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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붙잡힘 (행 9: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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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힘 (행 9:15-19)


강도가 숨어 살며 도망 다닙니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활보하며 날마다 가슴 졸이며 살아가다가 어느 날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것은 행복입니까 불행입니까. 그 강도는 붙잡혔을 때 소감이 어떠냐고 물으니 “시원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붙잡힘은 구속이고 속박당하는 일인데 왜 시원하다고 대답하였을까요. 때로 부자유한 자유함보다 구속이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붙잡힘은 복이고 은혜이고 참 자유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거리의 아이들이나 가출소년들은 부모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그것이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 자유는 무책임한 자유이고 불행의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구속받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구속받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고 참 자유입니다. 죄인이 붙잡혀 감옥에 가야 진정한 자유이고 복입니다. 남편은 부인으로부터 강하게 구속받아야 자유로운 것입니다. 느슨하게 잡히면 갈등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최고의 복은 예수에게 아주 강하게 붙잡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로부터 부름 받고 붙잡히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붙잡힌 후 고백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께 붙잡히고 나서 가장 행복해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사울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악질적으로 핍박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치를 떨 정도로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한참 떨어진 도시인데도 사울은 멀다하지 않고 단숨에 가고 있습니다. 그때 모습을 사도행전 9장1절을 보면 사울이 “위협과 살기기 등등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친 듯이 달려갔다는 말입니다. 그때 환상 속에서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그때 사울이 살기가 등등한 마음만큼이나 빛도 강렬하게 비추어 그 빛에 사울이 눈이 멀어 순간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손에 이끌려 사울은 죄인처럼 다메섹 시내로 끌려들어 갔습니다. 

그때 사울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다메섹에 살고 있던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계시가 임하였습니다.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라.” 그래서 사울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해 주면서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핍박하던 저 사람에게 왜 눈을 뜨게 해 주라하시나, 저 사울에게는 벌 위에 벌을 내려도 시원찮은데”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본문 15절을 보면 또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즉 “살기등등한 사울을 거꾸러트린 것은 내가 그를 쓰기 위하여 부른 것이니 너는 가서 안수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울이 변하여 마침내 바울이 되고 바울은 전도자가 되고 사도가 되어 평생 종횡무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잡힌 후 바울은 여러 말로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화끈한 고백입니까. “이 붙잡힘” 이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입니다. “내가 예수께 구속되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입니다. 이렇게 붙잡혔습니까?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소명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명은 이유이고 목적이고 중심입니다. 이 소명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소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공무원은 이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소명은 품위이고 정신입니다. 이 소명이 있어야 이권개입을 안하게 되고 돈 몇 푼 받고 불명예 당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돈에 뜻이 있으면 공무원 그만두고 사업하든지 장사하든지 해야 합니다. 기업가에게도 이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왜 사업을 하는지 이유가 분명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부정을 저지르게 됩니다. 

양을 속이고 질을 속이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모든 직업은 하늘이 주신 천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직업은 성직 수행하듯이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목회자는 더욱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더 확실한 부름 받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소신이나 자신감이 없는 목회를 하게 되고 억지로 목회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 이런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직업으로 목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정이나 희생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목회현장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직분을 받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직분을 극대화해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 소명이 없이 직분을 받으면 권위를 앞세우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하여 매사에 걸림돌 노릇을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은 대부분 중직을 맡은 자들입니다. 중직을 맡은 자들만 조용하면 교회는 조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길에는 이 소명이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나서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인들과 세상의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늘 감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를 직접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신서 첫 장 첫 구절을 보면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은 ...”하고 고백합니다. 이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것이 불분명한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태도나 내용이나 사역이나 삶이 불분명한 것입니다. 

응답 

예수께서 사도바울을 다메섹을 지날 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마침내 사울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고 핍박하던 예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자신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18절을 보면 “사울이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부름에 응답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순종을 약속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이제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제자로, 전도자로 부름에 합당하게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 결단 속에는 “이제부터는 희생과 고난도 각오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울이 마침내 바울이 되고 전도자가 되어 그때부터 충실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것이 부름에 대한 응답입니다. 부름을 받았으면 응답이 분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결단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 일행이 “즉시 배를 버려두고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무서운 결단입니다. 엘리사에게 엘리야가 “나를 따르라”고 하자 엘리사는 즉시 따라나섰다고 하였습니다. 그 속에도 무서운 결단이 들어있습니다. 주께서 마태를 부르시자 즉시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이 응답입니다.             

