와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14절에서 말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일'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를 더욱 자세히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며 '주의 사자들을 돕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은 먼저 그 예수님의 몸 되신 교회 안에서부터 열심히 충성하고 그 예수님의 보혈로 한 권속이 된 성도들부터 먼저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선행을 베푸는 것이 기독교인이 '사랑으로 행하는 일'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구제는 신자가 행하는 선행의 일부분일 뿐이지 결코 최우선의 일도, 최종적 목표도 아닙니다.
이 인간사회에 가난과 질병과 온갖 부조리가 존재하는 것이 마치 기독교인들의 사랑이 모자라서 그런 것처럼 둘러대고 교회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뒤집어씌우는 것은 억지도 보통 억지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결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된 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설혹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교회 재정 전체를 사회사업이나 구제에 다 쓴다 해도 세상에서 빈곤을 없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처럼 원래 저주 아래에 있는 세상을 사람의 선행으로써 유토피아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전혀 모르고 천당의 존재를 믿지 않는 가짜 신자와 불신자의 소리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을 때, 그 '너희'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제자들' 즉 기독신자들을 가리킨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먼저 교회의 성도들과 교역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자기 집안은 돌보지 않고 사회사업만 한다고 나돌아 다니는 사람을 누가 칭찬하겠습니까?
이웃에게는 친절하다는 사람이 정작 집에서 자기 부모를 잘 모시지 않고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입니까?

마찬가지로 참된 크리스천의 사랑이란 것은 그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섬김을 통하여, 서로의 심령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사랑과 위로와 격려와 도움을 통하여 발휘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교제가 부러워서 바깥세상의 불신자들이 절로 교회로 찾아들고 예수님을 믿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전도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독신자가 전 생애를 바쳐 헌신해야 할 제일의 '생활 운동'임을 깨닫고 꼭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교회를 중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진리 운동'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어지는 19절 이하 24절까지의 말씀에 "19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아시아의 교회"들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문안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세웠던 교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바울의 전도 사역에 자주 등장하는 부부인데, 본문에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언급되고 있는 대로 어디를 가든지 자기네 집을 교회당으로 사용하면서 전도생활에 열심을 다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교회들과 또한 그 교회의 "모든 형제"들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문안 인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것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나게 될 때에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를 나누던 관습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처럼 교회와 교회 사이에서도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누며 영적으로 교통하고, 또한 같은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서는 '거룩한 입맞춤'으로써 뜨겁게 교제하던 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어지는 21절 이하의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문안 인사와 교제를 서로 나눌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한 가지 조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까 13절에서 말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라는 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즉 그 필수조건이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여기 '친필로 문안하다'라는 말은, 당시에 편지를 보낼 때에 발신자 본인은 구술만하고 서기가 대필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그럴 때에 편지 제일 끝에 가서는 발신자가 직접 자기 이름이나 혹은 한 문장 정도를 '친필로' 직접 쓰면서 끝맺음했던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타이핑이나 컴퓨터 프린터를 사용하여 편지를 쓴 후에도 마지막 부분의 서명만은 친필로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친필로 정성스럽게 마지막 문안 인사를 하면서 사도 바울이 곧 이어서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실로 엄중하기 짝이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바로 앞의 절까지 충만하게 이어졌던 그 다정다감했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싹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한 가지 사실만큼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끝까지 분명히 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처럼 여러 교회들과 그 성도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함께 보내는 문안 인사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린도교회에 교적을 두고 이 편지를 공적으로는 같이 받아 보고 있는 교인이라 하더라도, 그 개인의 심령이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이처럼 '거룩한 공회'를 통하여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이 영적 교제를 받을 자격도 없으며 아예 나눌 자세부터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런 소위 교인이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대상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22절 