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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으로 회개한 자 (삼하 15-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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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회개한 자 (삼하 15-18장) 
 
 
본문은 압살롬의 반역과 다윗의 피난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압살롬도 다윗처럼 용서를 받았지만 진정으로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압살롬은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는 한편 지지자들은 얻어갑니다(15:1). 먼저 “일찍이 일어나”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친밀한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고 말하여 왕에 대한 반감을 가지도록 했지요(2-3). 한편 자기는 공의롭게 통치할 인물로 홍보하고서, 사람이 절하려하면 겸손한 척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었지요(4). 다윗에게 용서 받은 후 겉으로는 사람이 확 변한 것 같았지만 속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았던 그는 복수와 반역을 도모했지요.

7절을 보면 압살롬은 무려 “사 년” 동안 이같이 하여 한 사람씩 얻어갔습니다. 성경은 압살롬의 이 모든 행동을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6)하였다고 총평합니다.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10)고 선언하기 위해 “여호와께 서원한 것”(7)이 있었다며 여호와의 이름까지도 도용한 사실을 기록하지요. 예루살렘의 “이백 명”이 아무것도 모른 채 초청되었는데(11), 다윗의 사람들을 훔쳐서 강제로 반란에 가담시킨 사실 역시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역하는 일이 커가자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졌습니다(12). 악인의 형통이지요.

다윗은 암논 사건을 공의롭게 판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압살롬은 직접 암논을 처단했지요. 그런데 그 일에 대한 다윗의 처결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공의롭지 못한 아버지의 통치권을 빼앗고자 시도합니다.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비판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 하는 중에 자기는 옳고 의롭다는 ‘자기 의’에 빠진 것이 큰 문제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었으니까요. 좌로 치우친 사람을 비판하면서 우로 치우치게 되는 이런 일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사람, 곧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지 못한 압살롬 같은 사람에게서 흔히 발생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압살롬은 형통한 반면, 회개했던 다윗은 피난을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13) 돌아간 것을 보고받고 즉시 “도망”(14)합니다. 예루살렘의 요직에 있었을 이백 명이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겠지요. 반역이 이토록 강력해지기까지 몰랐다는 것은 다윗의 도덕성과 함께 통찰력까지도 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자식이 하는 일이니까 의심 없이 믿고 있었던 거지요. 다윗에게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늘 바른 판단을 막는 장애가 됩니다. 다윗도 통치자로서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인 것이지요. 죄뿐만 아니라 이런 약점으로 인해 고통을 겪습니다.

피난 중에 “가드 사람 잇대”(19)가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21)라며 다윗과 동행합니다. 다윗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한 것이겠지요. 제사장 “사독”과 “레위 사람들”도 다윗과 동행하려 합니다(24).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돌려보며,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고 합니다(25). 여기서부터 진정으로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압살롬과는 대조적으로 현재의 고난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장 죽이실지라도 할 말 없는 죄인임을 시인한 것이지요. 젊은 날 죄 없이 광야 생활할 때는, 몸은 고생이어도 마음은 떳떳했습니다. 지금은 징계를 받아 광야 길을 걷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괴롭습니다. 그는 왕의 신분임에도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30) 행합니다. 전형적인 회개의 태도인데, 이 모습뿐이라면 비관적인 모습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은 다윗처럼 징계 중에도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25)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면서 징계의 아픔과 슬픔을 감내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상황에 모든 것을 맡겨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폐위하지 않은 이상 왕으로서 당면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행하며 은혜를 바랍니다. 먼저 언약궤를 돌려보냄과 함께 사독과 아비아달을 압살롬 진영의 첩보원으로 삼았지요(28). 또 모반자들 중에 아히도벨이 있다는 말을 듣자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31)라고 기도합니다. 이때 “후새”가 등장한 것은 이 기도에 대한 일차 응답이었지요(32). 다윗은 즉시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내며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34)고 말합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다윗처럼 징계 받는 중에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절감하고 애통해합니다. 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회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까지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미워하고 죄를 대적하며 다시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하시려고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해가면서 받습니다. 언약궤라도 의지해서 징계를 감하려는 미신적 요행을 바라지 않지요.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소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자세로 수치와 모욕을 견딥니다. 징계 중에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모습의 절정이 시므이를 만났을 때 드러납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집 족속” 중 하나였는데(16:5), 그에게는 다윗의 환난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독한 말로 “저주”하며 “돌”을 던졌습니다(6).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8). 한 마디 한 마디가 다윗의 가슴에 못질 하는 것 같았겠지요. 아비새가 저주하는 시므이를 당장 죽이려하자 다윗은 만류합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10)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처럼 누구를 탓하거나 스스로 복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합니다(11-12). 이 말 속에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징계로 받아들이며 근신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동시에 과도한 비난을 받고 있는 억울한 처지는 하나님께서 살펴보실 것이라는 믿음과 이 때문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것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습니다.

한편 압살롬은 아마도 다윗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내려다보았을 그 지붕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했습니다(22). 다윗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차단하여 따르는 자들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려는 아히도벨의 전략이었지요. 그런데 이로써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언되었던 다윗에 대한 징계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12:11). 그리고 예언의 성취와 함께 다윗에게 긍휼이 베풀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아히도벨의 신묘한 작전 대신 영웅심을 자극하는 후새의 어설픈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17:1-13),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14)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는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믿고 소망했던 것처럼 그의 원통함을 감찰하시고 선을 베푸셔서 다시 언약궤를 볼 수 있도록 섭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압살롬이 후새를 받아들인 것, 아히도벨의 전략 대신 후새의 전략이 채택된 것, 첩자들이 바후림의 “어떤 사람”의 집에 숨을 수 있었던 것, 심지어 여인이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어서 압살롬의 종들이 사람을 찾지 못한 것(18-19), 이 모두가 우연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섭리는 매우 사소해 보이는 일에까지 작용해서 결국은 다윗과 모든 백성이 그 밤에 요단을 건너 목숨을 구하게 했습니다(22). 요단을 건넌 후에는 “소비” “마길” “바실래”로부터 피난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공급받았지요(27).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에 순응한 다윗은 긍휼을 얻었습니다.

한편 악인의 형통은 길지 않았습니다. 먼저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 스스로 목매어 죽”지요(23). 18장은 전투 상황을 생략한 채 압살롬의 비극적인 죽음을 묘사합니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18:10)라는 보고에서 ‘나무에 달렸다’ 표현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과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신 21:23; 27:16). 압살롬의 반역은 하나님 말씀을 대항한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아히도벨의 탁월한 전략 역시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 반드시 죽일지니”(레 20:11)라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대항하는 방법이었지요. 말씀을 대항하는 사람의 결국은 파멸입니다.

다윗과 압살롬의 대조는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는 말씀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성도는 모든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모두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죄를 미워하고 대적하도록 하시려고 징계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참으로 회개하고 죄를 대적하는지, 오히려 죄를 품고 말씀을 대적하는지에 따라서 삶의 양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됩니다. 참으로 회개한 자의 모습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지 아닌지 점검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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