저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 부름도 모호하였고 응답도 모호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생각해 보니 충청도 기질이 그대로 나타나 끊고 맺는 것이 불분명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집안에서 “너는 신학교에 가라”고 했을 때 화끈하게 결단하고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가라고 하니까 그냥 밀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소명도 응답도 아주 불분명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주 엉거주춤하고 모호한 태도로 이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분명하게 응답받기까지 매사가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이런 목회자들이 많고 이런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 속에도 이런 불분명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중직자들 중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목회자는 평생 불분명한 목회를 하게 됩니다. 매사 자신감이 결여되고 새벽기도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평생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고 교회에게 불행한 일이고 교인들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매 주일마다 억지로 끌려오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생활을 매일 그렇게 억지로 생활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요한 웨슬레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웨슬레는 그것이 신앙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32세 때 미국 조지아 주로 선교를 떠나면서 “내가 인디언들을 다 개종시키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런 그가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타고 가다가 거친 풍랑을 만나 기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수도 없이 기도했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라비안교도의 지도자 슈팡겐 베르그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아십니까?”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의 집안에서 자랐는데 예수를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비웃듯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묻기를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 물음에 웨슬레는 순간 마음에 찔렸습니다. 모든 모태신앙자들이 느끼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야코가 죽은 자세로 겨우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물었습니다. “당신은 진정 예수를 아십니까?” 그 물음에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고 후에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힘으로 선교를 하겠습니까. 

실패하고 돌아와 그는 고민스럽게 기도하다가 마침내 영적 체험을 하게 되어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그때 주어진 힘으로 그 후 52년 동안 종횡무진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소는 물가로 끌고는 갈 수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아이를 억지로 공부시키려고 방문을 지켜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이나 지키는 부모나 둘 다 불행한 일입니다. 먼저 그 아이가 뭘 좋아하는가를 알아보고 그것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방문을 지키지 않아도 스스로 밤새워 공부를 합니다. 예수의 제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부름 받음과 응답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내가 스스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사로잡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사로잡힘 

사울은 18절을 보면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스스로 결단하고 응답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만 알기로 작정합니다.”라는 응답입니다. 17절을 보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충만과 응답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제자 됨의 순서입니다.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는 삶을 말합니다. 이 사로잡힘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영이 내 삶을 인도하고 안내하고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그 힘으로 살아가고 일하였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사울왕은 사무엘이 머리에 기름을 붙자마자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사무엘상10장10절) 다윗은 머리에 기름을 붙자마자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하였습니다.(사무엘상16장13절) 제자들이 진로를 위하여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였다(사도행전2장3절)고 하였습니다. 예수 제자의 표시는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나는 고목나무에 불과합니다. 타다 버린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때부터 주의 영이 내안에 임재하면 나는 주시는 힘을 공급받고 일하게 됩니다. 

성령은 사역의 힘을 공급하십니다. 지치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배후에서 무한한 힘을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든든함을 느끼며 일하게 하십니다. 이 힘이 가장 큰 백이고 배경이고 후원자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요새시요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산성이시라”(시편18편2절)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대통령께서 사람들이 경제회복을 하고 G 20 정상회담을 유치하고 아랍 에미레이트의 원전을 수주하고 남미 볼리비아에서 희귀 자원까지 확보하고 나니까 외국 정상들이 부러워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 뒤에 하나님께서 계신 줄을 모르고”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고 있음을 느끼는 고백입니다. 내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이 최대의 힘이고 백입니다. 바울은 그 힘을 믿고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물에 빠지면 건져주셨고 뱀에 물리면 낫게 하셨고 옥에 갇히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를 말릴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 힘으로 소아시아의 비탈길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사역을 마칠 때쯤에는 나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힘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붙잡혀야 합니다. 한번만 붙잡히면 주님은 평생 그 끈을 풀지 않으십니다. 참 신비한 힘입니다. 그 힘이 제자의 삶을 살게 하고 봉헌의 삶을 살게 하고 중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희생의 삶을 살게 하고 섬김의 삶을 하되 아주 기쁨으로 살게 하십니다. 

제임스 메리트라는 분이 “성령의 열매가 당신을 리더로 만든다.” 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 딸에게 편지하며 현재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식을 한번 하자면 나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외식을 위해 너의 엄마는 아빠에게 옷을 입혀야 하고 아빠의 수염을 깎아야 하고 머리를 빗겨 주어야 하고 아빠를 휠체어에 태워 집 밖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가야 하고 차 문을 열고 아빠를 차에 태워야 하고 휠체어를 접어 차에 실어야 하고 차를 몰고 음식점에 도착하면 엄마는 차에서 휠체어를 내려 펴야 하고 문을 열고 아빠를 내려 휠체어에 앉혀야 하고 차문을 닫고 휠체어에 태운 아빠를 식당으로 밀고 들어가야 하고 식사하는 동안 엄마는 아빠를 먹여 주어야 하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엄마는 음식 값을 지불하고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단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끝내면 엄마는 아빠에게 ‘여보 저녁 외식시켜 주어서 고마워요’ 라고 진정으로 따뜻하게 말을 한단다.” 남편이 쓰러져 반실불수가 되자 부인이 언제나 남편의 손발이 되어주었습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이 성령 안에서 가능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도우시는 영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영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때 내 안에 생수가 강같이 흐르게 되고 자원하는 마음이 철철 흐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 10시까지 잠을 자도 하루 종일 피곤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아침부터 움직이며 살아도 온 종일 힘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의 차이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삶이 주는 힘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특히 제자의 삶은 확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소유자들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분명하게 사역하고 신앙생활하고 주님의 편에 서서 살아야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본문은 부르심과 붙잡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진정한 제자의 삶은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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