끝에 이어서 나오는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은 아람어로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단어인데,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이 기도할 때나 인사할 때에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주 썼던 말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마라나타'가 없는 교인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처럼 주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을 향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축복하고 또한 자기의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전하면서 이 서신을 끝맺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와 초대교회들의 참된 신자들이 서로 문안하고 축복하면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배경에는 이처럼 '예수님 사랑'과 '재림 소망'이라는 영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마라나타'가 없는 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는커녕 오직 저주만 있을 뿐이며, 이 주님 재림의 신앙이 없는 교회나 교인이 서로 사랑하고 문안하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허례허식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라는 이름만 있다고 다 서로 문안하고 교류하고 협조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주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되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그 안에는 오히려 '저주 받아 마땅한' 이단 교회와 거짓 교인도 분명히 있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교회와 교인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소위 '교회 일치 운동', '교단 통합 운동'이라는 것이 마치 기독교의 최우선 과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독교계 내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운동에 앞장서는 목사들은 그야말로 '사랑이 충만하고 선하기 짝이 없는 거룩한 주의 종'으로 인정받는 시대인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정신을 차리고 똑똑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목사라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대속 공로는 믿지 않고 그 대신에 천주교 사제나 불교의 중이나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과 교제하는 것을 '기독교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목사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배교자요 이단임에 분명한데, 그런 가짜 목사들과 도대체 왜 서로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아무리 교회 간판을 걸고 있어도 천당의 영생을 소망하지도 전파하지도 아니하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저 영원한 지옥 불못에 용과 함께 떨어질 것이 기정사실인데, 그런 이단 교회들과 도대체 왜 이 지상교회 안에서는 '무조건 통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죄인의 구세주로 사랑할 줄 모르고 그 주님의 두 번째 임하심을 기다리지 않는 교인이나 교회라면 교제나 교류의 대상은커녕 오히려 더욱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저주'의 대상일 뿐인 것입니다.

비록 몸으로는 전 지구상 곳곳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 지체로 연결되는 '우주적 교회'의 기독교인이란 오직 피차 '마라나타'라고 인사할 수 있는 신자들밖에 없습니다.
비록 교단적으로는 다르다 할지라도 진정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는 교회란 오직 피차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소망을 공유하고 있는 교회들일 뿐인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어떤 교인이 참된 신앙의 진리를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교회가, 그 교인이 과연 '초림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데에서 깨끗이 판가름 나고 명백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 죄인을 위해 화육하신 구세주로 믿고 사랑하며 또한 그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속히 다시 오실 재림주로 믿고 소망하는 이 소중한 신앙을 바로 참된 교회를 중심으로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참으로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교회생활에 온갖 허점과 실수가 많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인사마저도 이처럼 뼈 있는 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제발 한 교회 안에서 목회자들에 대한 편애나 은사의 차이 때문에 갈라지지 말고, 성도를 서로 섬기고 교역자들을 기쁘게 해 주는 삶을 살아라.'고 간곡히 권면했습니다.
또한 '이제 더 이상 우상숭배나 부활 문제 같은 기본적인 교리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고,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의 재림 신앙만큼은 확실하게 붙잡는 가운데 교회를 든든히 지켜라.'고 엄중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이 두 가지만 제대로 된다면 고린도교회 역시 '문제 많은 교회'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떼고 정말 '교회다운 교회'로 설 수 있을 것이며 '참된 교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문안하는' 우주적 교제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깨어 믿음에 굳게 선' 신앙과 '사랑으로 행하는' 생활이 바로 우리가 개혁주의 교회운동을 통하여 스스로 체험하고 또한 조국과 세계에 전파하고자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교회 안의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통하여 성도들을 서로 섬기고 또한 본 교회 교역자들을 비롯하여 교단의 개척교회 목사님들이나 해외의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신자로서 해야 할 제일 급선무의 생활운동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구주로 영접하고 그 주님의 재림을 함께 기다리는 택자들을 천하만민 중에서 불러 모아 교회들을 세우는 것, 이것이 진짜로 세상의 빛이 되는 멋진 진리운동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서로 섬기는 삶'으로써 교우들과 전도자들을 기쁘게 하며,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온 세계의 참된 교회들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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